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臍=배꼽 제. 동자(同字)䐡.
원문출처=사가집(四佳集)제46권 시류(詩類) 화수주수도(花樹走獸圖) 10수
四佳詩集卷之四十六○第二十二 / 詩類
花樹走獸圖 十首
春芳眠麝
雨餘春草碧初齊。麝自安閑睡不迷。莫向網羅多處去。由來買禍爲香臍
午花睡貓
漠漠春陰午景遅。牧丹花下睡貓兒。誰知眼孔神通法。能辨乾坤十二時。
寒猿掛樹
老樹槎牙雲與齊。斷猿閑事費攀躋。如何峽客傷心處。月落更深更苦啼。
狡兎藏林
中山奇種說良㕙。狡性由來不可馴。到處置罦機已熟。也宜林下解藏身。
栗梢飛鼬
八月山城栗子肥。鼬兒騰躍疾於飛。朝三暮四渠何管。無數偸來摘得稀。
蓮房黠鼠
蓮房秋後似蜂房。玉子瓊肌味亦香。何物鼠雛營口腹。敗荷深處詐跳梁。
竹根䶉兒
竹根閑逬走如龍。時見䶉兒態味濃。腰腹如何大於甕。渭濱千畒滿心胷。
松嶺胡孫
松巒蒼翠倚崚嶒。誰遣胡孫自快登。躁性已應天所賦。如何不博柳州憎。
牛背撼樹
陰陰樹樾翠如流。何許魁然一海牛。壯爾摩痒能撼樹。何曾弱力似蚍蜉。
羚角觸枝
渠家注簿號長鬚。別㨾山羚骨格殊。有角只堪爲世用。更無肥肉合庖廚。
화수주수도(花樹走獸圖) 10수
봄 화초 밑에서 조는 사향노루〔春芳眠麝〕
비 온 뒤의 봄풀이 막 푸른빛 가지런할 제 / 雨餘春草碧初齊
사향노루는 절로 한가해 편안히 조는구나 / 麝自安閑睡不迷
여기저기 그물 친 곳을 함부로 가지 말라 / 莫向網羅多處去
예부터 화를 부른 게 향기론 배꼽이었으니 / 由來買禍爲香臍
한낮 꽃 밑에서 조는 고양이〔午花睡猫〕
아득한 봄 하늘 흐리고 낮 그림자 더딜 제 / 漠漠春陰午景遲
화려한 모란꽃 밑에서 고양이가 조는구나 / 牧丹花下睡猫兒
누가 알랴 고양이 눈엔 신통한 법칙 있어 / 誰知眼孔神通法
천지간의 열두 시각을 능히 분변하는 걸 / 能辨乾坤十二時
원숭이가 나무에 걸쳐 있다〔寒猿掛樹〕
들쭉날쭉한 고목들은 구름 위로 솟았는데 / 老樹槎牙雲與齊
단원은 쓸데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 斷猿閑事費攀躋
어찌하여 외로운 협객이 상심하는 곳에서 / 如何峽客傷心處
달 지고 밤 깊을 제 또 괴로이 울어대는고 / 月落更深更苦啼
교활한 토끼가 숲 속에 숨다〔狡兎藏林〕
중산의 뛰어난 종자로는 준을 말하는데 / 中山奇種說良㕙
교활한 성질은 예부터 길들일 수 없었지 / 狡性由來不可馴
가는 곳마다 그물 설치한 걸 익히 알기에 / 到處置罦機已熟
응당 숲 속에 몸 숨길 줄을 잘 알고말고 / 也宜林下解藏身
밤나무 끝에 나는 족제비〔栗梢飛鼬〕
팔월이라 산성에 밤톨이 통통 살찌거든 / 八月山城栗子肥
족제비가 나는 것보다 빠르게 뛰오르네 / 鼬兒騰躍疾於飛
아침 셋 저녁 넷이 네게 무슨 상관이랴 / 朝三暮四渠何管
수없이 훔쳐 가서 따 갈 것 별로 없구나 / 無數偸來摘得稀
연방 속의 약은 쥐〔蓮房黠鼠〕
가을 이후의 연방은 흡사 봉방 같고요 / 蓮房秋後似蜂房
진귀한 연밥은 그 맛 또한 향기로운데 / 玉子瓊肌味亦香
그 어떤 쥐새끼가 제 구복을 채우려고 / 何物鼠雛營口腹
시든 연잎 깊은 곳에 간사히 날뛰느뇨 / 敗荷深處詐跳梁
대나무 뿌리를 먹는 쥐〔竹根䶉兒〕
대 뿌리는 달리는 용처럼 죽죽 뻗었는데 / 竹根閑迸走如龍
대 뿌리 맛나게 먹는 쥐를 때로 보겠네 / 時見䶉兒態味濃
허리 배는 어이해 항아리보다 크단 말가 / 腰腹如何大於甕
위천 천 묘의 대를 가슴속에 채웠구나 / 渭濱千畝滿心胷
송령의 원숭이〔松嶺胡孫〕
송만의 푸른 솔이 우뚝한 등성이에 섰는데 / 松巒蒼翠倚崚嶒
누가 호손을 보내서 경쾌히 오르게 했는고 / 誰遣胡孫自快登
조급한 성질은 이미 천성에 부응했거늘 / 躁性已應天所賦
어이해 유주의 증오는 없애질 못했던고 / 如何不博柳州憎
소의 등으로 나무를 건드리다〔牛背撼樹〕
나무 그늘 침침하고 푸른빛은 자르르한데 / 陰陰樹樾翠如流
어디서 왔는지 한 마리 해우는 크기도 해라 / 何許魁然一海牛
장하다 가려운 곳 비벼서 나무를 흔드는 게 / 壯爾摩痒能撼樹
어찌 개미 같은 약한 힘으로 해낼 수 있으랴 / 何曾弱力似蚍蜉
영양의 뿔로 나뭇가지를 들이받다〔羚角觸枝〕
너의 집의 주부를 장수라 호칭하는데 / 渠家主簿號長鬚
특별한 산령은 골격이 아주 다르구나 / 別樣山羚骨格殊
뿔이 있어 그것만 세상에 쓰일 뿐이요 / 有角只堪爲世用
사람이 먹기 좋은 살진 고기는 없구나 / 更無肥肉合庖廚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6
徐居正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
『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