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운동회와 이용대(李龍大)
아버지가 떠난 후 나는 매일 늦게까지 조선말 공부를 했다. 때때로 일본에 돌아가고 싶어 몰래 울었던 적도 있지만, 그럴 땐 항상 어머니의 “강해져라”는 말씀과 나와 할매를 위해 매일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일하고 있는 만수 삼촌의 모습을 보고 ‘나도 열심히 노력하자’ 그렇게 마음을 북돋웠다. 그렇게 3학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운동회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들 가족과 함께 즐겁게 점심을 먹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바빠서 학교에 오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 할매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고 있던 아주머니가,
“왜 혼자 있어? 어머니는?”
하고 물으셨다.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나는,
“일본에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물론 조선말로 했다.
“그렇구나, 혼자 있구나, 가엽게도. 이쪽으로 오렴. 함께 먹자꾸나.”
아주머니는 다정하게 손짓을 해 주었다. 나는 도시락과 물통을 안고 아주머니의 가족들이 앉아있는 돗자리 끝에 살짝 앉았다.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구석에 앉지 말고 좀 더 안으로 들어와 앉으렴.”
그 아주머니의 다정한 한 마디가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내 서글픔의 둑을 터지게 하고 말았다. 일본에 있는 엄마가 그리웠던 마음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눈물이 쏟아져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참으며 훌쩍거리지 않으려 했지만 눈물이 계속 나왔다.
모처럼 친절한 말을 건네 준 아주머니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땅만 쳐다보고 젓가락질을 하는 것처럼 있었지만, 흘러나오는 눈물이 도시락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할매가 애써 만들어 주신 소중한 도시락이다. 이 무렵에는 정말 구하기 어려웠던 계란으로 내가 몹시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만들어 주셨다. 그 도시락에 눈물이 번져갔다.
같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몸집이 컸던 나는 빠른 발에 자신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날 50미터 달리기에서 1등으로 들어왔다. 점심을 같이 먹었던 아주머니 가족도 손뼉을 치며 기뻐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내가 조국에 친근해져 가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1등 상품은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였다. 그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할매, 이것 봐요, 1등 상품이에요”
하고 자랑스럽게 할매에게 보여 주었다. 할매는 더듬더듬 손으로 만지며 그것을 확인하고 매우 기뻐해 주셨다.
할매가 어째서 ‘더듬더듬’ 확인하셨는지 말하자면 할머니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백내장이다. 이 무렵엔 아직은 그다지 상태가 나쁘지 않았는데, 나중에 심하게 진행되었을 때는 돈만 있으면 안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해드렸으면 좋았을 것 같아 몹시 안타까웠다.
● 이용대(李龍大)
학교 행사 가운데 <식목일>이라는 것이 있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당시 한국(1948년 이후, ‘한국’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은 난방과 취사를 위해 대량으로 땔감을 썼다. 그 때문에 민둥산이 되어버린 산에 새로 나무를 심어 숲을 되찾으려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이 날이 오면 모두 산에 올라가 반드시 묘목 한 그루를 심어야했다. 이것도 ‘해방 후’ 국토를 가꾸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온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못해 전혀 즐겁지 않았고 겉돌기만 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 해 말을 거의 할 수 있게 된 4학년 때는 반에 몇 명 쯤 얘기 상대도 생겨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산에 올랐다.
또 한 가지, 소학생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었다. 잔디 씨 채취다. 조선반도 특산품인 고려잔디는 지금도 골프장 등에서 쓰이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인데, 그 씨앗을 모은다고 했다. ‘국민의 의무’라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전후 외화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수출품으로 쓰였던 것 같다.
다 같이 잔디가 자란 곳까지 가서 조그만 씨앗을 가득 주워 모았다. 나도 다른 애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잔디 씨를 모으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 빨리 잔디 씨 내 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거기엔 이용대와 동급생 몇 명이 서있었다. 용대는 입학 첫 날 나를 <반쪽발이>라고 심하게 놀려댄 소년이다.
“절반이면 돼, 너희들이 갖고 있는 잔디 씨, 이리 내 놔.”
“용대 너는 아까부터 야구 방망이만 붙들고 있었잖아. 이러면 치사하지.”
동급생 하나가 잔디 씨가 들어있는 봉투를 뒤로 감추었다.
“됐으니까, 내 꺼 내 놓으라구.”
용대는 커다란 주먹을 높이 치켜들며 동급생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알았어, 쪼금만 이야.”
모두들 투덜거리며 용대의 주머니에 지금까지 모은 잔디 씨앗을 넣었다. 용대는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씨앗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후 별안간 눈앞에 있던 동급생의 얼굴을 때렸다.
“아야! 왜 그러는 거야!”
“잔디 씨를 빨리 내놓지 않은 벌이다….”
용대는 이렇게 말하고 씨앗이 든 주머니는 흔들며 이번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재수없는 녀석이 온다…)
나는 슬그머니 아래를 쳐다보고 용대를 못 본 척하며 씨앗을 계속 주웠다.
“야, 반쪽발이~”
뻔뻔스러운 목소리로 용대가 나를 불렀다. 입학해서부터 4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용대는 나를 계속 ‘반쪽발이’라 불렀다.
“안 들리냐, 반쪽발이!”
나는 할 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난 반쪽발이가 아니야!”
부들부들 떨면서 용대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곧바로 용대의 작은 눈이 쭉 치켜 올라가며 고함소리와 함께 그 녀석의 다리가 나를 걷어찼다.
나는 그 충격으로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꼴 좀 봐라, 저 반쪽발이….”
용대는 언덕 위에서 나를 한참 째려본 후 손에 들고 있던 씨앗 봉투를 흔들면서 그 자리를 떴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용대의 뒷모습을 그대로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10화로 이동
첫댓글 생생한 해방후 학교에서의 생활 모습입니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 되지않는 내용일 수도 있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번역문의 흐름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 미영씨의 수고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