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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제님의 "주류성 위치~에서 부분 발췌하여 부연한 글이다.
1,〈사료 ⑤〉 거듭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즉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간솔 귀실복신이 있어 스스로 민중에서 나와 거짓으로 그 괴수가 되어서는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을 불러 모아 임존에 보를 쌓고 웅거하니 벌떼처럼 진을 치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마침내 산곡에 가득하였다. 이름을 빌리고 품위를 훔쳐 단마로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깨뜨리고 고을을 공파하여 점차 중부로 들어갔다.(仍圖反逆 卽有僞僧道琛 僞杆率 鬼室福信 出自閭巷 僞其魁首 招集狂狡 保據任存 峰屯謂起 彌山滿谷 假名盜位 單軍 &579;城坡邑 漸入中部)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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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흥군이 중부로 들어갔다" 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임존성에서 부안 우금산성으로~~~?
초기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임존성을 사비성의 외곽 지역으로 보면, 홍주목 산악지역은 중부지역으로 볼 수 있다.
몰려드는 지원군 유민 때문에 부흥군은 홍주목의 산악지역으로 깊숙히 들어간 것을 중부로 들어갔다 기록한 것이다.
2, 주류성이 함락된 것은 9월 8일인데 2차 임존성 전투는 사서에는 10월 21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1월 4일 김유신은 퇴각하는데, 다른 자료는 3순을 공격했다고도 한다. 왜 주류성 이후의 전투기록이 미비한지는 알 수 없으나 주로 신라군과의 전투였고 소규모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존성 공걱하기 까지 한달여 공백이 생겨 무수한 억측만 남기지만 어떻든 사서의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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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억측만 남긴 한달여 공백~, 윗부분 2차 임존성 전투라고 왜 기록하였을까?
역사서에 모든것을 기록할 수 없다. 기록상 2차 임존성 전투가 기록이 존재한다면 1차 전투도 있다는 의미....
한달여 공백기는 홍주목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주변의 부흥군이 머무른 장곡, 학산성 등을 평정하는데 소모된 시간 아닐까..
부흥군 초기 임존산 대책 소책 공격을 1차라 할 지라도.....
3, 임존성에서 백제 시대로 추정되는 유물 수습이 되지 않고 있다. 확실한 것은 통일신리시대의 것들이다. 물론 백제 말기이기 때문에 백제 유물이 나올 수는 있으나 전형적인 백제 유물의 수습은 없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주류성이니 피성이니 고사비성이니 하는 성들의 지명은 당시 급조된 성들이지 기존의 행정 치소의 성 이름은 아니라는 뜻이다. 홍성 석성산성(장곡산성)의 지표조사보고서는 분명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사시랑이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백제 시대의 유물수습은 그것이 주류성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주류성이 될 수 없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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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은 몰라도 주류성만큼은 위 주장에 일치한다. 임존성으로 밀려오는 백제유민들로 인하여 부흥군은 유민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곳은 임존성과도 멀지않은 산악지역으로 홍주목과 공주목의 경계 지역, 지금의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와 무량사 주변으로 보인다.
4, 당군의 수비지역은 웅진 사비성 이었고 부흥군의 주 공격목표도 웅진 사비성 이었다. 그리고 일본군도 머나먼 뱃길로 다시 태안 앞바다를 거쳐 아산만으로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그 논리는 연기나 홍성을 주류성으로 주장하면서 나온 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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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뱃길이라도 확실한 목적이 있다면 가야한다.
부흥군은 피성으로 왕성을 옮긴것은 불어나는 유민들로 인하여 산악지역의 척박한 곳에 장기간 머무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일본의 지원군이 머무를 공간은 결코 주류성이 아니다. 일본 지원군이 머무르고자 한 곳은 부흥군이 왕성으로 삼았던 피성이 아닐까..?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당군의 배들이 정박되어 있고, 당군이 타고 돌아갈 배들을 쳐부수어 당나라와 차단하고, 당군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왜의 지원병과 함께 장기전을 하려는 생각으로 백강해전이 발생한 것이다.
부흥군이 백제 전역을 회복한 위험한 시기에 당군이 타고 돌아갈 배를 금강하구, 동진강에 방치 하였을까~
5, 둘째. 김정호는 홍성 지역 어느 곳에 주류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홍주 주류성설을 주장하였고, 그곳을 지심주로 보았다. 주류성, 지심주는 같은 위치로 보고 ‘홍성에 있다’고 김정호는 추정만 했지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심주는 서방성 자리에 있었다. 서방성은 도선성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성을 주류성이라고 비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정호의 홍성 주류성설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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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는 주류성을 너무나 확실하게 인지 하였다. "주류성은 홍주목이다" 라는 표현 만큼 더 정확한 설명이 또 있을까?
부흥운동은 금강서쪽 홍주목 전역에서 이루어졌고 홍주목 중심의 산악지역에 부흥군 지도부가 위치하여 김정호는 홍주목이 주류성이라 표기한 것이다. 대동지에 홍주가 아닌 홍주목이라 쓰여 있지 않은가.....
6, 사료 ⑬] “신라의 날랜 기병들이 당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깨트리니 주류성이 담력을 상실하여 드디어 곧 항복하였다.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벌을 하는데 임존 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가림성은 험하고 단단하여 급히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하여 결손이 있을 것이고, 굳게 지키면 시일을 많이 허비하게 될 것이니 먼저 주류성을 공격함만 같지 못하다. 주류는 적의 소굴로 흉포한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악의 근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그 근원을 뽑아야 된다. 만약 주류를 평정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성들은 스스로 항복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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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이 견고한 석성이 아닌 산악지형의 목책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이다. 가림성 보다 허술하다는 주류성의 또다른 설명이다. 3만이 넘게 몰려든 부흥군은 단지 백제의 농부들이었다. 그들을 훈련하고 머무를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여 부흥군 지도층은 넓고 험준한 지역으로 이동한다. 주류성은 산악지형을 이용한 목책으로 급조된 성으로 견고하지 않았다.
그 넓고 험준한 지역을 장곡산성, 위금산성에 있는지......
7, 홍성 주류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재 답사를 하였다. 산 정상에 성을 쌓은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 서남쪽에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풀이된다. 석성(장곡)산성은 광천 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 데는 요충지 역할 하지만 서천지역에서 북상하는 적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적은 부여에서 청양을 거쳐 임존성에 온 것이 아니라 1,2차 모두 서천-보령-화성-광시 쪽으로 온 것으로 추측된다. 분명한 것은 광시 쪽에서 와 마사리, 신대리 쪽에서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부흥군은 북상하여 임존성을 공격하러 오는 적을 막기 위한 유격부대를 이 태봉산성에 주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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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은 공주-부여-금강을 건너-구룡-내산을 지나 외산으로 진군하고(후방의 가림성을 먼저 공격하자는 말이 나옴),
또한 공주-정산-청양-외산으로 진군하여 양방향으로 홍주목 주류성을 포위 진압하고 주변의 장곡산성 학산성 천태성을 진압한 후 임존성으로 향한것은 아닐까....
8, 넷째. 문헌의 기록을 보면 복신은 굴에 있다가 잡혀죽었다. 최고의 병권을 쥐고 있는 자가 굴속에 있다 잡혔다. 주류성의 상황은 건물조차 제대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야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왕궁의 건물터 운운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든 주류성에는 굴이 있었으므로 굴을 찾아내는 것이 주류성을 비정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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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신굴을 설명한 내용이 어디에 있을까? 위금성의 복신굴?처럼 암벽에 만들어진 굴만이 복신굴 일까?
천연동굴일까 인공굴일까? 인공굴이라면 바위에 팠을까 토굴을 팠을까? 전시에 갑자기 판 굴이라면아마도 토굴일 가능성이 더 높고, 천년의 긴세월에 남아있을 토굴이 있을까...?
9, 여섯째: 주류성은 9월 8일에 함락되고 임존성 공격은 10월 21일에 시작되었다. 근 한 달이 넘는 동안 나당군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남방기정 북벌회군 이라고만 표현되었다. 남쪽에 있는 저항하는 여러 지역을 평정하고 북쪽을 정벌하고 돌아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임존성과는 40여리에 불과하고 중간에는 아무런 방어시설이 없다.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던 나당군이 40여 일 간을 학성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에서 묶여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홍성 주류성설의 최대 취약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임존성을 공략하러 오는데 40여 일을 보내었다는 것은 바로 홍성 석성산성이 주류성이 될 수 없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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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목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진압군은 석성산성, 학성산성, 태봉산성, 천태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한달여 기간으로 보면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가~
10, 맺음말, 주류성의 위치 논쟁에 있어 가장 중심적 역사자료는 분명 예산(대흥) 임존성에 관한자료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주류성에 관한 기사는 자세한듯하나 부실하다. 뚜렷한 잣대를 들이 델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 그리하여 주류성 논쟁은 80년 이상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는 아직 주류성 위치문제에 대하여는 홍성 주류성에 대하여만 중점 연구하였다. 임존성연구를 마치면서 나당군의 임존성 공격지점은 광시면 신대리 마사리 쪽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제까지 지역향토사학계에서 주류성으로 주장하던 홍성 장곡산성은 사시랑현 치소 이상은 아니었고 산성리 산성을 풍달군의 치소로 비정하였다.
이 두 성이 이곳에 존재한 것은 광천만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기위한 거점성이었음이 학실하다.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답이 나온다. 삽교천 유역을 막기 위해서는 홍성 금마에 서벙성을 쌓았고 무한천에는 오산성과 신속리 토성과 황계리와 죽천리에 책을 쌓았다. 이는 백제 서북지역을 방어 하기위한 산성이었음이 명백하다. 하지만 홍성군 장곡면 천태산성과 태봉산성은 미스터리였다. 필자는 최근에야 풍달군의 치소와 사시랑현의 치소에 대한 의문점을 풀었고 서천지역에서 북상하는 나당군을 막기 위한 임존성 외곽 방어선이 천태산성과 태봉산성임을 밝혔다. 이로 본다면 홍성 주류성설은 재고되어야 하지만 발굴조사 덕분에 장곡산성이 사시랑현이 확실함을 알았고 그리하여 풍달군의 치소를 비정할 수 있었다. 박성흥 선생의 홍성 주류성설은 이제 폐기 될 수 밖에 없지만 향토사연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결국 주류성은 임존성 서남쪽 서천군이나 그 이남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주류성의 위치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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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산성은 분명 주류성이 아닌 부흥군의 외곽산성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멀지않은 산악지역 부흥군의 비밀본부를 복신의 죽음, 지도층의 분열로 항복한 부흥군으로부터 산악지역 부흥군의 실체, 위치를 알아내고 나당군이 출병한 것이고, 나당군의 입장에서 "반란의 무리들이 모여있는 지역"을 한자로 표기한 주류성의 한자, 周(두루 주, 둘레/산악지형 공간) 留(머무를 류) 城( 성 성-지역)에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