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편 직위를 이용하여 한몫 잡으려는 역관도 있었다. 서울에서 온 역관들에게 직접 일본어를 배우고 왜관 관련 일에 종사하는 부산 사람을 소통사(小通事)라고 불렀다. 이들은 왜관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일본인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때로는 들키면 큰 벌을 받는 밀무역 브로커도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이상의 사람들이 왜관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이들 외에 일본인들에게 식자재를 파는 아침 시장[朝市]의 상인들도 왜관을 부지런히 찾았다. 또한 왜관에 있는 일본인과 함께 글을 짓고 환담을 즐기는 유생들도 왜관에 보였고, 이국적인 왜관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구경꾼도 있었다. 다양한 목적으로 왜관을 찾아오는 사람, 그들의 사연과 생활을 살펴본다.
백성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참된 것을 알지 못하고, 이런 것을 귀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것은 동래[부산]에 공부를 많이 하면서 백성들을 교화하고 이끌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생 여러분, 고을 좌수(座首)나 하고, 고을의 군인·경찰을 맡아서 백성들에게 행세하면 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러분들이 해야 하는 일은 다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러분들이 이런 생활에 안주하려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과거에도 응시하고 또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이 얼마나 영화롭고 기쁜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학문을 추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준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과거 공부라는 것이 시험 자체를 준비하는 것보다 세상의 이치와 의리를 배울 수 있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유생 여러분들이 독서에 매진하지 않으니까 오죽하면 밀양이나 김해 같은 곳에서 동래를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이제부터라도 집안에 자제가 있으면 공부를 시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권이진 부사는 한마디로 ‘제발 공부 좀 하고, 백성들을 잘 이끌라’는 말을 남기고 동래를 떠났다.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부산 사람들이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무역에 열심히 종사하는데, 글 꽤나 써야 하는 양반들이 높은 벼슬의 꿈은 가지지 않고 과거 응시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동래의 무임직(武任職)이나 향반직(鄕班職)에 전전하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비단 이러한 시선과 인식은 권이진만의 것은 아니었다. 동래 부사로 임명되어 국왕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동래 부사를 선정할 때에는 동래부의 지역 사정을 상기하면서 이에 걸맞은 관리를 물색하려는 노력을 많이 보였다. 또한 조선 전기에 동래는 동래현(東萊縣)이었기 때문에 종5품에 해당하는 관리를 파견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고 왜관까지 있어 위상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동래는 동래부로 승격하고, 부사는 정3품 당상관으로 정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동래는 아침저녁으로 일본인을 접촉하는 곳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부사를 가려서 보내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품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재주와 명망, 사리가 있는 사람으로 각별히 가려서 보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등은 동래 부사가 바뀔 때마다 거의 언급되는 말이었다. 일본인을 단속하는 것도 동래 부사의 큰 임무 중 하나였지만, 우선 일본인과 친밀하게 지내는 부산 사람들을 단속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부산에 일본인 마을이 조성된 때는 1407년 이후이므로 왜관 주변에 사는 주민이나 부산 사람들에게 일본인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시장에서 상인과 손님으로 만나는 사이였고, 일이 있으면 일본인들이 부산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찾아왔다가 놀다 가기도 하였다. 부산 사람들과 일본인의 관계가 점차 가까워지자 조선 조정도, 동래 부사도 우려가 대단하였다. 조정에서는 “왜관의 일본인이 우리 백성들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통으로 여긴다. 심지어 그 집에서 잘 때도 있다고 한다. 이러니 이곳[동래]의 풍습은 좋지 못하여 일본인들이 자기 집으로 오면 좋다고 한다. 새로 임명되는 부사는 도착하는 대로 감시를 철저히 해서 발각되기만 하면 바로 사형에 처해도 좋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리고 동래 부사가 내려가서 이런 습성을 깨끗하게 고치도록 하였다. 1696년(숙종 22) 겨울에 부임해 온 이세재(李世載) 동래 부사는 왜관 북쪽에 있던 포촌(浦村)을 관찰하니 부산 사람들과 일본인이 서로 왕래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아예 마을을 불태워 버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강경책을 펴는데도 마을이 없어지기는커녕 다시 살아나고 다시 살아나서 후임 동래 부사들을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부산 사람이든, 일본인이든 동래 부사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왕래하였다가 처벌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였지만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동래 부사도 처벌을 모면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면되거나 처벌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동래 부사는 다른 지역의 수령보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바뀌는 비율이 높았다. 동래에서 임기를 다할 때까지 근무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타향살이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동래부를 어떤 고을로 만들까? 동래 부사로 온 관리들은 이러한 고민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박재흥은 일반 백성이 밀무역을 적발해서 관아에 알리면 포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재흥 자신은 훈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밀무역을 발각하는 것은 당연한 업무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자신이 고발하지 않고 자신의 조카가 고발하는 것처럼 꾸며 품계를 올려 받는 상을 받게 하였다. 이 같은 농간이 발각되어 당시 동래 부사는 파직되고 받은 품계는 회수되었으며, 박재흥은 곤장 형을 받았다. 좌의정은 훈도는 왜관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살피는 자리인데, 이런 농간을 부린 것은 곤장에 그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박재흥은 재차 잡혀 와서 문초를 받았다. 좌의정의 말처럼 훈도가 왜관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막중한 자리인데 농간이나 부리고 있으니 서울 조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박재흥은 왜관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조정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기회를 틈타 입지를 다지려고 하였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역관들이 맡고 있는 일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18세기 대마도에서 ‘조선통(朝鮮通)’이라고 불린 만한 사람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대마도에서 조선 관련 업무를 담당하다가 1702년(숙종 28) 사절단의 일원으로 왜관에 왔고, 그 후로도 몇 차례 왜관에서 근무한 바 있다. 그가 본 조선의 역관은 실로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었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지은 『교린제성(交隣提醒)』에는 조선 측 역관들에게 선물을 후하게 주어 적극적으로 대마도를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회유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는 일본인의 포악성을 두려워하여 조선 측 역관들이 고분고분하였는데, 이제는 전쟁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기 때문에 대마도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조선 측 역관을 만들려면 반드시 후한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이토록 역관에 대한 처우를 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조선 측 역관은 서울에서 파견되어 오는 훈도(訓導)·별차(別差)라는 인물들이었다. 모두 역과(譯科)에 합격한 이들로, 대부분 대대로 역관을 역임한 중인(中人) 명문가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훈별(訓別)로 줄여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그만큼 왜관 업무들을 함께 수행해 나가고 하급 역관인 소통사들을 지휘·관리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왜관에서 큰 공사가 있을 때면 공사 감독을 위해 지위가 높은 역관이 서울에서 내려오는데 감동 역관(監董譯官)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대마도에서 파견하는 외교 사절인 차왜(差倭)가 오면 조선에서는 일본 사절 응접 관료로 경접위관(京接慰官) 및 향접위관(鄕接慰官)을 파견하는데, 접위관을 따라 차비 역관(差備譯官)과 출사 역관(出使譯官)이 또한 서울 사역원에서 차출되었다. 특히 대일 관계에서 중요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훈도, 별차가 근무하고 있더라도 일의 경험이 많고 정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고위 역관을 별도로 파견하였다. 이를 별견 당상관(別遣堂上官)이라고 불렀다. 대부분 왜관에서 훈도를 역임한 베테랑 역관들이었다. 이렇게 서울에서 파견되는 오는 역관은 다양한 명칭만큼이나 여러 일을 수행하였다. 통역은 기본이고, 통역을 하다 보니 교섭 업무도 하였다. 이들 업무와 아울러 중요한 업무가 무역과 관련된 일이었다. 조선 후기 역관 중에는 갑부로 이름난 이들이 많았다. 숙종 때 장옥정(張玉貞)[희빈 장씨]이 출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든든한 재정 지원 및 고위 정치인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던 역관 당숙 장현(張炫)이 있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다. 역관은 중국과의 무역,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관에 근무하러 오는 역관도 부산 생활을 한몫 잡으려는 기회로 삼았다. 왜관에 근무하는 역관이 무역에 가담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춰져 있었다. 일본과의 공무역 물품을 살피고, 무역 교섭 업무에 실무진으로 참여하였다. 무엇보다 양국 무역이 진행되는 왜관 안의 개시 대청(開市大廳)에 앉아서 상인의 불법적인 거래를 감찰하고, 일본 측 무역 담당 관료 및 상인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무역품의 가격, 조달 상황, 인기 품목 등 조일 무역의 전반적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훈별은 일본인을 아침저녁으로 상대하므로 긴요한 직책이고 또 이익이 많은 자리로 서울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본어를 통역하는 왜학 역관(倭學譯官)의 치부는 여러 문헌에서 발견되는데, 변승업(卞承業)의 경우는 “외관(外棺)에 옻칠하는 것은 임금의 상례(喪禮)에만 쓰도록 되어 있고 그 나머지는 비록 왕자, 왕녀같이 존귀한 사람이라도 다만 본색의 곽(槨)을 쓰게 한 것은 나라의 법도이다. 그런데 1696년 사이에 모 성을 가진 왜학 역관은 아내의 상을 당하여 외곽에 옻칠하기를 국상의 예와 같게 하니 재상과 대간(臺諫)이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 역관의 집 안에 수십 만금을 쌓아 두고 사회 곳곳, 여러 사람들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잘못된 행동을 규탄해서 바로잡는 이가 없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막대한 부를 모으고, 또 부를 기반으로 인맥을 쌓아 필요할 때 작동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앞서 훈도를 하다가 벌을 받은 박재흥은 왜관 근무를 마치고 난 후에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전 가족을 데리고 부산과 가까운 밀양으로 이사를 왔다. 동래에도 집을 지어 자신의 첩에게 주고 부산과 밀양을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맡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여 유배를 보내려 하자 밀양으로 보내 달라는 청까지 하였다. 왜일까? 역관들은 부산, 부산 인근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였을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거주지를 옮기고 왜관과 거래를 계속해 나가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역관이 왜관 주변에서 오래 머무는 구류(久留) 문제가 종종 제기되었다. 『경제야언(經濟野言)』에는 “왜학 역관들은 나라의 일이 아닌데 동래부에 와서 머무는 자가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서 서로 교류하며 물화를 내어 행상하는 터전으로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 온 역관들은 통역을 하면서 조선과 일본 사이의 각종 업무를 교섭하는 동시에 무역 상인으로 성장하면서 나라의 거상(巨商)이 되어 나갔다. 부자가 되는 중요한 기회는 왜관 근무에 있었으니 부산 생활은 고되면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비석에는 이택수 부사의 왜관 공사와 관련한 치적을 적었는데, 통사들은 이때 왜관을 화관(和館)이라고 적었다. 조선 측 기록에서는 왜관을 보통 동래관·내관·부산관·부관 등으로 적었고, 화관이라는 표현은 거의 적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조선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고, 일본 측에서 주로 쓰는 화관을 썼을까? 통사, 즉 소통사들의 의식 세계와 관련이 있는지 않을까? 소통사는 서울에서 오는 역관과는 출신지도, 일본어 습득 과정도 모두 달랐다. 서울에서 파견되어 오는 역관은 가학(家學)을 비롯하여 사역원 체계 내에서 교육, 역과 합격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집안 역시 중인 이상의 역관 명문가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을 소통사에 대비되는 대통사(大通事)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소통사는 부산 등의 지역 출신으로 왜관 주변에서 일본어를 자연히 습득할 기회를 가졌고, 훈도·별차가 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신분이었지만, 왜관 일본인과 친분을 맺을 수 있고 통신사(通信使)나 문위행(問慰行)의 구성원으로 임명되어 해외여행도 할 수 있었다. 소통사는 왜관 업무와 관련되어 동래부에 30명 내외가 있었다. 왜관 정문과 각 문마다 번을 서서 왜관을 출입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단속하며 잡상인 단속, 왜관에서 사용될 물자 관리와 지급, 각종 연향 준비 등 다양한 실무를 담당하였다. 서울에서 온 역관이 왜관 주변에 상주하는 인원이 훈도와 별차 2명인 데에 비해 소통사는 수도 많고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 장기간 일본인과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마도의 역사 기록인 『천룡원공실록(天龍院公實錄)』에 흥미를 끄는 기사가 있다. “[소통사] 우리들은 조선인이지만 오로지 대마도를 위해 일합니다”라고. 『정조실록(正祖實錄)』에도 “동래의 초량(草梁)에 있는 소통사의 무리가 태반은 왜노(倭奴)들의 심복이 되었으므로, 누설되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해지지 않는 말이 없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로 소통사와 일본인 관계는 밀접하였다. 대마도에서는 조일 관계를 유지하고, 각 사안들을 교섭하는 데 훈도와 별차는 물론 소통사도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마도에서 선물, 뇌물을 지급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더욱이 소통사에게는 통사배령은(通事拝領銀)을 지급하였는데, 이 은으로 토지를 구입하도록 하였다. 소통사들은 이 토지를 의전(義田)이라 불렀다. 대마도에서 매년 은을 지급하는 것이 어려워 토지를 구입하게 하여 소통사에 대한 원조가 지속되도록 한 방안이었다. 그러므로 소통사도 대마도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면서 무역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특히 일본어를 잘 하므로 중간 브로커로 밀무역에 가담하기도 하고, 무역 상인이 되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소통사가 가담한 무역 기록을 통해 그들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1664년 8월 유황 4만 3,364근, 장검(長劍) 50자루, 중검(中劍) 100자루, 조총(鳥銃) 7자루를 싣고 온 일본인이 거제도 지세포에 정박하여 소통사 김검충(金檢忠)을 찾았다. 일본인은 김검충을 직접 만나 거래를 약속하고 싣고 온 물품을 넘겨주었다. 이 일은 곧 발각되어 김검충은 구속되고, 유황은 서울의 관청에 값을 받고 팔아넘기고, 장검·중검·조총은 훈도가 따로 구입하여 진상하였다. 당시 국가에서는 필요한 군수품이 있으면 대부분의 군수품이 수출·수입 금지 품목이므로 공식적인 무역 경로 대신 역관들에게 구입을 의뢰하였다. 이 사건도 소통사를 통해 군수품을 구입한 사건이었다. 김검충은 곧 풀려나고 또 다른 군수품 거래에 가담하였다. 국가를 상대하지 않고 상인과 상인을 연결하는 무역 브로커로 활약하다 발각된 예도 많았다. 서울에 사는 정삼충(鄭三忠)이 인삼 1근을 가지고 옥포 왜학 집무소에 내려와서 소통사 유명재(兪明才)에게 주었고, 이것은 소통사 권순택(權順澤)을 거쳐 일본인 안우위문(安右衛門)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하지만 권순택과 일본인이 왜관 북쪽의 탄막(炭幕)에서 몰래 거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서울 잠상~옥포 왜학 역관~소통사~왜관 일본인으로 연결되는 밀무역 조직이었다. 1698년(숙종 24) 5월에는 소통사 김계최(金繼崔), 동래 읍내민 한귀석(韓貴碩)·구중경(仇重卿)·박재장(朴再章) 등이 왜관 첨관옥수(僉官屋守)·백수여병위(白水與兵衛)와 공모하여 밀거래를 하려던 일이 발각되었다. 백수여병위는 인삼 밀거래를 위해 그 자금으로 은을 미리 지급하려다 현장에서 발각되었다. 이 거래를 직접 주선하고 나선 이는 또 다른 소통사 김귀철(金貴哲)이었다. 김귀철은 거래가 성사되면 거래 알선비로 백미 4가마니를 받는 조건이었다. 이 일로 김계최, 한귀석, 구중경, 박재장, 백수여병위는 모두 사형에 처해지는 엄형을 받았다. 발각되면 목숨이 위태로운 밀무역이었지만 많은 이익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근절되지 않았다. 또 소통사는 무역 알선자로, 무역 상인으로 밀거래에 적극 가담하면서 왜관과 밀접한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근대 개항 전후에 활동한 최재수(崔在守)는 소통사가 얼마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인물이다. 대개의 무역 자금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대부하였는데, 최재수의 경우는 반대였다. 최재수는 1873년(고종 10) 왜관 일본 상인 보가(保家) 등 21명에게 4만 2,000여 냥이라는 자금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개항이 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미상환 자금이 발생하였다. 최재수는 상환이 늦어지자 1890년(고종 27) 동래감리서에 탄원서를 올리고 미수금 1만 4,750여 냥을 받고자 하였다. 동래 감리는 즉시 일본 영사에게 공문을 발송하여 상환을 재촉하였다. 이 일은 개항 전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맺은 경제적 관계의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또한 소통사라는 직임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것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왜관과 가까운 곳에 사는 조선인들이 굳이 지게에 물건을 지고 왜관까지 가기를 싫어하였다. 약 1.96㎞[5리] 정도 떨어진 왜관에 가지 않아도 일본인이 자신들이 사는 마을까지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안 길가에서 아침 시장이 열렸다. 또 이를 계기로 일본인은 여염집에 들어가 놀다 오기도 하면서 갑갑한 왜관 생활도 벗어날 수 있었다. 1665년(현종 6)에는 조선인 마을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서로 섞여 있는 것을 금지하고, 아침 시장을 옮겨 왜관 수문 밖에서 열도록 하였다. 왜관 수문 밖에서 아침 시장을 개설한 것은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간 후에도 동일하였다. 1678년(숙종 4) 초량 왜관에서 지켜야 하는 새로운 규칙을 정한 무오 절목(戊午節目)에도 아침 시장에 대한 내용이 있다. “몰래 민가에 나간 일본인이 매번 생선과 채소를 매매한다고 둘러대는 것은 진실로 몹시 나쁜 일이다. 그러나 영구히 그 길을 막는다면 일본인들이 살아갈 길 또한 몹시 절박하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생선이나 채소·과일·쌀과 같이 날마다 쓰고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은 날마다 아침 전에 왜관 문 밖에서 팔게 하면 일본인들도 역시 수문 밖에서 물건을 사 가지고 즉시 들어갈 것이요, 절대로 전과 같이 민가에 드나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아침 시장이 서는 공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였다. 일본 측에서도 아침 시장은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왜관 일본인의 총책임자인 관수(館守)도 조선 측에 아침 시장에 대해 요구한 것이 있었다. 조선인 마을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매일 아침 시장에는 생선, 채소, 그 밖의 물건들을 항상 끊임없이 들여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그래서 아침 시장은 매일 아침에 열리다가 거래가 활발해지자 장이 서는 시간이 아침·오전에서 하루 종일로 연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아침 시장의 공간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시장에 나온 상인들은 일본인과 거래를 하다가, 왜관 안에서 일본인이 잘 나오지 않는 날에는 마음대로 왜관 안에 들어가 일본인 방문을 두드리면서 장사하던 일이 종종 있었다. 일본인은 자기 방에 앉아서 상인들이 가져오는 물품을 사들이면 되었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였다. 하지만 이는 왜관 안이 문란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1688년(숙종 14)에 금지시켰다. 아침 시장이 확대되고 이와 아울러 조선인과 일본인이 점차 밀착해지자 적극 개혁하려는 동래 부사가 있었는데, 1709년(숙종 35)에 설문(設門)을 세운 권이진이었다. 권이진은 조정에 동래부의 상황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아침저녁으로 서로 섞여 지내기 때문에 크게는 우리나라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작게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교간(交奸)하고 싸우기 때문에 그 욕됨이 조정에 알려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침 시장은 날마다 열리고 하루 종일 교역하니 그 난잡함이 진실로 조정에서 근심하던 대로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임하여 어류(魚類), 두세 말의 미곡에 대해 잠시 동안만 교역하도록 하고 그 외에는 모두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것만으로는 이익이 없다고 아예 조시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석이 넘는 쌀과 여러 필의 포목을 교역할 때에는 수세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간사한 백성들은 조시가 전처럼 운영될 수 있도록 서로 선동하고 헛소문을 퍼뜨려 일본인까지 꾀어 공갈을 하도록 합니다”라고 하였다. 게다가 권이진의 눈에 아침 시장에서의 거래 모습은 가관이었다. “아침 시장에 남녀 상인이 같이 가면, 남자가 가지고 간 물건은 아무리 좋아도 팔리지 않고 여자가 가지고 간 것은 아무리 나빠도 반드시 팔립니다. 그러므로 지금 조시에 가는 사람은 모두 여자이고 남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권이진은 “이것은 어채(魚採)를 파는 것이 아니라 처와 딸을 파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침 시장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 외에 또 다른 관계가 만들어지는 장소로 확대되고 있었다. 1738년(영조 14) 제정된 변문 절목(邊門節目)에는 아침 시장을 통제하려는 조항이 있다. “아침 시장에서 생선이나 채소를 매매하는 것은 바닷가 사는 놈과 상놈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혹 부당하게 생선이나 채소를 판매하는 일이 있는데 조시에 같이 섞여 들어가는 행동거지가 수상한 자는 잡아서 관아로 보내도록 한다”, “아침 시장에서 매매할 때 이미 군관들이 내다 판 것은 그 수효를 알기 어려우니 수문 군관은 매일 돌면서 문서로 보고한다”, “아침 시장은 수문 밖에 여는 것이 전례이다. 한 명이라도 문 안으로 들어간 자는 변경을 난입한 죄로 처리하는 것을 정식으로 하고 이를 알면서도 알리지 않은 수문장(守門將)은 일체 죄로 다스린다”라고 규정하였다. 아침 시장을 핑계로 밀거래를 하거나, 왜관 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여전히 벌어져 이를 차단하고자 다시 명문화한 것이다. 1746년(영조 22)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는 아침 시장이 열릴 때 각 영읍(營邑)과 사상(私商)이 선박으로 쌀을 싣고 와서 거래하는 것이 발각되면 장(杖) 100대에 도(徒) 3년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법전에 왜관 아침 시장이 등장할 정도로 18세기 중엽은 40년 전 권이진 부사가 노력한 아침 시장에 대한 통제는 수포로 돌아갔고, 쌀이 대량으로 거래되는 시장으로 변모할 만큼 성장한 것은 아닐까? 아침 시장에는 30여 명의 상인이 왔는데, 애초에는 부산진 주변에 사는 상인이 많았다. 그러나 거래가 활발해지자 상인 역시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왔다. 왜관에 왔던 조선어 역관인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가 18세기 말에 쓴 『초량 화집(草梁話集)』에는 “아침 시장에 어채를 가지고 오는 곳은 부산[부산진이다]. 두모포[古館], 대치(大峙)[대티 고개 주변], 사도(沙道), 당동(堂洞)[당리인 듯하다]”이라고 하였다. 또한 19세기 초 김해 지역의 모습을 기록한 『낙하생집(洛下生集)』에는 “연안 포구에 사는 지역민들이 모두 오리를 사냥하면서 살고 있다. 일본인들은 오리를 아주 좋아해서 동래부로 가서 내다 판다. 동지 이후에는 오리 고기 맛이 떨어져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구하기 위해 가덕도로 가는데 청어와 대구를 잡는다”라고 하여 김해 지역에서는 왜관 아침 시장에 내다 팔 오리와 청어, 대구를 잡는 것이 성황이었다. 멀게는 약 117.82~157.09㎞[300~400리] 떨어진 곳의 상인도 아침 시장에 왔다고 하니 왜관 아침 시장은 단순한 식료품 시장에서 벗어나 대규모 잡화 시장으로 변하였던 듯하다.
이러한 동래부의 분위기는 남아 있는 시(詩)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다. 동래 부사로 임명되어 떠나는 친구에게 지인들이 준 시에 “보옥(寶玉)과 재화가 많아 서울의 큰 상인, 일체의 모리배(牟利輩)가 폭주하여 동래를 메운다”, “하나의 도회(都會) 지역으로 원래 물산이 폭주하는 고장이요, 먼 이국과 교통하니 이것이 기미(羇縻)이다”, “반룡(盤龍)과 보경(寶鏡), 명월주(明月珠)며 취우(翠羽)와 적소(赤蘇) 등이 마치 산처럼 쌓여 있다네”, “이익은 동남에서 거두어 부유함을 독차지하였는데 상인들은 10분의 1을 남기면서 남 속이기에 능란하구나” 등 동래부의 흥성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대일 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려는 전국의 상인들이 동래부로 폭주해 오면서 거리는 더욱 번성해졌다. 동래부가 발달하면서 밀양, 김해 등 주변 지역도 개시(開市), 조시와 연결되면서 장사를 통해 이익을 챙겼다. 상인만 동래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왜관 주변에 일하면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도 찾아왔다. 또 왜관 측의 요구에 의해 왜관에 들어가는 조선인도 있었다. 특히 왜관 측에서는 조선의 기술자를 많이 요청하였는데 도자기를 만드는 사기장, 놋쇠 그릇을 만드는 유기장, 나전 칠기를 만드는 나전장, 야장(冶匠)[대장장이], 의사 등 다양하였다. 사기장을 요청하는 일은 왜관 안에 설치되어 있던 부산요(釜山窯)와 관련이 많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도(茶道)가 크게 유행하면서 조선의 다기(茶器)에 대한 기호가 높았다. 처음에는 이미 만들어진 조선 도자기를 왜관을 통해 구하다가, 점차 일본인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도자기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17세기 중엽에 왜관 안에 요(窯)를 만들어서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측에서 원하는 다기의 견본이 왜관에 도착하면 왜관에서 조선에 협조를 구하였다. 조선의 사기장, 좋은 백토, 도자기를 구울 나무를 조선에 요청하고 사기장이 왜관 안에서 기거할 수 있도록 하고 왜관 안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유기장, 나전장도 모두 왜관 안에 들어가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였다. 『왜인 구청 등록(倭人求請謄錄)』에는 이들 장인의 거주지가 나와 있는데, 동래부는 물론이고 하동·진주·통영·양산·기장 등 다양한 지역에서 장인들이 차출되었다. 이들 조선의 장인들은 비록 국가의 명을 받고 왜관에 갔지만 그것을 기회로 일본의 도자기 수요, 도자기 기호, 일본 장인의 기술, 새로운 도자기 디자인 등을 보면서 일본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일본 측은 조선인 장인을 왜관으로 초청하여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는데, 조선인 중에는 일본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왜관을 출입한 이도 있었다. 일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교한 기술을 가졌던 최천약(崔天若)과 홍수해(洪壽海)는 일찍이 왜관에 들어가서 쇠, 나무, 흙, 돌을 가공하고 단련하는 법을 익혔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자명종과 화기(火器) 제조에 뛰어났고, 서울로 진출하여 왕실과 관련된 일도 많이 하였다. 이처럼 동래는 왜관과 교류가 많은 곳이어서 기술자 간의 교류도 있었다. 조선인 장인들이 왜관에 들어가 조선 기술을 전수하기도 하고, 또 조선인들이 일본 기술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의사를 많이 요청하였다. 통신사 일원으로 간 의사들이 일본 문인, 의사들과 의학에 관한 교류를 하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조선 의술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신뢰도 두터웠기 때문에 통신사가 아니더라도 조선인 의사를 만나고 싶어하였다. 일본 측에서 의사를 요청하면 대부분 서울 혜민서에서 왜관으로 의사가 파견되어 왔다. 외교 교섭을 위해 조선에 온 대마도 사절이 아플 때 왜관에 들어가 사절을 치료하였다. 대마 도주 등 대마도의 고위 관리가 병에 걸렸을 때에는 조선 의사가 왜관을 경유해서 직접 대마도에 다녀온 사례도 있었다. 어떤 경우는 일본 측에서 특정 의사를 지목하여 요청하기도 하였다. “대마도의 봉행(奉行) 평성춘(平成春)과 서수좌(恕首座)라고 이름 하는 사람이 중한 풍병(風病)을 얻어 침구(鍼灸)로 다스리려고 하는데 귀국의 의원 이(李) 주부(主簿)를 들여보내어 사람을 살리도록 해 주시면 [대마] 도주로서는 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이 주부는 곧 의원 이시찬(李時粲)인데 일찍이 매매하는 일로 왜관에 왔다가 일본인이 그에게 침술이 있는 것을 알고 이렇게 청하는 것입니다”라고 일본 측에서 요청한 것을 장계로 써서 서울로 보고한 내용도 있다. 1652년(효종 3) 11월에 행해진 이 요청은 통신사 외에 일본에서 의사를 요청한 첫 사례로 이후로 의사 파견은 종종 있었다. 의사 역시 조선인 장인과 국가의 명에 따라 왜관에 갔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마도, 일본 본토에까지 가서 의술을 펼쳤고 또 수개월 일본에 체류하면서 이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무역하러 동래부로 오는 상인, 명령을 받고 왜관에 일하러 오는 장인과 기술자 이들 모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왜관을 왕래하였다. 또한 왜관 안에는 승려 등 지식인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필담(筆談)을 나누고 각자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며 즐기기 위해 왜관을 왕래하는 조선 문인들도 있었다. 또는 왜관 공사가 있거나 소소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일이 생기면 잡역(雜役)에 동원되는 부산 사람들도 자주 왜관을 왕래하였다. 그리고 왜관 일본인이 모두 남자인 탓에 그들의 가사(家事)나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는 조선인도 생겼다. 맡고 있는 ‘일’ 때문에 왜관에 오는 조선인 외에 다양한 모습으로 왜관을 왕래하는 자들이 눈이 띄었다. 1729년(영조 5) 재판 차왜(裁判差倭)의 임무를 띠고 왜관에 온 아메노모리 호슈는 그가 왜관에서 접대한 조선인들을 모두 일지에 기록하였다. “4월 9일 동래 부사 친척들이 왜관 구경하러 와서 술을 대접하였다. 5월 10일 훈도와 훈도의 아들이 인사하러 와서 국수, 음료수와 술을 대접하였다. 5월 12일 훈도, 별차를 비롯하여 역관 가족 12명이 왔기에 요리를 대접하였다. 6월 19일 두모포 만호와 5명이 왜관 구경하러 와서 과자, 음료수와 술을 대접하였다” 등등. 아메노모리 호슈의 일기에 적인 조선인은 왜관에 친분을 쌓으러 오는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한 사람이 동래부나 왜관 주변 지역의 지휘관으로 발령을 받으면 그 가족은 떨어져 있는 가족을 만나러 동래부로 왔다. 이들에게는 발달한 동래부의 도회지 구경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일본인 마을인 왜관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였다. 또 왜관에 들어가면 일본인들이 진귀한 과자도 주고 일본 음식을 대접해 주니 일석이조 아닌가. 그뿐인가. 봄에 왜관 안이 만개한 벚꽃으로 뒤덮일 때 왜관 관수가 동래와 부산의 인사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