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송가[Battle Hymn]의 주인공 헤스 대령의 숨겨진 전공 -제1편-
나이 드신 독자 분 중에 전송가(戰頌歌- Battle Hymn)라는 영화와 실제 주인공 딘. 헤스 대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 -1957년-
그러나 사실과 너무 다른 스토리로 비판을 받았었다.
흥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었는데 하여튼 히트를 쳤다.
헤스 대령은 목사 안수를 받고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에 입대해서 전투기 조종사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2차 세계 대전시에는 유럽에서 P-47 전투기를 몰고 63회 전투 출격하는 전적을 쌓기도 했었다.
딘 헤스 대령의 한국 참전때의 모습 - F 51 무스탕 조종석에서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참전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고 한국 근무 중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독일 항복 후 기네스 북에도 오른 독일 공군 최고 전사인 한스 유리히 루델 대령이 그의 부대에 투항했었음을 쓰고 있다.
루델 대령은 동부 전선에서 소련을 상대로 슈투카 조종사로 싸웠는데 2,530회나 전투 출격을 했었다.[한국 공군은 유치곤 대위의 203회]
적 전차 격파 519량, 차량 800량, 장갑열차 4량, 적 해군 전함 [32,000톤급의 마라트]격침, 순양함 두척, 구축함 한 척을 격침했었다. 적기 12기 격추, 열두번이나 격추당했었고 세 번 포로가 되었지만 모두 탈출했었다. 폭격기를 몰던 그가 격추시킨 소련 전투기 조종사 중에 레프 세스코프라는 항공 영웅도 있었다.
그는 다리 하나를 잃고서도 외다리로 계속 출격해서 러시아군을 공격했었는데 전쟁 마지막 동부[소련] 전선에서 싸웠던 그는 혹독한 취급을 당할 소련군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하들과 FW-190을 몰고 두시간을 비행하여 서부 전선으로 탈출해서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전송가에 묘사된 독일 전투기들의 항복 착륙 순간이 어쩐지 낯익어서 루델 대령의 슈투카 파이럿이라는 자서전을 찾아 보니 그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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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 대령에게 주어진 미션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공군을 크게 육성하는 BOUT 1 이라는 명칭의 프로젝트 추진이었다.
그는 미군 장교 4명과 100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물자와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었고 고정된 훈련 비행장도 없어서 이 비행장 저 비행장을 전전하였는데,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군과 고락을 함께하며 한국 전투기 조종사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열성에 힘입어 전투기 한 대 없던 한국 공군은 3년도 안되어 75기의 무스탕 전투기에 자체 출격이 가능한 근대 공군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일본에 F-51(무스탕)기를 인수하러 간 한국 공군 조종사들.
이착륙 훈련만 받고 돌아와 바로 출격했었다. 일본 육군 항공대의 베테랑 조종사들이었지만 익숙치 않은 무스탕기를 조종하다가 이근석 대령이 전사했다. 그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로서 연합군기 23기를 격추했던 조종사였었다. 한국 조종사들은 전쟁의 위기를 넘기자 헤스 대령의 교관들로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다시 이수했었다.
그는 한국 공군을 훈련시키면서도 수시로 미군 또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동반 출격해서 250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100회 출격의 축하식
그러나 헤스 대령은 이런 군사적인 면보다도, 그가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세우고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후퇴하던 1950년 12월 14일 미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서 1,000명의 전쟁 고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피난시킨 대 수송 작전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알렸었다.
헤스 대령이 몰던 무스탕 18번기. 한국 공군의 태극기 기체 표시가 있다. 그의
한국어 번역 로고인 신념의 조인이라는
글이 써있다.
목사인 헤스 대령이 결정한 By faith, I fly.의 한국어 번역이었다.
[믿음으로 비행한다는 원래의 뜻이 조금 왜곡 된 느낌이 든다.]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물론 임기를 끝내고 미국에 돌아 간 뒤에도 계속 자금을 모아 고아원을 돌봤었다. 이승만 박사 내외와도 아주 가까웠던 그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 민족에 가까웠던 미 공군 조종사로 남아있다.
그는 이승만 박사를 아주 존경했었고 이승만 박사 내외는 그를 아들처럼 아꼈다. 훈장 포상식 뒤의 촬영.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헤스 대령은 93세의 나이에도 아직 생존해있다.
C-54 수송기 10대로 단행한 1,000명 고아의 제주도 공수
장난감 자동차 공수 작전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옆의 원장 황온순여사는 전쟁중 아들을 잃었었다.이화 여전을 나왔고 영국 유학을 다녀와 영어가 능숙했었다. 2003년 작고.
그러나 헤스 대령이 한국 전쟁 중에 전투기를 몰고 츨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던 사실은 군이나 언론에서 잘 몰라주고 있다.
평택 남방 도로에서 적 기계화 부대의 등뼈를 부러뜨린 폭격 작전인데 전쟁 초기 극히 불리했던 한국전의 전황 극복에 엄청나게 기여한 항공 공격이었다.
그 때 한국군은 북한의 기습으로 입은 심적 물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들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대패한 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터였다.
오산 죽미령 공격은 북한군 최정예 4사단 18연대가 실행했었고 105전차 사단은 33량의 T-34 전차를 동원하여 오산 방어선의 중앙 도로를 돌파하여 공격의 예봉을 담당했었다.
그런 때에 딘 소장은 제 24사단을 재편하여 대전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래는 헤스 대령의 저서 전송가에서 빌려온 대목이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아침 날씨가 너무 흐려서 우리 훈련단은 그냥 죽치고 앉아 있었다.
[이 날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한지 닷새 되는 7월 10일이었다. 이 무렵은 장마철이어서 계속 비가 왔었고 한반도 전역의 기상이 좋지 않았었다. 1950년 7월 10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는데 헤스 대령이나 작가가 착각을 한 듯하다.]
마침 통신 정비병 하나가 F-51 무전기를 작동시켜려고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미 24사단 21연대에 배속된 공군 항공 통제단[FAC] 짚차의 무선을 통해 비상 항공 지원의 요청이 수신되었다.
이 불순한 날씨에 일본에서 전투기가 급히 온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현실적으로 우리 Bout-1 훈련단 비행기가 비교적 가까이 있던 셈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활주로는 연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절반 정도는 6인치 되는 깊이의 물에 잠겨 있었다.
허나 비상 지원 요청을 받은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조종사들한테 모두 출격하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 지원자가 있나 물었더니 그 당시 10여명의 미군 조종사 가운데 한 사람인 팀버레이크 중위가 나섰다.
우리 둘은 무스탕기를 서서히 활주로로 몰고 나가 신속하게 폭탄과 기총탄을 무장할 만큼 무장하였다. 우리는 완전 무장으로 무거워진 기체를 가까스로 활주시켜 이륙하였다.
상공에 오르자 나는 지원 요청을 한 전방의 FAC에게 무선을 보냈다.그랬더니 전방에서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기계화 부대를 공격해달라는 것이었다. 미 지상군은 기계화 부대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육군에게는 적 탱크를 파괴시킬 중무기가 없었다.[최선의 대전차 무기인 3.5로케트 포는 대전 전투 때부터 사용되었다.]
우리가 목표물을 향하여 날아가자 하늘이 맑아졌고 적의 기계화 부대가 환히 내려다 보였다. 이것을 보자 나는 전율을 느꼈다.
한국 공군 F-51(무스탕)기 편대의 출격
탱크, 트럭, 기타 별별 차량들이 10-15마일 가량 되는 비포장 도로에 줄을 지어 가고 있었는데 높은 상공에서 보니 부대 행군 간격 때문에 마치 중간 중간 토막 난 뱀처럼 보였다.
전방 항공 통제단에서 보낸 무선으로 들려오던 경악이 섞여있던 목소리를 이제 충분히 이해 할만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F-51 2대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 때에 내 비행기는 무선이 가능했으나 팀버레이크 중위의 비행기와는 교신이 안 되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에게 이 기계화 부대의 후미를 공격하라고 일러 놓은 다음 나는 부대의 선두로 가서 타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기계화 부대 양 끝에 급강하 하면서 기총탄을 퍼붓고 폭탄 세례를 가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폭탄들이 목표했던 곳들에 모두 명중했다. 선두와 후미의 차량들을 폭파시키는 동시에 목표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으니 북한군들은 행열 앞과 뒤 어디로건 빠져 나갈 길이
없이 도로에 고정되고 말았다.
이들을 가두어 놓은 다음 나는 긴급 호출 신호인 메이데이를 기지 사령부로 날렸다.
장마철의 F-51(무스탕) 출격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답신이 없었다. 바로 아래에 대물 표적을 놔둔 나는 단념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물 표적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항공 공격대의 출격이 필요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미 공군의 대부대가 없었다. 아직도 일본의 공군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헤스 대령은 일본 기지를 호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답신이 올 때까지 30-40분 간격으로 반복 호출을 하면서 차량 대열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사격을 제압하는 기총 사격을 되풀이 하였다.
적군의 대열 자체는 그대로 놓아둔 채 적군 차량 중에서 대열 옆길로 빠져나와 탈출하려는 새치기 차량들을 보이는대로 공격했다.
드디어 나의 메이데이 신호가 마침 일본 상공에서 불순한 기후 때문에 이다쓰케 공군기지에 비상 착륙하려던 어느 미 공군 비행기에 포착되었다.
헤스 대령이 한국 참전시 그의 오른 팔 역할을 했던 크레이그웰 중위.
혹심한 미군 내부의 인종 차별을 이겨냈고 아주 유능한 조종사였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답신이 있자 나는 이 쪽 상황을 설명하고 올 수 있는 모든 전투기들은 다 와주기를 청하였다.
일본 교신 후 대구 소재 미 육군 통신대와도 교신이 트여 대구 비행장에 있는 나의 부대 비행기들도 모두 출동하도록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