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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온 아이들’ 일곱 번째는 일본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배제를 반대하는 연락회(高校無償化を求める連絡会)’ 오사카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나가사키 유미코(長崎由美子) 씨가 보내온 글을 소개합니다.
일본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조선학교를 차별하고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정부가 저지르는 차별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배제를 반대하는 연락회’는 최근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만 고교 무상화에서 제외시킨 것에 항의하고 법적 대응도 함께하는 단체입니다.
나가사키 씨는 이번 글에서 일본사람의 시선에서 본 조선학교를 이야기합니다. 조선학교를 지지하게 된 과정 속에서 느낀 감정들,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만 고교 무상화에서 배제한 정책을 되돌려야 하는 이유를 전합니다. |
저는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배제를 반대하는 연락회’ 오사카 사무국장이며, ‘조선학교를 즐겁게 지원하는 이쿠노(生野)의 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나가사키 유미코입니다.
그 밖에 활동으로는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기독교 교회가 교파를 넘어 협력하고 봉사하는 이쿠노 지역 활동협의회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오사카 이쿠노구에 온 지 32년이 되며, 세이와(聖和)사회관 직원, 오사카 세이와 보육원 보육사로 일했고, 현재는 발달장애아의 학습 지원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보육사로 일했던 오사카 세이와 보육원은 재원 아동의 70% 이상이 재일한국·조선적이어서 조선학교는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12년 전 이쿠노구에서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일본인 모임’을 결성할 때 요청을 받아 대표가 되었습니다.
‘고교 무상화를 주장하는 화요시위’ (매주 화요일 12시부터)에 참가한 나가사키 유미코 씨. ⓒ나가사키 유미코
원래 저는 시즈오카에서 태어났고, 자이니치(在日) 문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나고야에서 대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재일한국인 청년이 일본에서 차별을 받고 민족에 대해 깨닫게 된 후 조국인 한국으로 유학을 간 뒤, 거기서 다시 북한의 스파이라는 억울한 죄로 정치범이 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비극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자이니치 정치범의 지원 활동을 하는 가운데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말 교육도, 조선 이름도 빼앗은 역사를 알았습니다. 일본인으로서 마음의 빚을 졌다는 생각만이 앞섰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살고 싶었던 바람
저는 대학 4학년 때 이쿠노에서 참여한 세미나에서 재일 1세, 2세의 명랑함과 다정함, 그리고 억척스럽게 사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머리로만 차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이니치 분들과 만나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살고 싶었던 바람이 실현되어 이쿠노에 와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학교의 중요성은 오사카 세이와보육원에서 민족보육을 하는 과정 속에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재원 아동의 70%가 자이니치(在日)이지만, 세이와 보육원에서는 한국·조선에 관한 민족보육은 없었습니다.
30년 전에 처음으로 자이니치 보육사와 일본인 보육사가 힘을 합쳐 민족보육 과정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잘 먹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가르치고, 한국·조선의 민화를 연극으로 만들었고, 장고 연주, 부채춤 등을 보육사들이 연습해 공연했습니다. 급식으로는 비빔밥, 떡, 지지미 등 한국·조선요리를 도입했습니다.
머리로만 차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이니치 분들과 만나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살고 싶었던 바람의 실현이 중요합니다. ⓒ 몽당연필
자신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것
그런 가운데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같은 자이니치 보육사라 해도 민족학교 출신의 보육사와 일본학교에서 일본이름(통명)으로 살아온 보육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민족학교 출신의 보육사는 본명을 사용하며 한국·조선어를 읽고 쓸 수 있었고, 장고 등 민족 악기, 무용과 친근했습니다.
자이니치가 일본에서 살게 된 과거의 역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름으로 살아온 보육사는 한국·조선어도, 문화도, 역사도 배울 수 없었고, 민족보육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씩 되찾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민족보육을 하면서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김’이나 ‘이’같은 본명을 쓰는 아이가 즐겁게 생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이름을 쓰는 아이가 자이니치로서 본명을 쓰는 보육사에게 “저도 사실은 김씨에요. 한국인이거든요”라고 기쁘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한국·조선의 문화가 훌륭한 것임을 전해줌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이와보육원의 보육지침은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국적이 달라도, 장애가 있어도, 모두 신에게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 기본입니다. 건전한 자존심을 확실하게 갖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한국 조선의 문화가 훌륭한 것임을 전해줌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 몽당연필
제가 조선학교를 지원하게 된 이유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인간으로서 긍지를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육사로서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민족교육이란, 자신의 민족만이 훌륭하다고 가르치는 편협한 내셔널리즘 교육이 아니라, 풍부한 자존감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는 조선학교가 아니면 충분한 조선말 교육을 받을 수 없고, 경쟁주의가 아닌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법도 배울 수 없습니다.
차별에 굴하지 않고 진심으로 서로를 대하는 자이니치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것도 조선학교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책임을 생각하더라도,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 지배로 일본어교육을 강요하고 조선말을 빼앗은 과거를 생각한다면, 조선학교에 대해 법적으로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학교의 교사나 한국에서 온 방문객이 조선학교 수업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감격하는 것, 그것은 아이들의 높은 수업 집중력과 교사와의 깊은 신뢰관계, 구김살 없으면서도 예의바름에 있습니다. 또 아이들끼리 관계가 좋은 아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도 차별 없이 서로 돕는 것에 놀랍니다.
조선학교 수업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감격하는 것, 그것은 아이들의 높은 수업 집중력과 교사와의 깊은 신뢰관계, 구김살 없으면서도 예의바름에 있습니다. ⓒ몽당연필
일본도 한국도 교육이 경쟁주의가 되어 부모와 교사 간에 신뢰를 잃어가고, 아이들이 상품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학교에서는 아이들과 보호자와 교사 삼자가 서로를 신뢰하는 삼각형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안고 이른 아침 도시락을 만들어 주며 애쓰는 모습에 감사하고, 보호자는 급여도 적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교원의 모습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삼자 이외에도 지역의 재일동포가 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일하고 아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지는데 감사하며 성장합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지를 갖고 사는 한국·조선인과 만나는 것은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풍부한 다양성을 가질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집니다.
풍요로운 만남을
만드는 것
저의 두 아들은 30세와 27세인데, 세이와보육원에서 민족보육을 받고, 자이니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자랐습니다. 장남은 자이니치 친구가 사회적 차별 때문에 통명과 본명을 같이 쓰는 것을 보고 이름이 두 개나 있어서 멋지다며 자신의 이름인 <長崎 望>가 아니라 통명인 <이영호>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소학교에 입학할 때는 미유키모리 소학교(御幸森小学校)가 아닌 조선제4초급학교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일본어도 조선말도 할 수 있어 멋진 일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유아기에 한국·조선 문화를 훌륭한 것으로 여기고 접하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도 풍요로운 만남을 만드는 것임을 저의 아이들을 통해 실감했습니다.
장남은 중국에 유학해 일본의 샤프(SHARP)를 거쳐 현재 소프트뱅크(Soft Bank)에서 태양에너지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차남은 장고와 무용을 매우 좋아했는데, 현재는 일본의 전통예능의 분야에서 샤미센(일본 전통악기) 연주가로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한국·조선의 문화를 접하고 일본인으로서 아이덴티티를 깨달은 것도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학교는, 일본사회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재일 한국·조선인을 키우고, 따뜻한 지역의 커뮤니티로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조선학교 졸업생은 의사, 변호사, 스포츠, 교육, 복지,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활약하며 일본사회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편협한 내셔널리즘과 반일교육을 하였다면 이토록 풍부한 인재는 키울 수 없습니다.
조선학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고, 긍지를 갖고 살아가며, 친구들과 함께 크는 소중한 커뮤니티라고 생각합니다.
“조선고급학교를 고교무상화 대상에서 배제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2012년 9월 일본 오사카시청 앞에서 ‘고교무상화를 주장하는 화요시위’에 참가 중인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배제를 반대하는 연락회. ⓒ 몽당연필
명백한 인종차별
2010년 고교무상화법이 만들어 졌을 때, 조선학교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당초에는 큰 기대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심사와 연기로 무상화적용에서 제외되자 실망과 분노만이 더해져 갔습니다.
오사카에서도 여러 차례 집회를 열었고, 국회에 진정서를 내고, 서명모집도 했습니다. 하지만 불합리하게도 아베정권은 행정명령에서 조선학교가 해당하는 부분만을 삭제하고, 무상화에서 배제시켰습니다.
그 4년 동안 학생들은 거리에 나가 자신들도 똑같은 학생으로 인정해 달라며 전단을 뿌리고, 서명모집운동을 했습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럭비부가 오사카부(府) 대표로 출전해 전국3위에 입상을 하고도 고등학교로 인정받지 못해 오사카부의 보조금 지급도 중단된 상태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고교까지는 평등하게 배우는 기회균등이 고교무상화의 취지입니다. 조선학교만을 정치적 이유로 배제하는 것은 무상화법에도 어긋나는 명백한 인종차별입니다.
재정까지 열악하다
저는 오사카 조고에 입학하는 중급부(중학교) 3학년 학생들한테서 자신들에게도 고교무상화가 적용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올해 졸업한 고급부(고등학교) 학생들은 후배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억울함과 슬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일본사회에 대한 불신과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무상화적용을 요구합니다.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모임을 시작한 12년 전부터 조선학교의 재정이 열악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각종학교(일본교육법 제1조에 해당되지 않는 학원과 같은 분류)라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보조금이 없고, 오사카부와 오사카시의 보조금뿐으로, 나머지는 보호자와 지역동포들의 지원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사카부와 오사카시에 보조금을 좀 더 증액할 수 없는지 요청했습니다.
오사카부의 보조금 약 7만 엔은 공립소·중학교에 약 100만 엔, 사립학교에 지원되는 33만 엔과 비교해 보아도 너무나 적은 금액입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고교무상화 재판 이야기를 럭비부의 끝없는 도전으로 잘 녹여낸 영화 <60만번의 트라이>. 이 영화에서 하시모토 오사카 부지사의 조선학교 차별발언을 접할 수 있습니다. ⓒ몽당연필
하시모토 오사카 부지사의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발언을 시작으로 학교 측에 부당한 4가지 조건을 무리하게 요구했고, 학교 측이 그것을 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학교 보조금을 2011년도부터 중단했습니다. 보호자들은 납세자로서 오사카부와 시에 세금을 내고 있는데도 자녀들의 교육에는 한 푼도 환원되지 않는 이토록 부조리한 차별이 어디 있습니까.
교육에 쓰이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것은, 쓸데없는 도로와 건물을 세우는 비용지급을 중단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거기서 일하는 교원이 생활을 할 수 없어 그만두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도 지금 자신들의 학교가 보조금이 중단되어 부모와 선생님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선생님이 생활이 어려워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학교가 보조금을 받지 못해 좋아하는 선생님 생활이 어려워지는 걸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학교는 보조금을 안 주고 학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오사카부와 오사카시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몽당연필
인간의 긍지를
지키는 싸움
일본이 패전하고 GHQ(미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 조선학교가 폐쇄되어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현재는 보조금을 끊고 경제적으로 압박해 조선학교를 없애려고 합니다.
“왜 우리학교는 보조금을 안 주고 학교로 인정 못 받는 거에요?”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라는 아이들의 물음에 오사카부도 오사카시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조선학교 문제와 맞서면서 이 문제는 인간의 긍지를 지키는 싸움이라고 강하게 느꼈습니다.
고교 무상화적용과 보조금 삭제는 돈 뿐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긍지를 갖고 차별을 용서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매주 화요일 오사카부 청사 앞 행동에는 30명~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반 수 이상이 일본인입니다. 일본사람이 조선학교를 차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파괴이며, 다양성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본인에 대해 마음을 열고 신뢰해준 자이니치 여러분들과의 우정은 풍요로운 인연입니다. 제가 32년 전에 이쿠노에 온 뒤로 많은 자이니치 분들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과거 역사의 빚을 안고 있는 제가 진심을 가지고 마주대하며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는 가운데 관계를 쌓아왔습니다. 잊을 수 없는 만남과 말씀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먼저 대학 4학년 때 이쿠노 세미나에서 만난 자이니치 여성에게 “어떤 일본인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숨겨주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가운데서도 조선인을 도와주는 일본인도 있었다. 그런 일본인은 신뢰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이따금 떠오릅니다.
나는 그분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 살아가는 것일까 자문자답하게 됩니다.
납치문제의 분노와
자이니치 아이들
납치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때 저는 ‘조선학교를 즐겁게 지원하는 이쿠노의 모임’을 막 결성했을 때였습니다.
시의회 의원 선거에 나선 가운데 매일같이 거리에 서서 호소했습니다. 납치문제가 보도된 다음날도 역 앞에 나가 납치문제에 대한 분노를 자니이치 아이들에게 폭언·폭력으로 이어가지 말고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호소했습니다.
솔직히 이 문제를 호소할 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납치문제에 대한 분노가 거리에 넘쳐나 저에게도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도망치면 안 된다, 자이니치 분들이야말로 지금이 가장 괴로운 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한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저의 손을 잡고 “고맙구려, 고마워요. 우리 손자가 조선학교에 다녀요. 당신은 일본사람인데도 이런 때에 고맙게도 그리 말해주는구려”하며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일본에서 차별을 당하면서 고생을 해 온 것이 그대로 전해지는 거칠고 커다란 손이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는 조선인 차별에 대한 빚을 지고 있는 저의 마음을 따듯하게 감싸주는 눈물이었습니다.
관동대지진
그리고 관동대지진에 관해서는 우리 집에도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 집은 명치시대 초기부터 크리스천으로 특히 제 어머니와 할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지난해 9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이쿠노에서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일을 기뻐하며 항상 모금을 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관동대지진을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들으니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일본인을 죽이러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할머니께서는 ‘그럴 일은 없다, 믿을 수 없다’고 했고, 근처에 살았던 외무성 직원이 조선인이 몰려온다며 총을 들고 자경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본 이웃 사람이 ‘역시나 정말로 조선인이 우릴 죽이러 온다’며 외쳐대도 할머니는 끝까지 ‘그건 거짓말이다’고 하셨다 합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유언비어가 유포됩니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더라.’ ... 벌써 9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진상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단체 ‘봉선화 모임’의 노력으로 2009년 일본 도쿄 스미다구에 재일조선인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매년 9월 1일이면 근처 조선학교 아이들은 이 추모비를 찾습니다. ⓒ몽당연필
이 이야기를 조선학교의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더니 교장선생님께서 자신의 조부의 친구가 관동대지진 때 자경단에 쫓겨 죽게 되었을 때 일본인 집의 문을 두드렸고, 도움을 받아 살 수 있었다는 얘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시대든지 국가를 초월해 인간으로서 서로를 돕는 관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차별과 편견은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서로의 마음 속 얼음을 녹여 만나는 삶은 얼마나 풍요로울까요. 한국의 몽당연필 같은 단체의 지원이 저희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힘이 되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험난한 상황은 계속되겠지만, 조선학교의 아이들의 환한 미소를, 꿈을, 빼앗지 않는 사회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힘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험난한 상황이 계속 돼도 조선학교 아이들의 환한 미소와 꿈은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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