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남금북정맥 06차(분젓치~모래재) 산 행 일 : 2013. 04. 14.(일) 산행코스 : 분젓치 ~ 방고개 ~ 좌구산 ~ 질마재 ~ 칠보산 ~ 송치재 ~ 모래재 (산행거리 16.1km) 산행참가 : 20 + 1 명. 토요일 정규산행에 참가하지 못하고, 14일(일)에 홀로 땜빵산행.
<산행코스>
옛날 백두대간을 걸을 때는 정규 산행에 참가하지 못하면 다들 땜빵 산행을 했었는데, 요즘은 땜빵산행이라는 단어가 옛날 고어가 된듯하다. 나는 아직 모른다. 세상살이 뭐가 의미 있는 일이고, 뭐가 살아갈 이유를 부여하는지를. 아마도 내가 삶의 의미를 깨치고 의미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다도 부처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수많은 대상 중에서 어느 특정한 것에 스스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것일 뿐 ! 그래서 나는 오늘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를 몰아 한남금북정맥 땜빵 산행에 나선다. 증평역에 차를 두고, 택시로 분젓치 가는 도중에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이런 비에도 등산을 가냐고, 그것도 혼자' 라며 택시기사가 기도 않차 한다.
분젓치에 도착하여, 비를 피해 좌구정에서 우중 산행을 준비한다.
좌구정에서 본, 비 내리는 삼가저수지 방향 조망.
분젓치 방향.
우중산행 준비를 마치고 셀카 한방!
분젓치 들머리를 들어서는데, 내리던 빗방울이 잦아들며, 비 맞을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2013. 4. 13.(토) 04:18 어제 새벽 이곳에서 출발한 백두들의 발자취을 따라...
한남금북정맥 능선에 올라서, 돌아본 좌구정과 삼가저수지 방향.
돌아본 구녀산 방향.
친절한 정맥길 이정표. 정맥길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어서 알바의 가능성은 없을 듯하다.
30여분의 오름길 끝에 540봉에 도착한다.
540봉 이정표.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이어지며, 536봉을 지난다.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ㅉㅉ
화원리 갈림길이다. 표지판이 없었으면 그냥 직진해서 미원면 화원리 방향으로 알바를 갔을 듯한 곳이다.
화원리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방고개로 내려오다가 돌아본 급경사 내림길에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어제 새벽 백두들도 나처럼 조심조심 이 계단길을 내려갔을 듯.
방고개로 내려서기 직전에는 해변가 방갈로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의자들이 꽤나 많다. 아마도 천문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듯하다.
방고개 도착.
<방고개(栗峙 360m)> 증평읍 율리의 부점촌과 청원군 미원면 화원리의 삼흥을 잇는 고개로, 또 다른 고갯길인 분젓치(해발 340m)와 함께 증평에서 미원으로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분젓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이 외지며 높이로는 분젓치 보다 약 20m가량 높은 방고개는, 지금은 거의 이용되지 않고 좌구산 천문대를 방문하는 경우에 주로 이용되는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원래는 율치라고 부르는 밤고개였는데 어떻게 방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증평군의 지명에 대한 사료에 따르면 이곳 밤고개 밑에는 밤티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 때의 공신인 김치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이룬 마을이라고 한다. 방고개 이정표.
좌구산 천문대 입구.
좌구산 등산 안내도.
좌구산 방향 들머리는 나무계단으로 시작되지만,
방고개 좌구산 천문대 입구로 들어서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천문대로 들어간다.
혹시나 천문대에 전시실이라도 있으면 구경이나 하고 갈까 싶어서 천문대 입구로 향한다. 하지만 비도 오고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인적이 전혀 없고 하여 천문대 탐방은 포기하고, 그냥 산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돌아본 좌구산 천문대.
천문대에서 조금 오르니 510봉에 도착한다. 율리 방향으로 갈림길이 있으며, 주차장 방향 이정표가 있다.
510봉 이정표. 율리에서 좌구산 산행을 하는 산객들도 제법 있는 듯하다.
좌구산 소나무도 일제시대의 아픈 생채기를 간직하고 있다.
두번째 주차장 갈림길. 증평군에서 좌구산 등산객들을 위해 곳곳에 표지판과 밴치를 만들어 놓았다.
연리지나무 설명판도 만들어 놓았다.
급경사를 올라 만난 능선 분기점에도 밴치가 있다.
좌구산 직전 돌탑봉에 밴치가 있다. 짝꿍이랑 왔으면 밴치에서 도란도란 쉬어 갔으겠지만, 홀로 가는 정맥꾼은 쉬어갈 여유를 갖지 못한다.
칼춤바위라는 설명판을 붙여 놓았다. 지자체에서 우짜든지 콘텐츠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역력하다.
완연한 봄기운.
2013. 4. 13. 06:13 어제 아침 백두들도 좌구산을 이렇게 올랐다.
좌구산 정상에 도착했으나, 아직도 구름이 주위를 덮고 있다.
<좌구산(座龜山 658m)> 청원군 미원면 대덕리와 증평군 증평읍 율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청원군에서는 가장 높다. 좌구산은 한자 표기가 다른 좌구산(座狗山)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이런 연유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때 이서개라는 경상도 학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미원을 지나며 북쪽으로 향하는데, 큰 산 아래에 이르러 점심때가 되어 자리를 잡았다. 이서개는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에 보이는 큰 산이 개가 앉아 짓고 있는 형세임을 간파하였다. 이서개는 개가 짓는 형세는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파악하고 사람들에게 급히 짐을 챙기도록 하였는데, 몇몇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서개는 따르는 일행을 이끌고 먼저 자리를 피하였는데, 곧이어 왜군들이 들이 닥쳤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 화를 당하고 말았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산을 한자 표기로 '개 구(狗)'자를 쓴 좌구산(座狗山)이라고 불렀고, 산이 주변 부락의 안위와 평화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다. 또 '앉을 좌(坐)', '개 구(狗)'자, 좌구산(坐狗山)으로 예전에는 민가가 없고 산(山)만 있었는데 그 산에 올라가면 개 짖는 소리가 났다 하며, 나중에 풍수적으로 말해서 거북이가 남쪽을 향해서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하여 좌구산(坐龜山)으로 고쳤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조선조 광해군 때 정3품인 병조참지를 지냈던 진주목사 김시민의 양아들인 김치(金緻)는 점술과 천문에 능했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질 즈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관상을 보니, 이듬해인 인조반정의 해에 죽을 운명인지라 관직을 사직하고 이곳 좌구산 밑의 율리 마을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이때 김치는 한양의 심기원, 최명길 등과 내통하여 인조반정을 모의했다고 하는데, 어느 날 심기원이 김치에게 찾아와 능양군의 사주와 반정을 일으킬 일자를 점쳐 달라고 하였다. 이에 김치는 반정 일자를 정해주고 깊은 잠에 빠졌는데 한밤중에 동쪽의 좌구산에서 개가 하도 짖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 즉시 피하는 바람에 무사했다고 한다. 그 후에 개가 짖음으로써 사람을 구하고 나라의 큰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명산이니 '개 구(狗)’자를 써서 좌구산(座狗山)이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유래가 전해져 내려온다.
좌구산 정상 증명은 셀카로.
2013. 4. 13. 06:15 어제 아침에는 일출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나 보다.
백두산우회 좌구산 산행 인증.
돌아본 구녀산 방향으로 지나온 한남금북정맥 능선이 한눈에 가늠된다.
돌아본 좌구산과 구녀산 방향 파노라마.
동쪽 방향. 아마도 희양산 대야산 속리산 등이 저 멀리 어느 봉우리 일듯... 그래서 저 건너편 뚜렷한 능선이 백두대간쯤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덕리 방향 조망.
동남쪽 방향 파노라마.
위의 사진들은 어제 아침에 찍은 것을 옮겨 놓았다. 주위를 덮고 있는 안개로 인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못내 아쉬워하며...
좌구산 정상을 뒤로하니,
또다른 좌구산 정상 삼감점이 나타난다.
돌아본 좌구산.
서풍이 불어와 구름을 날리니, 구름에 쌓여 있던 좌구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나도 주변 조망을 보면서 걷는 행운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해 본다.
좌구산이 아쉬워 다시 한번 돌아보고,
588봉쯤의 봉우리 하나를 우회하여 지나는데, 이제는 구름이 옅어지면서 주변 분간이 가능해진다.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넘고 또 넘다 보면,
뒤틀어진 행색이 이쁘게 보이기도 하고,
인적없는 산과 나무가 내 것 인양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새작골산에 도착한다.
<새작골산> 괴산군과 증평군 그리고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새작골산 이정표.
새작골산을 지나니, 우측으로 전나무 조림지가 나타난다.
조금 더 내려가면 질마재가 나올듯하여 전나무숲 속에서 조금은 이른듯한 점심을 먹기로 한다. 홀로하는 점심식사는 준비할 게 더 많은듯하다.
20여분간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조금 내려오니, 이내 질마재에 도착한다. 질마재 괴산 방향.
<질마재> 질마재는 괴산군 청안면과 청천면을 연결하는 592번 지방도 지나가는 고개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질마재보다 청안고개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 새로 공사를 한 듯 아직까지 주변에 공사 흔적이 역력하다. 청안면에서 이곳 질마재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꼬불꼬불하여 마치 강원도 고개를 넘는 기분이 든다. 질마는 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을 끌때 안장같이 얻는 제구로 그 모양이 질마와 같은 형국으로 된 고개와 같다고 해서 질마재라 불렀다고 한다.
질마재 증평 방향.
질마재 도로를 가로질러 들머리로 들어서서 오르다가 돌아본 괴산 방향.
절개지 수로를 따라 오르다가 우측 숲으로 들어간다.
2013. 4. 13. 07:25 백두들도 아침식사를 질마재 근처에서 했다.
좌측 골짜기 건너편으로 질마재에서 증평으로 이어지는 592번 지방도가 보이고,
좌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청안면의 너른 들판도 내려다 보인다.
가야 할 440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묘지에서 돌아본 지나온 새작골산 방향.
덧골 갈림길 이정표를 지난다. 아마도 우측 문당리 방향으로 이어진 지능선 어디쯤에 "덧골"이 있는 듯하다.
나무에 막대기를 묶어서 철봉을 만들어 놓았다. 주변에 인가가 많지 않아서 산행을 하면서 운동할 사람이 없을 듯한데...
아침에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날이 개인 것도 감사할 일인데, 진달래가 만개한 모습도 볼 수 있으니 더더욱 감지덕지다.
진달래 꽃길을 걸어, 조그만 봉우리를 하나 넘으니,
멧돼지 진흙목욕 흔적이 있는 군방고개를 지난다.
우측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수레길과 만나고,
가야 할 칠보산 남쪽 기슭에 인삼밭인듯한 곳이 보인다.
우측 문당리 방향으로 뻗은 지능선 조망.
능선 우측에 묘지가 나타나며 조망이 트인다.
우측으로 보이는 청안면 문당리의 북서쪽에 있는 목사동 마을은, 오래전부터 나무로 지은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칠보치에 도착한다.
<칠보치(405m)> 괴산군 청안면의 배나무골에서 객골로 넘어가는 고개인 칠보치는, 현재는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지만 소형 트럭 하나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고갯길이 아직도 뚜렷하다. 일반적으로는 산줄기를 중심으로 군이나 면의 경계를 삼는데, 이곳 질마재에서 596.5봉까지는 청안면 좌우를 가르며 정맥이 지나간다.
칠보치 동쪽 객골 방향.
서쪽 청안면 방향.
칠보산 오름길에 돌아본 좌구산 방향.
홀로 걷는 정맥길에 보는 표지기는 더욱 반갑다. 우리 산우회도 표지기를 걸며 배려하는 산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우측으로 청안면 객골의 씨감자 저온 저장소가 내려다 보인다.
등산로 우측으로 괴산군 종자보급소가 보이는데 "종자는 생명자원"이라는 글귀가 크게 쓰여 있다. 이곳에서는 괴산의 특산물인 괴산 청결고추, 옥수수(대학찰옥수수)를 대학교수가 척박한 고향 괴산을 생각해서 연구했다고 한다. 시골 절임배추와 바이오 씨감자에 대한 연구와 생산을 하는 곳이라 한다. "객골"은 하늘아래 첫동네로 불릴 정도로 오지였으나, 씨감자 생산단지사업이 추진되면서 오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고냉지 단지로 유망한 동네가 되었다 한다.
전나무 조림지 사이로 넓게 조성된 육모장이 내려다 보인다.
홀로가는 산꾼에겐 진달래도 더없는 친구가 된다.
좌측 청안면 방향.
칠보산 갈림길에 도착하여,
정맥길에서 우측으로 30m 떨어져 있는 칠보산을 향한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1분 정도 나뭇가지가 널브러진 길을 진행하면, 칠보산(七寶山) 정상이다. 칠보산(585m) 정상은 소나무가 주변을 가려 조망은 없으나, 정상석은 '칠보산악회에서 세웠노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칠보산 정상.
<칠보산(585m)> 칠보산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긴 했지만, 이름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 아닌가 싶다. 주위의 조망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명승지나 유명한 그 무엇하나도 없는데 왜 칠보라고 했을까? 칠보(七寶)란 불교 경전인 무량수경에서는 금, 은, 유리, 파리, 마노, 거거, 산호를 말하며, 법화경에서는 금, 은, 마노, 유리, 거거, 진주, 매괴를 말한다. 금강경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와도 자주 비교하는 항목이다. 괴산군에는 이곳에서 동쪽으로 10여 킬로 떨어진 쌍곡계곡에 또다른 칠보산이 있는데, 7개의 보물처럼 아름다운 기암절벽과 빼어난 절경이 있다 하여 그리 부른다고 한다. <괴산 35명산 위치도>
괴산의 칠보산악회에서 세워 놓은 칠보산 정상석에서 셀카 인증을 남긴다.
하루 전 백두들은 09:41에 칠보산에서 정상 인증을 남겼다.
한참의 쉼을 뒤로하고 칠보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쪽지봉 방향으로 한남금북길을 이어간다.
임도길로 내려서서,
황암마을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고,
신작로처럼 널찍한 능선길을 잠시 따른다.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황암마을 방향 조망.
다시 숲길로 들어서니 쪽지봉(596.5봉) 오름길이 제법 가파르게 이어지고,
쪽지봉 갈림길에 도착한다.
쪽지봉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지역 산악회에서 붙여 놓은 듯한데, 그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쪽지봉(596.5봉) 정상 전경.
쪽지봉 정상에는 수준점이 설치되어 있다.
쪽지봉을 뒤로하고 쪽지봉 갈림길 삼거리로 돌아나와, 이정표의 "사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으로 염소목장 울타리가 나타나더니, 한 무리의 염소와 조우한다.
돌아본 쪽지봉 방향의 염소목장.
우측 염소목장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다가, 자그만 봉우리에서 울타리와 헤어져 정맥길은 좌측으로 급히 꺾여서 진행한다.
소나무숲 향기를 맡으며 편안한 한남금북길을 즐기며,
군데군데 핀 진달래의 다소곳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걷다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다음 구간 가야 할 보광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측으로 토종닭 농장 울타리를 만나고,
작은 돌탑이 있는 솔티재(송치재)를 지난다.
송치재는 괴산서 증평을 갈 때 방축리를 질러갈 수 있는 고개로,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괴산장을 보기 위해 많은 장꾼들이 넘나들던 고개라 한다. 솔티재의 돌탑들!
괴산군의 지명에 '느티나무/회나무 괴(槐)'자를 쓰는 연유가 있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 28년(606년)에 개잠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 찬덕은 백제 대군에게 포위되어 석달열흘을 버티었으나 식량이 떨어져 더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자, 끝내 항복하지 않고 큰 느티나무에 머리를 박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이 말을 전해 들은 태종무열왕이 찬덕을 기리리 위해 고을 이름에 괴자를 넣어 괴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측으로 농장 관리동이 내려다 보이더니 농장의 경계 울타리가 끝이 나고,
이어서 옛길 흔적이 있는 안부를 지나,
우측 수암리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고,
임도는 묘지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제 정맥길은 오늘의 목적지인 모래재를 향해 편안히 진행된다.
우측으로 통신탑이 있는 가족 묘역을 지나고,
등로는 모래재를 향해 내려간다.
돌아본 쪽지봉 방향.
능선 갈림길에서, 우측 지능선 내림길로도 표지기가 붙어있고(보광산 수련원 우회길), 좌측 길은 보광산 수련원 안쪽으로 이어진다.
철문을 통과하여 보광산 수련원 안으로 들어선다.
보광산 우련원 내부 전경.
이곳 보광산 관광농원은 한남금북정맥이 지나는 자리에 위치해있다. 옛부터 이곳에는 "빛과 바람"이 머문다는 신비의 땅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사슴의 언덕"이 있었다 한다. 항상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이곳에 조성된 산촌휴양형 수련원인 보광산관광농원은 직장연수, 가족모임, 학생MT 등 다양한 단체의 수련장으로 적합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수련원 내부는 다양한 건물들이 지어져 있고,
맨 위쪽에는 회의실로 사용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숙소로 사용되는 건물 모습.
수암리 쪽 조망.
수련원 입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어진 건물.
수련원에 조성된 잔디구장 건너편으로, 능선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오는 길이 보인다.
돌아본 수련원 내부 전경.
하루 전 백두들은 우회길로 내려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이곳에서 산행을 마치고 삼겹살 구워 먹었으면 좋지 싶은데..ㅉㅉ
수련원 내부의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 이정표.
제법 큰 규모의 수련원 내부를 통과하는데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수련원 입구 주차장에 차량은 있는데..ㅉㅉ
드뎌 오늘의 목적지인 모래재에 도착한다.
2014. 4. 13.(토) 11:39 백두들은 12시도 되지 않아 산행을 마쳤다.
<모래재> 모래재는 34번 국도상의 고개이며 증평과 괴산 중간 지점에 있고, 증평과 괴산을 오가는 버스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좋다. 보광산 관광농원이 있고 농원 입구에는 '모래재 의병격전 전적비'가 있다. 모래재 의병 격전 유적비.
<모래재 의병격전 유적비> 이 유적비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를 주축으로 모래재에서 일어난 항일구국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한봉수 선생은 1883년 4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동년 8월(음)에 의병장 김규환(金奎煥)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일본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맹활약하였다.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를 조직하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오근장(梧根場) 부근에서 일본 헌병 대위 도기선치(島崎善治)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일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국장에 즈음하여 홍명희․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주도하였고,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모래재 괴산 방향.
모래재 증평 방향과 들머리(보광산 방향)
다음 구간 가게 될 보광산 방향.
보광산 들머리를 확인하고 모래재로 다시 돌아나와,
모래재에서 증평 택시를 불러 아침에 차량을 주차해 놓은 증평역으로 돌아와 귀가 길에 올랐다.
어제 백두들은 이곳에서 땀을 닦고,
지난번에 들렀던 왕만두 집에서 산행의 피로를 풀었다.
어제 정기산행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양재에서 진행된 2차 뒤풀이에 함께했다.
홀로하는 산행이 나름 또다른 맛을 느끼게 했지만, 누군가에게 권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의 삶은 늘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받고 또 주고 하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여럿이 하는 산행이 훨씬 재미있고, 안전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가급적 백두들과 함께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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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산행기 넘 잘 봤습니다,
맞아요. 저도 지난번 천안구간 땜방하고 함께 하는게 얼마나 좋은지 알았어요.
늘 고생하시고 감사드립니다.
유유자적, 여유만만해 보이시네요~사색과 함께 하셨을 혼자만의 여유로운 산행길~멋지세요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