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넬리
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신록의 계절 6월이 되었다. 들판에는 모심기가 한창이고 벼는 심는 즉시 잘도 자란다. 개구리도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 나타났는지 우렁차게 노래하고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감 있고, 나를 동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예쁜 새소리와 힘찬 매미 소리도 듣기 좋지만, 나는 개구리 소리를 유독 좋아한다. 새소리가 우아한 플루트 소리라면, 매미 소리는 우렁찬 트럼펫 소리 같고, 개구리 소리는 정감 있는 첼로 소리 같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면 곡식들은 무럭무럭 자라 가을 추수를 기다릴 것이다. 예전에는 벼가 고개를 숙일 때쯤이면 메뚜기가 창궐했다. 내가 대여섯 살 무렵, 아버지는 종종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으셨다. 준비물은 빈 음료수병 몇 개면 족하였고, 메뚜기를 잡아 병 속으로 쑥쑥 넣으셨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우리도 열심히 메뚜기를 잡았다.
메뚜기잡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껴 놓았던 원기소를 몇 알씩 나누어 주셨다. 마치 운동회에서 입상하고 받는 상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원기소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고소한 맛이었다. 영양제라는 본래의 기능보다는 그냥 달콤한 사탕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서도 가장 맛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원기소의 유혹에 이끌려 늘 메뚜기잡이를 기다리곤 했다.
음악가들에게 최고의 원기소는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아닐까 싶다. 사실 연주자들은 음악회를 앞두면 나름 힘든 연습도 해야 하고, 무대의 긴장감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연주한다. 다행히 큰 실수 없이 무사히 연주를 마치고 나면, 객석에서 들려오는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그동안의 모든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준다. 과정의 힘듦은 눈 녹듯 사라지고 뿌듯한 보람만 남는다. 그렇게 박수 소리는 음악가들에게 원기소가 되어 다음 연주를 준비할 의욕과 힘을 준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특별한 가수들이 존재했다. 그때 합창 편성은 여성은 배제하고 남성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프라노 음역들은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들이 주로 맡았다. 나중에는 아예 소년을 거세해서 변성기를 거치지 않게 하여 평생 높은 음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들을 이름하여 ‘카스트라토'라고 부른다. 당시 유럽에는 수천 명의 카스트라토가 활동했고 이들은 합창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주인공 역할도 도맡았다. 그 시절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파리넬리(1705~1782년)이다. 본명은 카를로 마리아 미켈란젤로 니콜라 브로스키이며 역사상 최고의 카스트라토이다. <파리넬리>라는 영화 속에서 그는 당시 최고의 기교를 자랑하던 트럼펫 연주자와도 베틀을 하여 그를 항복하게 하였는데 이는 트럼펫의 어려운 기교도 노래로 다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으며 높은 음역(하이 C)과 최고의 기교를 자랑했다. 오랫동안 큰 성공을 거두어 부와 명성을 누렸으나 남자로서의 모호한 정체성으로 인해 어느 여인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줄 수가 없었기에 깊은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파레넬리>라는 영화도 인기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영화 속에서 파리넬리가 불렀던 ‘울게 하소서’ 라는 노래가 더 유명하다. 이 노래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나오는 아리아로 음악 교과서에도 실리고 많은 가수도 즐겨 부르고 있다. 파리넬리의 노래를 들으면 이 소리가 남자의 소리인지, 여자의 소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소리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이 소리에 열광했다.
'카스트라토' 제도는 베토벤이 활동했던 고전파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인격체를 물리적으로 거세를 한다는 것이 매우 비인격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더는 유지되지 않고 있다. 다만 지금은 카스트라토와 유사한 소리를 내는 ‘카운터 테너’가 있다. 이는 남성을 거세하지 않고 오직 발성 훈련만으로 그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성악가를 말한다.
파리넬리는 음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정체성이 모호한 고뇌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음악회장에서 울려 퍼지는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그를 무대에 다시 서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누군가의 따뜻한 격려와 박수 소리가 원기소가 되어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