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無上正覺]
곧 佛性을 正見하여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證得하느니라.
불성을 정확히 보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
반드시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證得하여서 佛性을 正見함을 얻느니라.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야 불성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無上正覺], 또는 위없이 바르고 넓은 지혜[無上正遍知] 등으로 번역된다. ‘바른 깨달음’의 내용이 ‘바르고 넓은 지혜’이므로 같은 의미이다. 이 무상정각인 정변지를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 목표이다. 견성을 하면 정각을 얻고, 정각을 얻으면 견성을 한다 함은 견성이 정각이고 정각이 견성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이 곧 무상정각이며 성불이다.
我性 즉 佛性은 三世如來의 窮極秘密의 寶藏이니 만약에 無上正覺을 성취하면 我性을 圓證明知하느니라.
나의 본성 즉 불성은 삼세 여래의 궁극의 비밀 보배창고이니, 만약 무상정각을 성취하면 나의 본성을 원만히 깨쳐서 분명히 알게 된다.
정각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즉 성불하지 않고서는 본성을 바로 볼 수 없으니 성불이 곧 견성이다. 견성이 성불이고 성불이 견성임은 부처님 말씀이며 영산회상에서 정통으로 전한 것이다. 이는 견성이 원증돈증의 깨침, 즉 구경각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증이나 해오를 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의 잘못된 견해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衆生들이 無量한 煩惱妄想의 覆蔽(부패)한 바 되어 自己心中의 佛性을 알지 못한다. 만약에 煩惱가 滅盡한 때에는 佛性을 證得하여 分明了知하되, 저 力士가 明鏡中에서 額上의 無價寶珠를 明見함과 같느니라.
이 모든 중생들이 한없는 번뇌망상에 덮여 자기 마음속의 불성을 알지 못한다. 번뇌가 다 없어진 때에는 마치 저 힘센 장사가 거울 속에서 이마 위의 보배구슬을 밝게 보는 것과 같이 불성을 증득하여 분명히 안다.
극히 미세한 망상인 3세까지 남김없이 없어지면 자연히 구경무심에 도달하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이다.
諸佛如來는 一切衆生에게 良醫와 같아서 모든 煩惱의 體相差別을 悉知하여 이 煩惱를 斷滅除去하여, 如來의 비밀한 寶藏中에 있는 淸淨無垢한 佛性이 永劫토록 常住하여 절대로 不變함을 開示하느니라.
모든 여래는 일체 중생에게 좋은 의사와 같아서 갖가지로 다른 번뇌의 근본과 모양을 모두 알아서 이 번뇌를 끊어 없애고, 여래의 비밀 보배창고에 있는 청정무구한 불성이 영겁토록 상주하여 절대로 변함 없음을 열어 보인다.
여래의 신비한 처방과 법약이 아니면 중생들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참보배인 자기 마음의 부처, 즉 불성을 어찌 볼 수 있으리요. 그 자비의 큰 은혜는 분골쇄신하여도 다 갚지 못한다.
佛性은 衆生이 本有한 것이요 造作한 法이 아니다. 다만 煩惱인 客塵에 覆蔽되어 있을 뿐이니, 만약에 그 煩惱를 斷除하면 즉시에 佛性을 明見하여 無上大道를 성취하느니라.
불성은 중생이 본래 가진 것이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다만 번뇌인 객지에 덮여 있을 뿐이니, 그 번뇌만 끊어 없앨 수 있으면 즉시 불성을 분명히 보아 무상대도를 성취한다.
무상정각은 중생의 한없는 번뇌망상을 끊어 없애고 본래 가지고 있는 청정한 자성을 철저히 보는 데 있다. 이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만세불변의 대원칙이다.
一人의 衆生도 如來의 智慧인 佛性을 具有하지 않은 者 없지마는, 妄想으로 생긴 顚倒(전도)에 집착하여 이것을 證得하지 못한다. 만약에 妄想을 離脫하면, 自性에 具有되어 있는 一切의 自然智와 無碍智가 卽時에 現前하느니라.
어느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인 불성을 갖고 있지 않은 이가 없지만, 망상으로 전도되고 집착하여 이를 증득하지 못한다. 만약 망상만 떠난다면 자기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일체의 자연지와 무애지가 그 자리에서 나타난다.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여래의 지혜는 곧 진여불성이다. 모든 망념이 다 끊어지면 이것이 견성이며 무상정각이다.
如來가 言明하였다. 神奇하고도 神奇하다. 一切衆生이 모두 一切智者인 如來의 智慧를 具備하고 있거늘 愚痴하고 迷惑하여 不知하며 不見하는도다. 내가 당연히 聖道로써 敎導하여 그 障蔽物인 妄想執著을 영원히 離脫케 하여 衆生의 自身中에서 廣大無邊한 智見을 體得하여 獨尊無比한 佛陀와 차이가 없게 하리라.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다. 일체 중생이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나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땅히 성인의 도로써 가르쳐서 장애물인 망상과 집착을 영원히 떠나게 하리라. 그리하여 중생이 자기 몸 가운데서 광대무변한 일체지[智見]를 체득하여 비할 수 없이 존귀한 부처님과 차이가 없게 하리라.
「열반경」과 「화엄경」의 두 경전에서 모든 중생이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다고 밝힌 것은 인간이 본래 갖는 참다운 가치, 즉 절대성을 밝혀준 유사이래의 일대선언이다.
이로써 인간은 본래 갖추고 있는 절대성을 개발하여 위없는 도를 성취하는 영원한 살길을 얻게 되었다. 만일 부처님께서 걸림 없는 큰 지혜로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분명히 보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중생들은 영영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장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은 그 목적이 불성을 개발하는 데 있으므로 단지 언어문자 익히는 것을 불교라고 여긴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모든 阿羅漢은 佛性을 不見하였으니, 佛性을 不見한 故로 無上正覺 즉 阿耨菩提(아누보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모든 아라한은 불성을 보지 못하였다. 불성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무상정각, 즉 아뇩보리를 얻지 못하였다.
소승 최고의 과위, 무학지인 아라한은 유여열반으로서 불성을 본 것이 아니므로 정각을 얻지 못하였다. 아라한뿐 아니라 범부나 성인을 막론하고 불성을 보지 못하면 정각을 얻은 것이 아니고 성불한 것이 아니다.
地位가 최후인 第十地에 도달한 大菩薩도 오히려 佛性을 明了히 知見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聲聞緣覺들이 能히 正見하리오.
보살 지위의 마지막인 제10지에 도달한 보살도 오히려 불성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성문과 연각이 바로 볼 수 있겠는가.
‘10지성인은 구름 일듯 빗발치듯 설법은 하지만 견성을 하는 데는 얇은 비단을 가리고 보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렇게 종문의 정안종사들은 10지대성도 견성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꾸짖었다. 또한 ‘3현도 선문의 종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데 10성인들이 어찌 조사 선종에 도달하겠는가’ 하였으니 견성을 근본으로 하는 선종의 깊은 종지에서는 3현은 말할 것도 없고 십지의 성인도 문외한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이것은 10지성인도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諸佛如來와 十住菩薩은 兩眼으로 佛性을 보고, 九地에 이르기까지는 傳聞으로 佛性을 보느니라.
모든 부처님과 10주보살은 두 눈으로 불성을 보고, 9지까지는 전해 듣는 것으로 불성을 본다.
九地 以下는 耳聞으로 佛性을 보고 十地는 兩眼으로 보나 明了하지 못하고, 如來의 佛眼이라사 了了明明히 窮盡하느니라.
9지 이하는 귀로 들음으로써 불성을 보고 10지는 두 눈으로 보지만 분명하지 못하고, 여래의 부처 눈[佛眼]이라야 끝까지 분명하게 본다.
10주(十住)는 3현의 첫 단계요, 9지(九地)는 10성의 앞 단계이다. 그런데 10주는 눈으로 보고 9지는 귀로 듣는다 하니 앞뒤가 뒤바뀐 듯하지만, 여기 「열반경」에서 말하는 10주는 3현의 10주가 아니고 10지의 다른 명칭이다.
몇 가지 다른 경론에서도 10지(十地)를 10주(十住)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천태종의 2조인 관정(灌頂)도 주(住)와 지(地)가 다르지 않다, 즉 10주와 10지가 다르지 않다(이 글에서 주(住)라고도 하고 지(地)라고도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주와 지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十地菩薩이 비록 佛性을 보나 明了치 못하느니라.
10지보살은 불성을 보기는 하나, 분명히 알지는 못한다.
十住菩薩은 佛性이 있음을 아나 暗夜의 所見과 같고, 諸佛如來는 또한 보며 또한 아느니라.
10주보살은 불성이 있는 줄은 알지만 어두운 밤에 보는 것과 같고 모든 부처님은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한다.
十住菩薩의 所見한 佛性은 黑夜에 色彩를 봄과 같고, 如來의 所見은 白晝에 色像을 봄과 같느니라.
10주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은 어두운 밤에 색채를 보는 것과 같고, 여래가 보는 것은 대낮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十住菩薩은 智慧力이 많고 三昧力이 적으므로 佛性을 明見치 못하느니라.
10주보살은 지혜의 힘이 많고 삼매의 힘이 적으므로 불성을 분명히 보지 못한다.
十住菩薩은 佛性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涅槃이라 이름하고 大涅槃이 아니니라.
10주보살은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열반이라고만 부르고 대열반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십주(十住)는 십지(十地)를 말한다. 십지에서 불성을 보는 것은 어두운 밤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했으니 캄캄한 밤중에 물건을 보는 것은 정견이 아니며 여래처럼 대낮에 물건을 보아야 정견이랄 수 있다. 그러므로 10지보살도 불성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여래지위라야 비로소 불성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위에서 말한 ‘열반’이란 유여열반이요, 대열반이란 무여열반이다.
모든 善男子들의 所有한 佛性은 이렇게 지극히 深玄하여 正知明見하기 심히 어려우니, 오직 正覺한 佛陀만이 이를 能히 알 수 있느니라.
모든 선남자가 갖고 있는 불성은 이처럼 지극히 깊어서 바로 알고 분명히 보기가 무척 어려우니, 오직 바로 깨달은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이렇게 佛性은 오직 佛陀만이 能히 아느니라.
이처럼 불성은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불성은 곧 여래인 모든 부처님의 경계이니, 부처님 이외에는 모두 바로 알고 바로 보지 못함은 당연한 결론이다.
諸佛如來만이 分明了了히 佛性을 볼 수 있느니라.
모든 부처님만이 분명하게 불성을 볼 수 있다.
佛眼으로 보므로 明明了了하니라.
부처의 눈[佛眼]으로 보기 때문에 분명하게 안다.
佛性을 分明히 보므로 明行足이라 하느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시므로 밝음과 행함이 완전한 분[明行足]이라 한다.
무명의 어두운 굴을 타파하고, 긴 밤의 혼미한 꿈에서 깨어나서 밝은 대낮같이 환히 비추어야만 참 성품을 바로 본다. 십지성인이라도 미세한 무명이 바른 안목을 가려서 어두운 밤에 물건을 보듯 꿈속의 미망에 있으므로, 정각이 아니며 견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뇩보리, 즉 무상정각을 성취해야 불성을 바로 본다는 불조정전의 철칙에 따라, 구경무심인 불지 외에는 단연코 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견성이 이렇게도 어려우므로, 부처님 이후로 견성하여 도를 깨친 이가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경각인 견성은 중생의 근본무명, 즉 제8 아뢰야의 미세망상을 완전히 끊기만 하면 된다.
중생의 부처성품은 불가사의하여서, 부처와 조사의 훌륭한 가르침에 따라 실답게 수행하면 5역10악의 극중죄를 지은 사람도 이 생에서 견성할 수 있다고 부처와 조사가 다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함은 이를 말함이니, 오직 당사자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선문의 정안종사들 가운데 아뢰야의 미세망상을 완전히 끊어서 구경 무심지에 이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종문에서는 미세망상을 제8 마계라 하여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극력으로 배척하였고, 제8 마계인 근본무명을 타파해야만 바른 안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한다. 불조의 혜명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諸佛世尊은 雙眼으로 佛性을 洞見하되 掌中에 阿摩勒果(아마륵과)를 보는 것과 같느니라.
모든 부처님은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두 눈으로 불성을 분명히 본다.
諸佛世尊은 佛性을 了見하되 掌中의 阿摩勒果를 봄과 같느니라.
모든 부처님은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불성을 분명히 본다.
諸佛世尊은 定과 慧를 等持하므로 佛性을 明見하여 了了히 障碍가 없어서 菴摩勒果를 봄과 같느니라.
모든 부처님은 정(定)과 혜(慧)를 균등히 지니므로 마치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아무 걸림 없이 불성을 분명히 본다.
정(定)과 혜(慧)가 균등한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 있는 여래의 지위가 아니면 불성을 분명히 보지 못하니, 견성이 곧 성불이며 무상정각이다.
大覺如來가 大涅槃에 들어가느니라.
크게 깨달으신 여래께서 대열반에 들어간다.
이 大涅槃은 곧 諸佛世尊의 甚深(심심)한 禪定이니라.
이 대열반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선정이다.
만약에 佛性을 正見하면 능히 煩惱를 斷盡하나니 이를 大涅槃이라 하느니라.
불성을 바로 보면 번뇌를 완전히 끊을 수 있으니, 이것을 대열반이라 한다.
만약에 了了히 佛性을 正見하면 大涅槃이라 하는지라, 이 大涅槃은 오직 大象王이 능히 그 深底를 窮盡하나니 大象王은 諸佛을 말함이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면 그것을 대열반이라 한다. 이 대열반은 큰 코끼리왕만이 그 밑바닥에 닿을 수 있는데, 큰 코끼리왕이란 모든 부처님을 말한다.
衆生의 佛性은 諸佛의 境界니, 佛性을 正見한 故로 生死를 解脫하여 大涅槃을 얻느니라.
중생의 불성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다. 그러므로 불성을 바로 보아 생사를 벗어나 대열반을 얻는다.
모든 부처님의 깊은 선정인 대열반, 즉 무여열반은 불성을 바로 보아야만 성취된다. 이것은 견성이 곧 여래이며 대열반이기 때문이다.
「涅槃經」에서 말하기를 金剛不壞(금강불괴)의 無盡寶藏이 增減과 欠缺(흠결)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圓敎라 하느니라.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금강같이 단단한 한없는 보배창고는 증감이나 결함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원교(圓敎)라 한다.
지자(智者)대사는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등을 원교(圓敎)라고 판정하였다.
「열반경」은 여래가 마지막에 하신 궁극의 설법이므로 원교(圓敎)라 한 것이며, 증득하신 불과는 원교인 가장 높은 지위로서 무여열반이다.
다시 願하노니 모든 衆生들이 一切煩惱를 영원히 破滅하여 了了히 佛性을 正見하되 文殊菩薩等과 같게 하여지이다.
다시 원하노니, 모든 중생이 문수보살 등처럼 온갖 번뇌를 영원히 부수고 불성을 분명하고 바르게 보게 하여지이다..
文殊師利와 모든 菩薩들이 이미 無量世에 聖道를 修習하여 佛性을 了了明知하느니라.
문수보살과 모든 보살은 이미 무한한 세월에 성스런 도를 닦아서 불성을 분명히 알았다.
무상정각을 이룬 여래위, 즉 부처 자리[佛地]만이 분명하게 불성을 본다 함이 부처님의 혜명이다. 문수보살이 분명하게 불성을 보았다고 하는 이유는, 문수는 이미 부처가 되고서 방편상 출현한 보살이기 때문이다. 즉 문수는 모든 번뇌를 영원히 부수어 이미 정각을 이루고서, 과거에 용종상여래, 대신여래, 보상여래, 환희장마니보적여래 등으로 출현한 대력보살이므로, 분명하게 불성을 본 분이다. 문수 이외에 ‘모든 보살들’이라고 말한 것도 문수와 같은 큰 힘을 갖춘 보살을 가리킨다.
어떤 것이 了了見인고. 사람이 스스로 掌中의 阿摩勒果를 보는 것과 같아서, 無上道와 菩提와 涅槃은 오직 如來만이 완전히 了知明見正覺하나니 모든 菩薩들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무엇을 ‘분명히 본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자기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보는 것이다. 위없는 도와 보리와 열반은 오직 여래만이 분명히 알고 밝게 보고 바르게 깨달으며 모든 보살들도 그러하다.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분명히 보는 것처럼 불성을 분명히 보는 것은 오직 부처님뿐이라 함은 세존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이다. 여기에서 ‘여러 보살들’이라고 말한 것은 문수보살과 같은 큰 힘을 갖춘 보살이다.
阿耨菩提와 大般涅槃을 만약에 了知明見正覺하면, 마땅히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아뇩보리와 대열반을 만약 분명히 알고 밝게 보고 바르게 깨달으면 그를 보살이라 해야 한다.
무상정각인 아뇩보리와 여러 부처님의 깊은 선정인 대열반을 알고 보면 부처 지위인 여래다. 여기서 ‘보살’이라고 이름한 것은 큰 힘을 갖추고[大力] 방편으로 나타난[權現] 깨친 후의 보살임은 의심할 수 없다.
만약에 佛性을 知見覺한 者라면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불성을 알고 보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보살이라 부른다.
佛性을 明見하면 이를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면 그를 보살이라 한다.
解脫을 얻은 故로 佛性을 보며 佛性을 보므로 大涅槃을 얻나니, 이는 菩薩의 淸淨持戒니라.
해탈을 얻으므로 불성을 보며, 불성을 보므로 대열반을 얻으니, 이는 보살이 청정하게 지니는 계(戒)이다.
여기서 말한 보살도 불성을 분명히 본 대열반의 보살로서 큰 힘을 가진 대력보살이다.
大般涅槃은 오직 佛과 菩薩의 所見이니, 그러므로 大涅槃이라 하느니라.
대열반은 부처님과 보살만 보므로 그것을 대열반이라 한다.
불과를 이룬 여래만이 대열반을 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보살’도 십지까지의 지상(地上)보살이 아니고, 불과를 이루고 큰 힘을 가진 보살임은 다시 말할 것 없다.
佛世尊을 大沙門이라 大婆羅門이라 하느니라.
부처님인 세존을 큰 사문 또는 큰 바라문이라 부른다.
大身衆生이라 함은 佛陀와 大力菩薩이니, 無上大智慧인 故로 大衆生이라 하느니라.
몸이 큰 중생[大身衆生]이란 모든 부처님과 대력보살이다. 위없이 큰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큰 중생이라 한다.
불과를 이룬 여래, 즉 바른 깨달음을 얻은 세존과 대력보살을 큰 바라문 또는 큰 중생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상 정각을 말함이지 실제로 바라문이나 중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부르든지 정각을 가리킴에는 변동이 없다.
이와 같이 불성을 분명하게 본 여래 세존을 방편상 보살이라고 표현하여도, 불성을 분명히 본 여래 세존임에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
眞解脫은 곧 如來요 如來는 곧 涅槃이요 涅槃은 곧 無盡이요 無盡은 곧 佛性이요 佛性은 곧 決定이요 決定은 곧 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참된 해탈은 여래요, 여래는 열반이요, 열반은 다함 없음이요, 다함 없음은 불성이요, 불성은 결정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해탈 ° 여래 ° 열반 ° 불성 및 아뇩보리는 체는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리하여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거나 불성을 분명히 보면 무상정각을 얻은 여래다.
佛陀가 말씀하셨다. 善男子들아, 因緣이 없으므로 無生이라 名稱하며, 無爲인 故로 無出이라 하고 造業이 없으므로 無作이라 이름한다. 妄結과 業賊을 破壞(파괴)하였으므로 安穩(안온)이라 하고, 모든 妄結의 業火가 永滅한 故로 滅度라 하며, 覺觀을 捨離하였으므로 涅槃이라 呼稱한다. 憒鬧(궤요)함을 遠離하였으므로 寂靜이라 하며, 生死를 永斷하였으므로 無病이라 하고, 一切가 空無하므로 無所有라 하나니, 菩薩이 이 深觀을 作得하였을 때 卽是에 佛性을 明了히 正見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인연이 없으므로 남이 없음[無生]이라 부르며, 함이 없으므로 나옴이 없음[無出]이라 하며, 업을 지음이 없으므로 지음 없음[無作]이라 하며, 번뇌와 업을 쳐부수므로 안온(安穩)이라 하며, 번뇌로 일어난 업의 불길이 영원히 꺼지므로 멸도(滅度)라 하며, 거칠고 섬세한 마음[覺觀]을 떠나므로 열반(涅槃)이라 하며, 시끄러움을 떠나므로 적정(寂靜)이라 하며, 나고 죽음을 영원히 끊으므로 병 없음[無病]이라 하며, 일체가 텅 비었으므로 있는 바 없음[無所有]이라 한다. 선남자여! 보살이 이 깊은 관(觀)을 지을 때 불성을 분명하게 본다.”
무생, 무위, 열반, 무병 등은 명칭은 각각 다르나 여래께서 깨친 똑같은 내용이다. 즉 제8 아뢰야의 미세망상을 영원히 끊고 구경의 대무심지에 도달한 깊고 깊은 경지를 표현하는 명칭들이다.
그리하여 고요함[寂]과 비춤[照]이 융통하며 선정[定]과 지혜[慧]가 균등하게 되는 이 구경의 삼매에서만 견성이며 성불이다. 어느 부처님이든 정안종사든 무생과 무위 등을 철저하게 깨치지 않고서는 견성하거나 도(道)를 이룬 분은 없었다.
「대열반경」에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 ‘번뇌를 완전히 끊음’, ‘번뇌를 끊어 없앰’, ‘번뇌를 영원히 깨뜨림’ 등을 견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번뇌’는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기신론」에서 “미세한 무명을 영원히 떠남을 심성을 본다고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0지보살도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으므로 견성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부처 지위에서만 영원히 번뇌를 깨뜨렸으므로 모든 부처님만이 견성이라 한 것이다. 이 미세한 번뇌를 멀리 떠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부처 지위에서의 견성을 무심°무념°무생°대열반°구경각°여래지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금의 불조가 이구동성으로 견성은 구경각인 무상정각이며, 무여열반인 대열반이며, 부처님임을 입이 아프도록 말씀하셨다. 이로써 견성이 원증돈증의 깨침[證悟], 즉 구경각인 대무심지임이 입증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수도하는 납자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남기신 법만 따를 뿐이요, 그밖에 이단의 잘못된 주장은 정법의 기치 아래 단연코 배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