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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즌 2 : EP.5-2
<월드뮤직의 시대>
탱고와 레게, 사물놀이와 렘베티카
16. 월드뮤직과 역사
사실 월드뮤직은 제가 모두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세계는 넓고 음악은 많은데, 어떻게 내가 다 그걸 알 수 있겠는가?
제가 외국에 가면, 하는 일은 딱 2개밖에 없다. 음식을 맛보는 것과 그 나라의 음악 CD를 사는 것이다. 보통 40~50장의 CD를 사오는데, 그걸 들어보면 정말 세계는 넓고, 음악은 너무 많다.
그래서 오늘은 어찌 보면 맛보기 수준도 아니고, 대충 이런 게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포인트로 월드뮤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월드뮤직을 이해하는 데 제일 큰 문제는 사실 언어다. 가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위대한 위키피디아와 좌파적 지식 공유의 철학이 점점 펼쳐나가서 폴리네시아 어로 된 노래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런 날이 오면, 우리가 조금더 월드뮤직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나중에 결론 삼아 이야기하겠지만, 월드뮤직이라고 말하는 음악은, 힘들고 못 사는 나라의 음악일수록, 그 나라의 구체적이고 가슴 아픈 민중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음악을 접하기도 힘들지만, 그 음악의 콘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슬로베니아 같은 유럽의 역사도 잘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 책도 구하기 어렵다.
월드뮤직은 언어, 역사, 문화 등등을 모두 알아야만 이해가 가능한 텍스트들이기 때문에, 사실 월드뮤직 전문가라고 해도,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의 지성인으로 세계의 모든 역사에 대해 충분한 사유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제대로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영역이다.
이렇게 말하면 다시는 월드뮤직 근처도 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17. 밥 말리와 웨일러스
90년이후 우리나라에 티셔츠 문화가 생기면서, 가슴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은 체 게바라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2번째가 밥 말리라고 생각한다.
밥 말리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김건모로 너무 친숙한 레게(Reggae) 음악이다. 사실 레게는 월드뮤직 중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유일하게 글로벌 뮤직의 한 장르로 정착한 최초이자 최후의 음악이다.
그리고 이 레게 뮤직이 세계화되는데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 있다면, 바로 레게의 사제(司祭)라고 불리우는 ‘밥 말리 앤드 더 웨일러스(Bob Marley & The Wailers)’일 것이다.
레게는 오늘 들은 음악 장르 중에서 여러분들도 유일하게 ‘내가 그 정도는 알지’라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이 음악만큼 대다수의 전세계인에게 오해 내지는 곡해 당하는 음악도 없을 것이다.
밥 말리는 1945년 2월 6일생이다. 자메이커(Jamaica) 안에서도 세인트 앤(St. Ann)이라는 아주 촌동네에서 태어났다. 세인트 앤이라는 동네를 한 마디로 요약한 문장이 너무 가슴 아프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
그래서 지금도 그곳에 가면, 60년전의 밥 말리와 같은 소년이 염소 떼를 몰고 내려오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세인트 앤이라는 곳이다.
나는 전 세계의 록밴드를 통털어서 최고의 록밴드 이름은 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더 웨일러스(The Wailers)다. 웨일러가 무슨 뜻인가? 울부짖다, 절규하다는 뜻이다. 밥 말리와 울부짖음들, 밥 말리와 절규들이라는 뜻이 된다. 이제 필이 확 오지 않는가?
밥 말리는 35세의 나이로 암으로 죽었다. 한창때 뇌종양이 발견되고, 그것이 그후 폐암으로 번졌는데도 피츠버그 공연을 마치고, 바로 죽었다.
그가 생전에 왜 그룹 이름을 웨일러(Wailers)냐고 어떤 기자가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성경을 보라. 모든 페이지에는 다 웨일러가 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절규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절규를 터트리면서 태어났다.’라고 자기 그룹의 이름을 설명했다.
어쩌면 ‘웨일러스’라는 이 이름 안에 사실 레게 음악의 본질이 숨어있다.
18. 레게와 자메이카의 역사
‘레게’라는 음악은 뭘까요?
한국에는 사실 1984년도에 이미 김중기라는 뮤지션에 의해서 레게 음악이 수입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93년 김건모가 ‘핑게’라는 노래로 더블플레티늄, 200만장을 팔면서 전국을 완전히 레게로 도배질하고, 모든 댄스 그룹들은 레게 음악을 자신의 음악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가에서는 레게바 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에게 레게 음악은 세련된 댄스 뮤직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맞다. 본질적으로 레게는 댄스 뮤직이다. 그런데 그냥 댄스뮤직이 아니다.
사실 레게 음악을 만든 사람은 밥 말리가 아니다.
레게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면, 아까 제가 얘기했듯이, 1960년대 말 자메이카라는 나라의 독특한 역사 사회적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레게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기는 사실 어렵다.
자메이카는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는데, 독립을 하긴 했지만, 개판 5분전인 역사가 마치 우리의 조국처럼 굉장히 오래 이어지게 된다.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있었다. 특히 극소수의 부자와 최악의 수준으로 살아야 하는 다수의 빈민층 사이에 발생하는 계급적 모순들, 그리고 모든 행정체계의 비민주적 성격들로 인해서 굉장히 오랫동안 내전에 가까운 상태를 이어가야 했다.
그래서 밥 말리는 조국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 생애 7, 8년간을 외국에서 활동해야 한다. 76년인가는 잠깐 들렀다가 총에 맞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81년 마이애미에서 숨진다. 자기 땅인 고향에 가서도 죽지 못한다. 죽어서야 그는 국장으로 자메이카에서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정도로 아주 험악한 단계를 거쳐야 했다.
19. 레게의 어원
레게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아무도 모른다. 마치 블루스나 재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처럼 아무도 모른다.
이건 무슨 이야기냐?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레게 역시 자메이카 밑바탕 계층의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레게(Reggae)라는 말을 음악 제목으로 처음 쓴 그룹은 웨일러스가 아니라, ‘투츠 앤 더 마이탈스(Toots & the Maytals)’라는 자메이카 그룹이었다. 처음 썼을 때는 레게(Reggae)가 아니라 레게이(Reggay)였다.
그래서 자마이카에서 레게를 하는 음악인들에게 레게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다 틀리다.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어원이 뭐냐하면, 레게라는 말은 규칙적인 리듬을 뜻하는 레귤러(Regular)의 사투리 발음에서 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니다. 레게는 스트레게(streggae)라는 자마이카 영어에서 왔다는 것인데, 스트레게는 ‘울퉁불퉁한, 자기 멋대로인, 과격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 스트레게한 음악적 특정 때문에 레게라는 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둘 다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20. 밥 말리
이런 어원을 갖고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월드뮤직의 실세로서 레게를 전 세계인의 것으로 만든 인물은 바로 밥 말리라는 인물이다.
밥 말리는 45년에서 태어나서 81년에 죽었으므로 모차르트랑 같은 나이에 죽었다. 밥 말리가 자기 생애동안 음반 판매을 통해 전세계에서 올린 수익은 그 당시 돈으로 1억 9천만달러이었다고 한다. 지금 화폐가치로 생각한다면, 70년대 10년간 1억 9천만달러의 판매량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런데 밥 말리는 1963년 18살 때 자메이카 차트 1위를 하는데, 그가 낸 음반들이 로컬에서 1등을 할 때도 밥 말리는 자메이카의 수도인 킹스턴에 자기 몸을 눕힐 방이 하나 없었다.
왜냐하면 밥 말리는 마피아나 다름없는 음반사 자본의 노예였다. ‘우리 판이 많이 팔린 거 같은데, 우리 개런티는 안 주나요?’라고 하면,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면서 ‘이거 총알이 들었나?’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깡패들을 동원해서 마구 패는 상황이었다.
왜 그런 것이 가능했냐 하면, 자메이카 도시 빈민가 소년들의 유일한 꿈은 뮤지션이 되거나 축구선수가 되는 것 뿐이었다.
실제로 밥 말리도 축구을 무척 잘했다. 암 판정을 받기 전 날까지도 공을 찼다.
그랬기 때문에 킹스턴의 허름한 레코드 스튜디어 앞에는 매일 거지꼴의 소년들이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수 백명씩 몰려 들었다. ‘너 아니면 사람 없냐?’ 이런 상황이어서 밥 말리 역시 그런 대우를 받았다.
웨일러스의 위대한 트리오 밥 말리, 버니 리빙스톤(Bunny Livingston), 피터 토시(Peter Tosh) 3명이 자메이커 차트 1위를 했을 때, 받은 총 금액은 50파운드였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였다.
Bunny Livingston
Peter Tosh
그렇게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밥 말리는 나중에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기 전까지 미국에 가서 돈을 벌어야 했다. 자기를 낳은 엄마가 자마이카계 미국인과 재혼해서 미국의 윌밍턴(Wilmington)이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 공장에서 일하고, 듀퐁 화학 회사에서 청소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자국에서 슈퍼스타가 되고 난 뒤에도, 미국에 가서 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음악을 해보려다가 돈을 모두 날리기도 한다.
돈이 떨어지면, ‘버니, 피터. 잠깐만 기다려. 돈 벌어 올게.’ 이러고 미국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와서 다시 음악을 했던 것이다. 버니와 피터는 미국에 가고 싶어도 연고가 없어서 갈 수가 없었다.
밥 말리가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기 전까지, 자메이카에서 슈퍼스타였을 때도 그들은 루드보이(Rudeboy)였다. 부랑아들이었다. 이 대문자 R을 쓰는 루드보이(Rudeboy)야말로 레게 음악의 첫 번째 물질적 조건이었다.
21. 밥 말리와 음악
밥 말리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영국계 자마이카 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인이었다. 자메이카 군대 육군 대위였던 50살 먹은 백인이 18살짜리 자메이카계 흑인 소녀와 결혼을 한다.
그런데 이 아버지 집안이 꽤나 뼈대있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흑인 며느리를 집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린 부인을 사랑한 건 사실이지만 같이 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혼하고 애까지 태어나면서 밥 말리의 할머니는 유언장에서 자식의 상속권을 지워버린다. 우리로 치면 호적을 파버린 것이다.
그래서 밥 말리의 아버지는 진짜 거지가 되어서, 군인 월급으로만 먹고 살아야 했다.
몇 달에 한 번씩 자식을 보러 왔던 밥 말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6살이 되었을 때, 자기가 살고 있던 자메이커의 수도인 킹스턴으로 아들만 데리고 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와 같이 산 게 아니었다. 자기는 군대에 메어 있고, 본가에 맡길 수도 없으니까, 혈연 관계도 없는 어떤 할머니의 양자로 자기 아들을 보낸다. 왜냐? 이 할머니가 죽으면 작은 재산이라도 자기 아들이 물려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밥 말리의 어머니는 2년 동안 아들한테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으니깐, 결국 자기 아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결국 아들을 찾았는데, 아버지는 온데간데 없고, 왠 할머니가 자기 아들을 먹여 키우고 있는 거였다.
사실 밥 말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밥 말리가 10살 되는 해에 아버지는 죽는다. 그래서 밥 말리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버림 받았다는 무의식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자기 고향인 세인트 앤에서 성장하다가 초등학교 졸업 후, 단신으로 킹스턴으로 간다. 당시 그의 엄마는 먼저 킹스턴에서 식모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킹스턴(Kingston)에서 생활한 곳은 트렌치 타운(Trench Town)이라는 곳이었다. 밥 말리의 레게를 낳은 이곳은 킹스턴 중에서도 최악의 빈민 지역이었다.
Trench Town
트렌치 타운(Trench Town)의 트렌치는 참호라는 뜻이다. 바바리 코트를 트렌치 코트라고 하는 것도, 1차 세계대전 때 군인들이 참호에서 군복으로 입었던 게 바바리가 된 것이다. 즉 동네 이름이 '참호동'이었다.
트렌치 타운에서 밥 말리가 겪어야 했던 삶의 조건은 정말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최악이었다. 그야말로 도시 빈민의 모든 힘든 여건을 다 경험한다. 밥 말리는 그렇게 험한 동네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그 동네에 조 힉스(Joe Higgs)라고 하는 스카(Ska) 뮤지션이 있었다. 스카는 1950년대에서 60년대 자메이카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댄스 뮤직이다. 지금 우리나라 홍대 앞에도 스카 밴드들이 많다. 그러니깐 레게 전의 자매이카 댄스 뮤직이다.
Joe Higgs
그런데 이 조 힉스라는 사람은 나름 굉장히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당대의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낳고 키운 트렌치 타운을 떠나지 않고, 레슨비 한 푼 받지 않고, 음악적 재능이 있는 트렌치 타운의 아무런 전망이 없는 루드보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부랑아들을 매일 오후에 자기 집 대문을 열어놓고 오는 데로 받아서 레슨을 헸다. ‘너하고 너는 팀을 해.’ ‘너희 둘이 화음 맞춰봐.’ ‘너는 그만 해라.’ 마치 SM의 연습생을 가르치듯 한 거다.
거기서 밥 말리는 그의 평생 동지가 되는 버니 리빙스턴, 피터 토시를 만나게 된다. 특히 버니 리빙스턴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버니는 편부의 아들이었고, 밥은 편모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부모들끼리 눈이 맞아서 여동생을 낳게 된다. 졸지에 친구인데 공동의 여동생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밥의 엄마가 또 자마이카계 미국인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밥 말리는 레게의 핵심이 되는 종교의 교리이자, 혁명의 노선인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에 빠져든다.
자마이카 뿐만 아니라 서인도 제도 전체를 휩쓸었던 혁명적인 종교의 교리이자 노선인 라스타파리아니즘이 성숙해 가는 과정이 결국 레게의 탄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22. 레게의 성격
자메이칸 사람들은 가난해서 놀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춤추는 게 이들의 유일한 오락이었다. 당시 가장 대중적인 오락물로 뮤직 시스템이라는 게 있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노천 나이트였다. 매일 여는 것은 아니었고, 공터에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입장료로 아주 적은 돈을 받고, 몇 천명씩 모여서 밤새도록 춤추고 노는 것이었다.
왜냐? 자기 집에 판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깐, 이런 오락물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노천 나이트에서 인기를 얻으면, 스타가 되는 거였다.
이런 가운데 스카라는 댄스뮤직이 발전해서 60년대 중반이후가 되면, 록 스테디(Rock Steady)라는 장르로 발전해 간다.
스카와 록 스테디의 다른 점은, 스카는 좀 경박하고 빠르다면, 록 스테디는 똑같은 4박자 댄스뮤직이지만, 굉장히 중후하고 템포가 좀 느리다. 그렇지만 여전히 캐리비안 스타일의 화려한 브라스와 드럼만이 아닌 콩가와 같은 다양한 타악기들에 의한 퍼커션이 들어가는 그런 음악이었다.
스카에서 록 스테디로 진화하는 과정의 연장선 위에 드디어 정치 사회적인 이념이 이 음악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레게다.
음악적으로는 스카와 록 스테디로 오는 화려한 리듬적 장식들이 모두 걷어낸다. 그리고 록에서 제일 중요한 악기는 일렉트릭 기타였지만, 레게에서 제일 중요한 악기는 베이스가 된다. 레게는 베이스의 리듬 패턴이 전면적으로 나서면서 노래의 골격을 지배하는 음악이다.
우리가 오페라의 역사에서도 보았다시피, 초기 오페라의 주연은 테너와 소프라노였지만, 오페라가 리얼리즘을 획득해서 민중과 역사의 현실을 오페라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베이스가 주인공이 되는 오페라가 나오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베이스가 중심에 서게 된다. 서인도 제도의 흑인도 유럽의 백인과 마찬가지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낮은 음을 좋아하는 거 같다.
60년대 중반까지의 사진을 보면, 밥 말리의 비주얼은 깡 마르고, 흑백 혼혈에 뭔가 굉장히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머리 모양을 짧았다. 그리고 흑인들에게도 반은 백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한다.
그런데 마치 비틀즈가 히피즘을 받아들이면서 장발이 된 것처럼, 밥 말리도 라스타파리아니즘을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레게 파머라고 불리는 ‘드레드록스(dreadlocks)’로 머리 모양이 바뀐다.
그래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밥 말리의 엄마는 아들의 긴 머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23. 라스타파리아니즘
그럼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이 뭐냐?
아까 마커스 가비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람의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 갑자기 하나의 종교처럼 커지는 계기가 발생한다.
1930년 에디오피아에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세가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실제로 흑인 왕국이 생기고, 흑인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전부 백인들이 만든 성경의 요한 계시록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때,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해 왕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요한 계시록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무솔리니가 깨지고 왕좌에 복귀하는데, 그것도 요한 계시록에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서인도 제도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단지 아프리카에 진짜 흑인왕이 나왔을 뿐인데, 온갖 모순과 억압과 폭력 속에 노출되었던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 입장에선 드디어 자신들의 황제가 탄생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의 왕국을 건설하자! 흑인들의 나라를 만들자!’라는 흑인왕국론이 만들어지게 된다.
더 이상 ‘우리도 사람으로 취급해 줘!’라는 말을 하지 말고, ‘우리가 우리 왕국을 만들면 되잖아?’가 된 것이다.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은 '라스 타파리 마코넨(Ras Tafari Makonnen)'이라는 '하일레 셀라시에'의 본명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백인들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서 흑인 왕국을 건설하자는 혁명 전사를 라스타(Rasta)라고 한다. 이 라스타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아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밥 말리의 노래를 들으면, 라스타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드레드록스를 하고 있는 것은 ‘내가 라스타다! 나는 라스타파리즘의 신자다!’ 라는 뜻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순회 콘서트에서 끊임없이 투쟁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자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외친다. 그러니깐 사실 밥 말리는 뮤지션이기 이전에 실질적인 전사였다. 그래서 사실 미국에서도, 자기 고향에서도 ‘저 놈은 문제가 많아.’라고 찍히게 된다.
결국 이런 거대한 자기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체제 변혁의 힘이 빈민가의 가냘픈 흑백혼혈 부랑 소년에게 집약되게 들어갔고, 그것이 밥 말리라는 이름을 통해서 음악으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밥 말리의 노래는 간단하게 말하면 투쟁가이다. 흑인 독립 국가 건설 투쟁가이다. 70년대에 나온 그의 앨범 대부분은 선동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그가 78년 카야(Kaya)하는 앨범을 내는데 그건 조금 예술적인 앨범이었다. 투쟁적인 슬로건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드디어 돈 맛을 보더니 변심했구나.’라고 생각한 영국의 버진 지 기자가 ‘이제 투쟁에서 벗어나 예술을 추구하실려나 봐요?’ 그랬더니 밥 말리는 ‘나도 잠시 쉴 때가 있어야 된다. 나는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하다간 폭발할 거다.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쉬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앨범부터 다시 투쟁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의 마지막 앨범 타이틀은 업라이징(Uprising)이었다. 바로 ‘총궐기’가 이 사람의 마지막 앨범 타이틀이었다.
24. no woman, no cry
밥 말리의 노래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no woman no cry’이다. 사실 이 말은 밥 말리의 병상에서 한 마지막 말이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자기 엄마가 우니깐, 마지막 말이 울지 말라고 이말을 했다고 한다.
‘no woman no cry’이라는 제목은 ‘여자가 없으면 눈물이 없어’가 아니고 그냥 ‘여성들이여 울지 마세요.’라는 뜻이다.
이 노래는 정확하게 말하면 자메이카 판 민가협 사람한테 부르는 노래다. 여기서 우먼(woman)은 투쟁으로 자식을 잃은 엄마들이다. 바로 그런 여자에게바치는 노래다. 그러니깐 민주화 운동 유가족들에게 보내는 노래다.
그러니깐 이건 페니미즘 노래도 아니고, 러브 발라드도 아니다.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가진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엄마들을 위한 노래다. 엄마, 여동생들을 위한 노래다.
‘우리는 정부청사 뒤에서 불을 피우고, 사라져간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여성들이여 울지 마세요. 모든 것은 정의롭게 끝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후렴을 담고 있다.
사실 이 노래는 그의 노래 중에서 그나마 제일 달달한 노래다.
그 다음에 ‘Get up, Stand up’과 같은 노래는 모두 단결 투쟁가였다. 그래서 밥 말리의 노래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fight와 right였다. 그리고 제일 많이 쓰이는 표현은 get up이었다.
결국 레게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농촌에서 도시로 간 것이다. 모든 제3세계의 공통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레게 음악은 단순한 부랑아들의 폭동이 블랙파워 운동으로 진화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기독교에서 라스타파리아즘의 진화를 의미하고, 복종에서 투쟁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60년대와 70년대 카리브 해 흑인들의 거대한 역사적인 에너지와 수많은 희생들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개념이다.
25. 짐바브웨
그렇게 해서 마커스 가비의 말대로 아프리카가 전부 독립하고, 마지막 50번째로 독립한 나라가 바로 짐바브웨(Zimbabwe)였다.
밥 말리는 죽기 2년전인 79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에디오피아를 방문한다. 그때까지 에디오피아에 못 간 이유는 소말리아와 심한 내전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남쪽에서는 드디어 로디시아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이언 스미스(Ian Douglas Smith)가 정권 이양을 검토하고 있었다. 결국 백인 총독부가 물러나고,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ZANU)의 로버트 무가베 정부가 들어서면서 아프리카 말인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흑인 공화국을 만들게 된다.
짐바브웨는 1980년에 독립을 하는데, 바로 그해 전세계에 자국의 이름을 알리는 사고를 하나 친다. 바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짐바브웨 여자 하키 선수들이 금메달을 딴다. 그래서 ‘짐바부웨가 어디 있는 나라야?’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 나라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찰스 황태자가 쓸쓸하게 독립 선언을 승인하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돌아가고 있을 때, 밥 말리가 짐 바브웨에 도착했다고 한다.
밥 말리는 이디오피아에 있을 때, 짐바브웨의 독립을 촉구하는 노래를 썼는데, 그게 바로 ‘짐바브웨’라는 것이었다. 그 노래는 그의 앨범에 실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 노래가 짐바브웨의 국가(國歌)가 된다. 이것은 대중 음악가가 쓴 노래가 한 나라의 국가가 된 최초의 사례이다.
26. 프란츠 리스트
이 강의의 제목을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고 했지만, 서양의 음악사 안에도 월드뮤직이라는 개념의 존재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언제 들어왔을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보면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알르망드(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방드(Sarabande), 지그(Gigue)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게 모두 민속음악이다.
알르망드는 독일 농민들의 댄스 뮤직이었다. 쿠랑트는 프랑스, 사라방드는 스페인, 지그는 영국의 민속음악이다. 바흐는 평생 독일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지만, 여러 나라의 민속음악을 가지고 와서 이런 작품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깐 이미 바로크 시대인 17세기부터 각 지역 피지배계층들의 음악을 지배 계급의 음악 속으로 녹여넣어서 새롭게 세련화하는 작업이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변방의 음악들을 중심지로 끌어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은 서양 음악 사상 최초의 아이돌 스타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에 의해서였다.
물론 베토벤, 헨델도 스타였고 유명했다. 그런데 지금의 20세기적 개념으로 서양음악에서 나온 최초의 스타는 프란츠 리스트였다.
이 사람은 일단 잘생겼다. 그야말로 꽃미남이었고, 키도 컸다. 그 다음으로 입담이 좋았다. 그리고 완벽한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다. 이게 중요하다. 이게 없으면 앞의 것은 다 허당이다. 그냥 사기꾼이다. 그런데 그는 정말 거장적인 테크닉을 갖고 있었다.
요즘 피아노 연주회에 가면 청중과 피아노를 서로 직각으로 놓는다. 그런데 리스트 전까지만 해도 청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영화를 보면 모차르트 시대만 해도 피아니스트는 정면을 보고 연주한다.
그런데 피아노의 위치를 90도 돌려서 앉은 최초의 피아니스트가 리스트였다. 왜냐? 자신의 옆얼굴을 여자 관객들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코스모폴리탄이었다. 헝가리 출신의 오스트리아인이었는데, 활동 무대는 전 유럽이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살고, 영국에서도 살고, 파리에서도 살고, 독일에서도 살고,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살았다. 그리고 여자 관계도 복잡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신부가 된다.
그런데 리스트는 음악사에서 나중에 단순히 화려한 테크닉을 중시, 음악 자체를 피상적인 유혹에 빠뜨렸다는 점에서 굉장히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트는 음악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다. 그전까지 인간이 아닌 가축 수준에 있었던 계층들의 음악을 슬그머니 메인스트림의 한폭판으로 끌고 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찌질한 사람이 끌고 왔으면, 난리가 났을텐데, 워낙 유명한 사람이 끌고오니깐 대박이 난다.
마치 엘비스가 군복을 입었을 때, 밀리터리 룩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밀리터리 룩과 군바리 옷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리스트는 태생이 헝가리이다 보니깐, 그쪽의 음악을 가져와서 대박이 난다. 여러분이 아무리 클래식에 무식해도 ‘헝가리안 랩소디 No.2’는 알 거다. 사실 이 음악은 헝가리의 것이 아니다. 헝가리에 거주하던 집시들의 선율들을 가져와서 클래식의 형식 안에 살짝 집어넣은 것이다. 이건 정착해서 농민이 된 집시들의 문화 가운데 있던 차르다시(Czardas)라는 무곡(舞曲)을 가져와서 클래식 안에 집어 넣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실상 서양 음악의 순혈 백인주의가 19세기 중반에 붕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시의 음악은 사실상 굉장히 오랫동안 서구 역사의 주변으로 떠돌다가, 드디어 유럽 전체에서 음악 문화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27. 집시
나치 수용소에서 유태인만 죽은 게 아니었다. 히틀러는 집시를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약 40만명의 집시가 수용소에서 학살되었다.
집시를 표현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집시에겐 국경이 없다.’는 말이다. 집시는 전세계 어디에도 다 있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인과 달리 자기들의 언어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기록이 없다. 그래서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현재까지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집시들의 출발점은 인도 서북부의 라자스탄 지역이라고 본다.
거기서 점점 서진(西進)을 해서 아랍을 거치면서, 인도의 문화에 아랍의 문화를 넣고, 아나톨리아 반도, 터키를 지나서 동유럽에 들어간다.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감독의 ‘집시들의 시간’라는 죽이는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는 마케도니아에서 찍은 것이다.
그리고 집시들은 지금의 헝가리,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를 거점으로 성장하면서 한쪽은 러시아, 노르웨이, 스웨덴으로, 또 한쪽은 독일, 덴마크를 지나서 스페인까지 펼쳐나간다. 그리고 밑으로는 아프리카의 수단까지 내려간다.
사라사테(Sarasate)의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이라는 음악에서 지고이네르(Zigeuner)가 집시를 뜻한다. 그리고 라벨의 바이올린 곡 중에 치간느(Tzigane)라는 게 있는데, ‘치간느’는 프랑스 쪽의 집시를 말한다. 또한 스페인 쪽에서는 집시를 히타노(Gitano)라고 한다.
그럼 집시(Gypsy)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집시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미영중심주의의 세계관을 엿보게 한다.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설은 유럽에 집시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 영국인들이 이집트 인인줄 알고, Egyptian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e가 빠져서 집시가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어원이다.
아까 이들이 지나온 경로를 봤지만, 우리같은 동양인이 집시음악을 들으면 필이 온다. 왜냐하면 동양과 이슬람의 문화가 이 음악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뭔가 애절하고 동양적인 애수가 느껴진다. 보내드린 자료도 집시 가무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그리고 특히 집시들이 잘 다루었던 악기는, 동유럽에 정착한 집시들이 ‘집시들의 영혼’이라고 부른 바이올린이다. 그래서 ‘집시 바이올린’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동명(同名)의 영화도 만들어진다. 아무튼 집시 바이올린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집시들의 음악을 제일 잘 표현하는 악기가 바이올린이다.
그리고 집시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서, 동양적인 악기들이 유럽에 많이 퍼지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악기가 그리스, 불가리아, 알바니아 지방, 나아가서 러시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부주키(bouzouki)’라는 악기다. 그리스 음악에 자주 나오는 현악기다.
집시들의 이동 경로를 볼 때, 이 악기는 본래 아랍 악기다. 그런데 이 아랍 악기가 집시들의 이동을 통해서 퍼져 나간 것이다. 부주키 소리가 궁금한 사람은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라라의 테마’를 들어보기 바란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나오는 소리가 ‘부주키’다. 동유럽과 러시아 등 그리스 정교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부주키’라는 민속 악기는 이런 집시들의 이동 경로와 관련이 있다.
28. 안달루시아 집시
집시 중에서도 특히 스페인 남쪽의 안달루시아 지역에 정착한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 바로 플라멩코(flamenco)를 만들게 된다.
사실 플랑멩코는 유랑인들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안달루시아 지역은 15세기까지 사라센이 지배한 아랍 땅이었다. 그러니깐 ‘우릴 유랑인이라고 하다니.. 우린 본래부터 여기 주인이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좀 애매하다. 아무튼 1499년에 사라센이 물러나고 스페인 왕조가 다시 복귀한다.
그러니까 다른 지역의 집시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라서 무시하고, 천하게 취급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했지만, 이 지역의 집시는 그렇게 함부로 대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들에 대해 적의감(敵意)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지역 집시들은 유럽 집시 중에서도 진짜 애매한 스텐스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굉장히 불행한 무리였다.
29. 플라멩코의 어원
그래서 ‘플라멩고’의 어원도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두 가지 어원이 있는데, 하나는 네델란드와 스페인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안달루시아 쪽 집시들은 자기들이 스페인 땅에서 살아남고, 어떡하든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전쟁도 아닌데도 참전해서 열심히 싸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스페인 사람들과 똑같은 시민으로 대접받으려고 했다. 그 싸움에서 진짜로 많은 집시들이 죽었다. 그 때 플랑드르(Flandre) 지역에서 큰 공훈을 세웠다고 해서 플라멩코(Flamenco)라는 말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이 말은 어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생겨날 정도면, 이들이 스페인 사회에 동화해서, 최소한의 생존 환경을 만들려고 얼마나 몸부림쳤냐를 간접적으로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들의 생존 조건이 힘들었고, 사람답게 살려고 정말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라비아 어로 ‘농부’라는 뜻의 플라그(felag)와 ‘방랑자, 도망자’라는 뜻의 멩구(mengu)라는 말을 합쳐져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방랑을 하다가 농사를 짓고, 농사를 짓다가 다시 방랑을 한다는 뜻인데, 이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 거 같다.
30. 플라멩코의 구성과 성장
플라멩코는 정확히 말하면, 3개 장르의 하이브리드이다. 하나는 깐떼(Cante)라는 노래로 우리의 판소리와 비슷하다. 노래을 부르다가 말을 하고 다시 노래를 부른다. 다음에 춤, 그 다음에 기타 연주, 이 3개가 중심이 된다.
그러니깐 한 명의 예술인데 꼭 기타 반주가 있어야 되고, 가끔 캐스터네츠가 들어온다. 보통의 플랑멩코에서는 본인이 직접 캐스터네츠 연주를 한다. 따라서 기타 반주가 딸린 한 사람의 독무이면서 노래가 바로 플라멩코다.
노래, 춤, 기타 연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깐떼이다. 이 노래가 플랑멩코의 핵심이다. 이게 없으면 플랑멩코가 아니다.
정말 가혹한 조건에 처해 있던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문화인 플라멩코가 문화적 시민권을 얻는 데까지는 굉장히 엄청난 역사적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마치 리스트처럼 주류 사회의 구원자가 2명이나 나타난다.
바로 19세기 프랑스의 국민 작곡가인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가 플라멩코 음악을 가지고 폼나는 클래식으로 만들어서 마드리드 궁정에서 연주를 한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인물은 20세기 스페인의 국민 시인이면서 나중에 프랑코 정부에 처형당하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이다. 그는 플라멩코와 같은 안달루시아 집시의 문화가 가장 위대한 이베리아의 문화라고 끝없이 칭송하고, 수많은 시를 쓴다.
이들에 의해 플랑멩코는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적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미 19세기부터 서구 한복판의 주류 문화도 사실상 ‘월드뮤직’이라는 요소가 이미 수용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 탱고
월드뮤직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진짜 월드와이드한 영향력을 최종적으로 결정지는 월드뮤직이 있다.
이것은 바로 쿠바의 하바나와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를 잇는 수많은 라틴아메리카의 하이브리드 인종인 메스티조들이 만들어낸 굉장히 다종다양한 댄스뮤직이다.
바로 탱고(Tango)다.
탱고의 국적은 너무나 복잡하다. 탱고는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꽃피웠다가 하바나에 가서 뜬다. 그리고 다시 브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서 완전히 폭발한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의 댄스뮤직들은 어느 한 나라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카리브 해부터 맨 밑에 있는 칠레까지 모든 잉카, 안데스 거주민들의 정말 복합적인 감각과 노력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브라질의 삼바, 멕시코의 마리아치(Mariachi), 서인도 제도의 칼립소(Calypso) 등등의 댄스뮤직은 20세기 초반 이른바 댄스홀 댄스, 사교 댄스의 붐을 타고 전세계로 펼쳐진다. 특히 이런 붐의 견인차 역할을 한 댄스는 당연히 탱고였다.
탱고가 1910년대 유럽에 처음 전해졌을 때, 유럽인들은 기절했다. 유럽의 19세기 후반 전유럽을 휩쓸었던 춤은 왈츠였다. 왈츠가 얼마나 성행을 했으면, 몇몇 왕정에서는 월츠 금지령을 내린 적도 있다. 왜 금지령을 내렸을까? 남녀가 인터치한 상태로 빙빙 도는 게 너무 음란하다고 본 것이다. 자꾸 돌다보면 흥분할 우려가 있어서 금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왈츠만큼 건전한 춤도 없다.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얹었을 뿐이지 왈츠는 어떤 순간에도 남녀 사이의 거리가 정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춤이다.
볼룸 댄스 경연 대회에서 왈츠를 할 때, 감점 요인은 남녀사이의 거리가 왔다갔다 하면 감점이다. 끝까지 그 거리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굉장히 어려운 고도의 테크닉이다. 그래서 사실 왈츠는 흥분할 틈이 없는 춤이다.
그런데 그 치사한 기독교적인 도덕관은 그런 춤마저도 성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탱고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겠나? 이건 진짜 세상이 끝난 것이었다.
기존의 교회적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이 끝난 것이었다. 이 이상의 소돔과 고모라는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탱고홀에 대해 그런 표현을 쓴다. ‘소돔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라고 한다.
그런 정도로 했지만 야한 것을 좋아하는 민중들에게는 이건 최고의 야동이었다.
춤을 추는 사람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 이상의 에로틱한 종합 예술이 없었다. 그냥 그 뒤에 바로 침대로 이어져도 아무도 토를 달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탱고는 언제나 그전에 끝난다.
이런 탱고가 가지고 있는 에로티시즘은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의 댄스뮤직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폭탄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32. 삼바, 보사노바, 맘보
그리고 삼바는 아까도 말한대로 재즈와 결합하면서 보사노바라는 이름으로 전세계 대중음악의 가장 주요한 장르가 된다. 열정적이면서, 쿨하고, 정교한 삼바의 리듬은 여피들이 가장 사랑하는 리듬이 된다. 삼바에서 기인하는 굉장히 정교한 리듬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은 역설적으로 나중에 뉴욕의 여피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맨해튼(Manhattan)의 빌라에서, 스웨덴의 오디오 뱅앤올룹슨(Bang & Olufsen)에서 흘러나오는 팻 메시니(Pat Metheny)의 보사노바는 여자를 꼬시는 음악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쿠바의 룸바는 50년대의 미국을 휩쓸어버린다. 룸바는 재즈와 만나면서 맘보가 되는 것이다.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춤을 출 때 나오는 음악이 바로 맘보다.
맘보는 한국 전쟁때 온 군인들을 통해서 한국까지 상륙을 한다. 그래서 쿠바의 맘보왕 뻬네즈 쁘라도(Perez Prado) 악단이 연주한 ‘Cherry Pink And Apple Blossom White’의 번안곡인 ‘체리핑크 맘보’가 1955년 대한민국 연간 차트 1위곡이 된다.
그래서 볼레로가 1920년대 초반에 파리를 폭격해서, 모든 새로운 문화에 다 볼레로가 붙인 것처럼, 우리나라도 모든 새로운 것에 맘보가 붙는다. 맘보빵, 맘보바지가 나온다. 맘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냥 모든 신상(新商)에 다 맘보가 붙는다.
맘보는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지면서 특히 미국의 중산층 이하 서민 시장을 폭격하게 된다.
이런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의 댄스뮤직들은 전 세계 서민 계급의 여가를 지배하면서 변형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 이후 카바레 문화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33.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화 투쟁과 체 게바라
1950년대부터 모든 라틴 아메리카는 엄청난 민주화 투쟁에 휩싸인다. 친미 매판정부와 새로운 민중적인 투쟁들이 부딪치면서 남미 전체가 불타오르게 된다. 이른바 팬아메리카니즘(Pan-Americanism)에 민중이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현재 전 세계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제일 많이 들어선 지역이 중남미이다. 이게 그냥 손쉽게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실 1950년대부터 남미 운동권들이 처절하게 싸우면서 흘린 피가 지금의 민주 정부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팬아메리카니즘(Pan-Americanism)이라는 것은 사악한 미국의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은 권력의 핵심에 친미파 정권을 세우고, 그 나라를 쫙쫙 빨아먹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국가는 끝없이 가난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로 군부인 친미 정권은, 민중이 가난해지거나 말거나, 총칼로 자기 민중들을 다스리고, 미국은 이들한테만 이권을 조금 떼어주고 나머지는 다 미국이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니카라과(Nicaragua)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끝까지 버텨서, 지금까지도 바로 미국 턱 밑에서 안 먹히고 살아남은 나라가 바로 쿠바다. 체 게바라가 그 당시 모든 중남미 민중들의 희망이자 꿈이 된 것은 바로 성공한 비지니스 모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하고 붙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끝까지 게기면 이긴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남미의 희망이 된 것이다. 그렇게 라틴 아메리카의 희망이 되었고, 또 볼리비아로 씩씩하게 갔다가 드라마틱하게 죽은 것이다.
체 게바라가 늙어서 카스트로처럼 나라 하나를 해먹고 죽었으면,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카스트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절정의 9부능선에서 죽는 게 중요하다. 그때 죽어야 신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외모는 기본이다. 체 게바라의 외모가 별로였으면 신화가 안되었을 것이다. 우수로 가득찬 프로필이 있어야 된다.
34. 칠레, 빅토르 하라
그리고 특히 최고의 비극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칠레 전투’라는 다큐멘터리가 전세계를 강타했던 바로 칠레였다,
칠레는 일찌기 아옌데(Allende) 사회주의 정권이 국민투표를 통해서 집권을 했다. 그러자 미국은 ‘이러다 또 다시 사회주의 판이 될 거 같아.’라는 생각을 한다.
월남하고 똑같은 경우였다. 베트남이 사회주의화되면 전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해서, 통킹만 사건을 조작, 그 살벌한 베트남 전이 시작했던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미국은 우익 군부 피노체트(Pinochet) 장군의 쿠데타를 뒤에서 지원해서 군부 쿠데타을 일으킨다. 그래서 졸지에 정당한 아옌데 정부를 전복된다. 그리고 정말 엄청난 대량학살이 이어졌다.
우리로 치면, 좌빨 종북 성향의 지식인들, 예술인들, 언론인들, 교수들 수천명을 잡아서 어떤 대학의 운동장에 몰아넣고, 모두 처형한다.
그런데 그 운동장에는 칠레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라는 젊은 청년 가수가 있었다. 그때 빅토르 하라는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며 처형 당한다.
그는 20세기의 역사에서 전세계를 통털어서 진보적인 노래를 부르다가 처형당한 단 한 명의 인물이다. 존 레논도 총은 맞았지만 처형 당한 것은 아니다. 처형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일단 객관적으론 미친 놈이 조지 포스터한테 환심을 살려고 총을 쏜 것으로 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빅토르 하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면서 칠레를 시작으로 볼리비아, 아르헨티나까지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35. 누에바 칸시온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중남미에서는 새로운 노래 운동의 물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것을 나중에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운동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새 노래’ 운동이다. 이 운동은 70년대까지 이어진다.
우리로 치면 80년대의 노래 운동과 비슷한데, 우리나라의 노래운동과 라틴 아메리카의 ‘누에바 칸시온’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은 음악적 아마추어들이 주도했다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최고의 프로들이 참여했다.
가령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 그 당시 최고의 민족 시인인 ‘아르만도 테하다 고메즈(Armando Tejada Gomez)’가 가사를 썼다. 그리고 ‘남미의 모차르트’라고 불리웠던 남미 최고의 작곡가 ‘아타우알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가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라틴 아메리카의 영혼’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라고 불리게 되는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가 노래를 불렀다. 그야말로 이들의 노래 운동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 수많은 나라들에서 ‘누에바 칸시온’의 위대한 기수들이 정말 수 백명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전세계에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칠레의 빅토르 하라이다. 그 밖에도 칠레의 여자 싱어송 라이터인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 유팡키 같은 사람들이 있다.
36. 그라시아스 알라비다
그들의 노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그라시아스 알라비다(Gracias a la vida)’라는 것이 있다. 특히 메르세데스 소사가 1982년 부른 라이브 버전은 진짜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 곡의 원작곡가이자 자신의 동료인 빅토르 하라를 잃은 칠레 노래 운동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비올레타 파라’의 오리지날 음원도 정말 훌륭하다.
이 노래는 나중에 존 바에즈(Joan Baez)도 부르고, 그리스의 마리아 파란두리(Maria Farandouri)도 부르고, 정말 많은 사람이 불렀는데, 최고의 노래는 원작자이며 그 비극의 현장 속에 있었던 비올레트 빠라와 메르세데스 소사의 것이다.
이 노래는 최악의 비극 속에서 탄생했지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특히 가사가 정말 죽인다.
그라시아스 알라비다(Gracias a la vida)는 ‘삶에 감사한다’라는 뜻인데, 한국말로 번역하면 느낌이 살지 않고, 그냥 ‘그라시아스 알라비다’라고 해야 폼이 난다. 내가 살아있음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자체에 대해 감사하다는 뜻이다.
가사에는 삶의 비극과 아름다움에 대한 완벽한 통찰력이 한 편의 시로 쓰여져 있다.
일단 음악을 듣고, 번역된 가사를 보고, 다시 노래를 들어보기 바란다. 저는 감동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둔한 사람인데,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가사를 정확하게 음미하면서 꼭 들어보길 바란다.
37. 월드뮤직과 역사 탐구
아까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본래 월드뮤직에서 유럽 지역은 분명히 제외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90년대에 오면서 중심 속의 주변들도 슬그머니 ‘나도 월드뮤직 할래’라고 하면서 월드뮤직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과 영국 말고는, 영국도 잉글랜드 말고는 전부 월드뮤직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재영토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유럽의 주류는 물론이고, 비주류인 주변국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우리는 솔직히 영국, 프랑스사도 잘 모른다. 그런데 하물며 포르투갈 역사, 폴란드 역사, 루마니아 역사, 마케도니아의 역사는 더 모른다. 사실 하나도 모른다. 대충 유럽에 속한 나라라는 것밖에 모른다.
제가 월드뮤직에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끼는 것은, 그 노래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감동을 받는 것도 있지만, 그 노래가 나온 나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게 했기 때문에 이 음악이 너무 소중한 것이다.
저는 노래의 배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그 나라를 추적해 보게 되었다. 우리집에 가면 이상한 책들이 많다. 폴란드 사, 인도네시아 사에 관한 책도 있다. 지금은 팔지도 않고, 활자체도 너무 작고, 번역도 이상하지만, 그나마도 10여개국밖에는 없다.
내가 뭐 역사학자도 아니고, 여행 전문 작가도 아닌데, 그런 책을 보게 된 것은 모두 음악 때문이다.
아직 충분하진 않지만, 이제 인터넷 때문에 꽤 희안한 나라의 정보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영어만 좀 할 줄 알면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모르게 그리스의 노래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역사는 잘 모른다.
난 사실 그리스가 그런 나라인줄 몰랐다. 그냥 찬란한 그리스 아테네 문명의 나라로만 알았다. 그런데 공부를 해보니, 사실 식민지만 안 되었지, 20세기만 놓고보면 우리랑 다를 바가 없는 나라였다. 아니 우리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은 나라였다.
38. 월드뮤직 베스트 3
내가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월드뮤직 베스트 쓰리(Best three)가 있다.
첫 번째는 러시아 로망스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모래시계 주제가로 쓰인 노래다. 사실 이오시프 꼬브존(Iosif kobzon)이 부른 ‘백학(Cranes)’의 가사를 보면 진짜 슬픈 노래다.
러시아 음악이 왜 우리나라 정서에 가장 맞냐하면, 일단 같은 우랄알타이계라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다.
두 번째는 러시아 로망스에 담긴 가사의 70%는 전쟁으로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워낙 전쟁을 많이 겪었다. 그리고 전쟁이 났다 하면, 땅이 커서 기본단위로 천 명 단위로 죽었다. 2차 세계대전때도 제일 많이 희생된 나라가 소련이다. 2천 4백만명이 죽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쟁에서만 군인과 민간인이 합쳐서 800만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내전 때문에 죽고, 스탈린 대학살 때문에 또 기백만명이 죽었다. 그러다 보니깐 이들 노래의 70%가 전쟁으로 인한 슬픔 그리고 상처에 관한 가사를 담고 있다.
그러니깐 우리는 가사의 뜻은 몰라도, 노래에 담긴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백학’도 조국을 위해 죽어간 체첸 전사에 대한 노래이다. 체첸은 아직도 소련과 그렇게 싸우고도 아직 독립을 못하고 있다. 지금도 분리 독립을 하려고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 체첸은 본래부터 절대로 남한테 굴복하지 않는 용맹무쌍한 전사의 민족이다. 그러니깐 이들은 지금도 끝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백학’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들이 다시 학이 되어서 날라온다는 이야기다.
가사의 뜻은 모르지만 러시아 로망스를 제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월드뮤직은 그리스 노래다. 그리스의 노래에는 반도 국가의 항구도시에 사는 하층민의 감수성이 담겨 있다.
그래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면서, 왠지 누이의 이야기 같은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이웃집의 정서와 같은 것이다. 이런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주는 노래가 바로 그리스의 렘베티카(Rembetika)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월드뮤직은 아일랜드 캘틱의 민속음악들이다.
이 세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여튼 뭔가 슬픔이 가득 담겨 있다.
라틴 쪽은 슬퍼도 그걸 승화하는 방식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그루브(Groove)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30세 이하는 그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좀처럼 수용하기 어려운 감수성이다.
39. 그리스의 렘베티카
현대사를 통해, 중심에서 떨어진 주변 문화에서 수많은 월드뮤직이 이 창조된다.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오늘은 단지 그리스의 렌베티카에 대해서만 살짝 이야기하겠다.
제가 그리스 노래를 처음 접한 건 대학생 시절이었다. 선배도 정보가 없으니깐, 그냥 그리스 운동권 노래 같다고 하면서 건네 주었다. 그리스어로 쓰여 있어서 제목도 몰랐다. 들어보니깐 너무 좋았다.
내 주변에 그리스어 전공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게 무슨 노래이고 무슨 내용인지는 20년 뒤에나 알게 되었다.
그건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곡이었다.
그런데 ‘이게 운동권 노래 같은 거래’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깐, 우리가 아는 그리스 노래는 모두 운동권 노래였다. 왜 모두 운동권 노래였을까?
제가 그리스에도 가 보고, 판도 사고, 조사를 해보니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리스의 렘베티카(Rembetika)라는 노래 문화는 20세기 그리스 현대사의 비극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스와 바로 눈 앞에 있는 터키는 앙숙 간이다. 서로가 거의 한일간 수준이다.
터키는 과거에 오스만 투르크였고, 그리스와 전쟁을 해서 크게 이기기도 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 때 그리스는 복수를 한다. 그래서 터키의 서쪽 지역을 점령해 버린다. 그런데 점령 지역 중에는 터키의 부산에 해당하는 이즈미르(İzmir)라는 항구 도시가 있다.
터키 여행을 가시면, 안탈리아(Antalya)같은 유적지에 가지 말고 이즈미르에 가서, 낮에는 주무시고 한 10시쯤 뒷골목에 가 보면, 불이 다 꺼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 켜진 데가 있을 것이다. 거기가 바로 카페다. 그곳에서는 로컬 밴드가 라이브 연주를 하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다.
정말 세계 최고의 밴드가 술집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드럼, 키보드, 베이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리드 기타가 클래식 기타였다. 클래식 기타에 잭을 꽂아서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안 보였다. 옆집에 가봤더니 또 다른 그룹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공이 정말 대단했다.
20세기 초부터 이즈미르의 뒷골목에는 이런 문화가 있었다. 이것을 카페 아망(Cafe-aman)이라고 한다. 주로 항구 도시의 선술집에서 여자 가수들이 취객을 상대로 부르는 노래가 있었는데, 노래 후렴에 ‘아망 아망(터키어 감탄사)’이라는 말이 자주 나와서, 이 장르의 이름을 ‘카페 아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즈미르에는 그리스 사람과 터키 사람이 섞여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23년,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국경선이 정해진다. 그래서 그리스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독립전쟁시기까지 점령하고 있던 이즈미르와 에게해 주변의 영토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리스에 거주하는 터키인과 터키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을 맞바꾸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살던 그리스인들은 강제 추방되는데, 그 숫자가 무려 150만명에 육박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말만 그리스인이지 사실 그리스 말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터키에서 낳고 자라서 터키말만 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재산도 없이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쫓겨난 것이었다.이들한테 남은 것은 ‘이즈미르에서 살았어.’라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으니깐, 살 수가 없어서 결국, 가장 흉악하게 가난한 지역에 거주지를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부분이 작은 항구도시였다.
그러면서 이즈미르 항구 도시에서 불렀던 노래를 그리스화해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렘베티카(Rembetika)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그리스적 요소가 붙게 된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 그리스에도 좌우익 대결의 피바람이 분다. 그래서 혁명이 성공할 뻔 하다가, 다시 친미 우익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또 기나긴 30년간의 암흑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40. 그리스의 예술가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같은 노래를 만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정말로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영화 음악도 이 사람이 만든 것이다. 조르바의 고향인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유럽 최고의 음악 학교인 프랑스 음악원을 나온 클래식 작곡가 출신이야. 그런데 자기의 것을 모두 버리고 그리스의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렘페티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그리스 음악을 창조한다.
또한 그는 수많은 투옥과 망명을 거친 좌파 정치인이기도 하다.
테오도라키스(Theodorakis)라는 이름의 테오(Theo)은 그리스 말로 신(god)을 뜻하고, 라키스는 선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기 이름대로 그는 신이 그리스에 보낸 선물이 되었다. 정말 위대한 작품들을 수없이 많이 남겼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향악적 스케일을 갖고 있는 작품부터,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같은 굉장히 민중적인 렘페티카까지 수많은 작품이 있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에 시에 붙인 가곡들은 예술이다.
이 한 사람의 작품 세계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tzidakis) 등 이런 사람들이 수 십명 있다.
이렇게 현대 정치사의 비극 속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태어났고, 마리아 파란두리(Maria Farandouri), 멜리나 메르꾸리(Melina Mercouri) 같은 위대한 여가수들은 이들의 노래를 정말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불렀다. 멜리나 메르꾸리 같은 가수는, 우리로 치면 문화부 장관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 하나만 보더라도, 20세기의 현대사와 더불어서 이 노래들을 추적하면, 그 어떤 음악사를 경험할 때보다 드라마틱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음악의 대부분이 불행하고, 상처입고, 뿌리 뽑힌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1. 인도네시아의 저력
우리가 요즘 한류라고 하면서 폼을 잡고 있지만, 아시아에도 무시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음악적인 내공을 가진 나라들이 많다.
가령 예를 들어서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가 있다.
이 노래는 대만 여가수가 부른 버전인데, 본래 대만 노래가 아니고 ‘벵가완 솔로(Bengawan Solo)’라는 인도네시아의 1943년 작품이다.
인도네시아는 아마 아시아에서 인도 다음으로 가장 풍요로운 음악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일 것이다.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무시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 나라다.
인도네시아는 1억 2천만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약 260개의 언어권에 56개의 민족들이 섞여있는 굉장히 복잡한 나라다. 그리고 ‘동인도 회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16세기부터 포르투갈를 통해 서구 문화를 받아들였다.
파두(Fado)로 대표되는 포르투갈의 민속 양식부터 서양의 클래식 음악까지 받아들여서, 자기들의 문화 속에서, 방금 들었던 크론총(kron cong)같은 인도네시아의 독자적인 노래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특히 서양인들은 가믈란(gamelan)이나 공(gong) 같은 음악은 아시아 최고의 음악 유산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다시 편곡해서 팔아먹을까 고민하고 있다.
42. 아시아 음악의 미래
우리가 K-POP 한류를 자랑하지만, 앞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이나 중국 같은 큰 국가를 제외하고, 한국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대중 음악의 독자 세력화가 가능한 나라는 세 나라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인도네시아이고, 또 하나는 태국, 나머지 하나는 필리핀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핀의 보컬 전통은 전세계 최강이야. 보컬의 완성도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재즈 같은 것은 굉장히 강한데, 너무 미국 것을 따라해서 독자적인 자기 노래를 못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워낙 보컬에 관해서 전세계 최고 수준의 포텐셜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곧 떠오를 거라고 본다.
두 번째 태국이다. 현재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태국은 지금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나라이다. 음악 산업에 대한 관심, 거기에 투입되는 실질적인 인력의 수준, 시장 증가의 속도, 수용자들의 열광도 등을 보면 태국의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태국에서 나온 음악들이 점점 중화권까지 진출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태국은 그런 에너지 때문에 앞으로 아시아 월드뮤직의 중심 국가로 떠올를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나라는 인도네시아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는 사실 굉장히 풍요로운 음악적 자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음악을 생산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산업적인 메카니즘이 결여되어 있어서, 그 잠재력을 자기나라 바깥으로 발휘 못하고 있을 뿐이다.
43. 혐한의 원인
제가 시즌 1 마지막으로 한류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왜 반한류, 혐한류가 생기는가? 그걸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반한류가 생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지금 미국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예술적인 측면에서 미국 흉내를 내는게 아니라, 제국주의자 미국의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 우리 것만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다. 누가 이걸 좋아하겠는가? 같은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자기 것만 팔려고 하고, 남의 것은 절대 안 사주고,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옆 동네가서 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우리가 딱 그짝이다.
우리나라의 슈퍼주니어가 태국에 가면 그들은 신(神)이다. jyj가 인도네시아에 가면, 그들은 지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쪽 나라에 무슨 음악이 있는지, 어떤 가수가 제일 인기가 있는지, 하다못해 인기는 없어도 의식있고 진보적인 가수는 누가 있는지 모른다. 아마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가 칠레에 가서 공항을 아작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칠레에 대해서 아는 것은 홍어하고 와인뿐이야. 이건 아니다.
이런 새끼 제국주의자 흉내 놀음은 우리를 멸망케 할 것이다.
문화가 비록 상품이 되었지만, 냉장고하고 다른 유일한 이유는 감정을 파는 상품이라는 것이다. 구매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팔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냉장고는 구매자의 감정을 상하게 해도 된다. 기능이 훌륭하고, 절전이 우수하고, 가격이 싸면 기분이 나빠도 슬그머니 사준다. 하지만 문화는 그렇게 안 된다. 감정을 상하게 하면 사주지 않는다.
44.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
그럼 어떻게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월드뮤직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굉장히 서구중심적인 재수없는 개념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미국, 영국의 음악도 모두 월드뮤직과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미국 팝 음악의 시장점유율은 10%도 안 된다. 따져 보면 그들의 음악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유색인종의 음악일뿐이다. 그러니깐 이제 모두 월드뮤직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80년대 서구에서 만들어진 월드뮤직의 개념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월드뮤직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우리가 전세계에 있는 모든 음악을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칠레에서 우리나라의 영화나 음악이 터져 주었다면, 적어도 대한민국의 어떤 언론사 하나는 칠레에는 지금 어떤 문화가 있는지, 칠레에는 어떤 음악이 있는지 소개해 주어야 한다. 그게 최소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세다.
우리가 어떻게 전세계 음악을 모두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어떤 나라의 음악에 관심이 꽂히면, 그것을 좀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SNS는 번개나 하라고 만든 게 아니다. 자기가 꽂힌 문화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우수한 도구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통해서, 전세계의 음악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꽂히는 나라의 음악은 알아보자. 아무리 돈이 없어도 가령 내가 볼리비아에 꽂혔다면, 볼리비아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유튜부가 있기 때문이다. CD를 사고 싶다면, 아마존 닷컴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렇게 하고, 그것을 자기 혼자만 즐기지 말고,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적어도 우리는 전세계 타자(他者)들의 문화에 까막눈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외교부에는 65개국의 국가 정보밖에 없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니깐 우리는 여전히 정말 야만적인 수준의 시민 의식을 가진 국가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관심없는 나라들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 국가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우리들만의 월드뮤직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그것을 정말 성숙한 시민적 정신으로 공유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감사하다. 이것으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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