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로써의 글쓰기
이동하(소설가)
나의 젊은 날을 관류한 것은 결핍의 정서와 촌닭의식이다. 스물셋의 나이로 대학에 발을 들여놓고 본즉 자신의 모습이 흡사 꽁지 빠진 촌닭 같은 꼴이던 것이다. 그런 자의식은 곧 열등감을 부채질하였고, 열등감은 다시 오기를 불러 일으켰고, 그리고 그 오기 때문에 나는 이를 갈며(?) 한사코 글쓰기에 매달렸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미아리 돌산 위에 있던 서라벌예술대학의 제4강의실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문예창작과 전용이던 그 방에서 먼저 나를 압박한 것은 여학생들이었다. 사오십 명쯤 되는 동급생들 중 반수 이상이 여자였던 것이다.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당장 기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내가 가까이할 수 있었던 여자라고는 통털어 세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녀들이란 내 어머니와 두 분의 누님이었던 까닭에서다. 갑자기 여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떠들어야 하는 일이 나로서는 몹시 난감하게 느껴졌다.
사내들도 나를 기죽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습작품을 발표하고 합평하는 시간마다 백가쟁명이요 군웅할거의 장면이 연출되곤 했다. 때로는 매우 고압적인 정서와 폭력적인 언어가 마구 횡행하기도 하여 나같이 심약한 사람은 아예 목을 움츠리고 죽은 듯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나 소설 나부랭이를 엮어내는 일이라면 내 앞에 누구 나와 보라고 그래, 말하자면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교수님들의 위광과 그 도저한 자세 앞에서도 나는 매번 숨을 죽이곤 하였다. 그럴 수밖에!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모두 교과서에서 보던 이름들이 아니던가. 그런 분들이 책 속에서 걸어나와 매주 우리 제4강의실로 들어서곤 했던 것이다. 세분 선생 외에도 손소희, 이범선, 김구용 선생, 나중에는 김수영, 이형기 선생도 뵈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단연 돋보이는 분은 역시 앞의 세 분이셨고, 특히 미당 선생의 도저한 언사는 우리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선생 특유의 화법-남도 가락으로 뒤를 낭랑하게 잡아끄는 그런 어투로, “이 점에 대해서는 엘리옷 군과 나의 생각이 같지.” 운운 하실 때면 나는 진실로 깊이 이마를 조아리곤 하였던 것이다. (이 대목을 쓰면서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그분들 중 이미 여럿이 우리의 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 무렵 그분들의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와 얼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부끄럽다.)
어쨌거나 이래저래 주눅 든 채 나는 제4강의실을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꽁지 빠진 촌닭같이 비칠 게 분명한 나의 행동거지에 대해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말이다. 혼자서 얼굴을 붉힌 적이 많았다. 언젠가는, 수업 중에 내가 벌인 해프닝으로 하여 동급생들이 온통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었다. 손소희 선생 시간이었다. 선생은 나를 지목하여 단지 독후감을 물었을 뿐인데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이 너무 엉뚱했던 것이다.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기까지는 했으나 목구멍이 그만 얼어붙어 버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만도 아니다. 얼굴은 열꽃이 피어 시뻘게지고, 사지는 겨울 나목처럼 와들와들 떨리고... 폭소가 터져 나왔다. 태풍 같은 폭소를 들으면서 나는 결국 만사를 포기하고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푹 꺾고 있으려니 그렇게 참담할 수가 없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 나이 스물셋에 이 무슨 못난 꼴인가 싶었다. 한바탕 웃기는 했지만 동급생들이라고 마음이 개운했을 리가 없다. 나의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꽤나 민망하고 거북살스러웠으리라. 나는 그들이 다 퇴실한 다음에야 비로소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배를 깔고 엎딘 채로 곰곰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은 간명하였다. 열등감이 그 원인이었다. 또한, 그 열등감은 나에게 있어 뿌리가 깊은 것으로 그것은 나의 성장환경과 적빈의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도 어쩌면 거기서 비롯했는지 모른다. 하여간 낯선 환경과 부딪치면서 그 열등의식은 그런 식으로 나를 억압했던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내가 느끼는 것은 늘 결핍의 감정이었다. 나의 동료들이라고 뭐든 다 넉넉해 보이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들 앞에서 매양 초라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굳이 물질적 외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나는 저들보다 책도 덜 읽었다, 생각도 깊지 못하다 식으로 정신적인 것들까지도 나는 빈약한 느낌이어서 매사 전전긍긍하는 심사였던 것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나의 행동거지는 더 굳어지게 마련이었고, 또 굳어지는 만큼 더 촌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밤새워 시 한 편을 썼고, 다음날 미당 선생 시간에 감히 합평에 올렸다. 일종의 오기였다. 말하자면, 이처럼 못난 나에게도 한 구석 쓸만한 데는 있다는 점을 시위하고 싶었던 것이다. 못난 사람의 못난 오기일 터이다. 그러나 어쨌건 나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어서 그날 이후부터 제4강의실 주역들을 쫓아다니며 그런대로 어울릴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렵 글쓰기에 열심히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오기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럼으로써, 촌스러운 일상을 글쓰기에서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사는 일의 어설픔에 비한다면 원고지 앞에서는 훨씬 더 당당할 수 있었던 때문이다.
스스로를 생각해 보면 지천명의 나이에도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내면의 뿌리 깊은 두 기둥, 곧 결핍의 정서와 촌닭의식은 여전히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꿈속에서도 나는 늘 초라하고, 타인 앞에서는 여전히 당당하지 못하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