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성씨 외에 본관(本貫)이 있다. 본관은 관적(貫籍), 본(本) 또는 적(籍)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인의 성씨는 흔히 최씨라 하는 그 성씨가 아니라 전주최씨라 하는 본관이 진짜 성씨다. 조선후기(朝鮮後期, 1592~1896)까지도 동성인(同姓人)이라 하면 성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성본(姓本)이 같은 사람이란 뜻이었다.
『세종실록』<20년(1438) 12월 15일>에는 “우리나라 풍속은 비록 같은 성씨라고 하더라도 본관이 다르면 서로 혼인하면서 말하기를, ‘같은 성씨가 아니다.’ 하고, 심지어 종실이나 부마들까지도 역시 같은 성씨와 혼인하면서도 ‘나하고 같은 성씨가 아니다.’라고 말한다.”[1]라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 동성동본불혼(同姓同本不婚)의 법률이 있어서 동성동본이면 서로 혼인할 수 없었는데 고대로부터 이어 온 전통을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동성동본이란 같은 관향[2]이 아니라 같은 시조(始祖) 후손을 말하는 것으로 전주최씨, 전주유씨, 강릉최씨처럼 본관에 시조가 다른 여러 계열(系列)이 있는 경우 같은 계열만 동성동본으로 간주하여 계열이 다르면 혼인할 수 있었다.
같은 전주최씨이지만 문성공계와 문충공계는 시조가 달라서 같은 혈통으로 볼 수 없으므로 서로 혼인한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문성공계, 문열공계, 사도공계는 시조는 비록 서로 다르지만 당최[3]로서 혈통이 같다고 생각하여 서로 혼인하지 않았는데, 혈통도 혈통이지만 사는 지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4]에 혼인할 기회도 많지 않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면 반드시 이름 앞에 본관을 표시하여 “평양후인 박팽년(平壤後人朴彭年)”, “창녕 성삼문(昌寧成三問)”과 같은 식으로 표현했고, 비록 사는 곳은 서울일지라도 본관이 전주최씨이면 반드시 전주인(全州人)이라고 적어서 얼핏 전주에서 사는 사람처럼 오해하기 쉽다.
『국조방목』이나『사마방목』을 비롯한 대부분 문헌에서 개인정보를 적을 때에도 반드시 그와 같이 적었다. 또 조선시대 호구단자[5]에 남자는 본(本)이라 적고 여자는 적(籍)이라 적었는데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연구한 바가 없어서 자세히 모르겠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5년 11월 1일 현재 대한민국에는 내국인 4,971만 명이 살고 있는데, 289개 성과 4,939개 본관을 가지고 있다. 김해김씨 446만, 밀양박씨 310만, 전주이씨 263만 순으로 인구가 많은데, 전주최씨는 4대 계열을 모두 합하여 458,191명으로 20번째로 큰 본관이다.
본관 발생에 관한 오해를 정리하면 3가지로 요약된다.
1) 경주최씨가 전주로 옮겨 살아 전주최씨가 되었다.
2) 시조가 관향(貫鄕)의 제후(諸侯)로 책봉되어 만들어졌다.
3) 시조가 관향을 식읍[6]으로 받아서 만들어졌다.
1)의 사례로 유명한 것이 최씨대동경주기원설이다. 자세한 내용은 차차 검토하겠다. 본관은 신라시대 부(部)가 변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농경사회(農耕社會)는 정착 생활이 불가피하고 또 고대에는 신분(身分)에 따라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 마음대로 옮겨 살면 신분질서가 무너진다. 사실 본관은 백성이 마음대로 옮겨 살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 조선시대까지도 특별한 이유 없이 본관을 떠나 사는 사람은 붙잡아서 본관으로 돌려보내는 법률이 있었으므로 전주최씨와 혈통적 친밀도는 경주최씨보다는 전주이씨나 전주유씨가 훨씬 가까운 것이다.
2)의 사례는 중국에서 볼 수 있으나 한반도에는 없다. 땅은 넓고 행정체제가 발전하지 못한 고대 중국의 왕은 국토 전체를 직접 다스릴 수 없으므로 경(京)에서 살면서 기(畿)에서 거둔 세금으로 생활했다. 경기(京畿)를 벗어난 지역은 왕족이나 귀족을 제후(諸侯)로 책봉하여 위임통치하는 이른바 봉건제(封建制)를 시행했는데 제후 후손이 책봉된 지역 이름을 성으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지만, 좁은 한반도에서는 모든 영토를 왕이 직접 다스리는 데에 아무 문제도 없었기 때문에 봉건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3)의 사례는 성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의 고위 관료가 전주 어떤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면, 전주로 내려가서 그곳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서울에서 관료로서 근무해야 한다. 왜냐하면, 식읍은 바로 관료의 녹봉(祿俸)이기 때문이다. 전주는 식읍 주인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전주 부윤이 다스리는 것이다.
* 각주 ------------------
[1] 而我國之風雖同姓籍貫異則娶之曰非同宗也至於宗室駙馬亦娶同姓以爲非我一姓也.
[2] 貫鄕. 본관으로 표지되는 지명(地名). 전주최씨이면 전주를 말하는 것이다.
[3] 唐崔. 중국에서 들어온 최씨. 상대적으로 문충공계를 토최(土崔)라고 한다.
[4] 문성공계, 문충공계는 전라도, 문열공계는 충청도, 사도공계는 경기 북부와 황해도에서 세거해 왔다.
[5] 戶口單子. 3년에 한 번 호적(戶籍) 정리를 위해 관청에 제출하는 호구 문서.
[6] 食邑. 공신이나 고관에게 급료 대신 세금을 거두어 가지도록 국가가 내려 준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