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고통에 동참하듯 마음 다해 예배하는 것이 ‘능동적 참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헌장)을 통해 전례에 대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했다.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신자가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하도록 인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한 참여는 전례 자체의 본질에서 요구되는 것이다.”(14항) ‘능동적 참여’는 「전례헌장」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어다.
능동적 참여에 대한 해석
그러나 웬일일까, 「전례헌장」에서 성당 건축을 언급하는 것은 성미술 전반에 관한 124항의 문장 끝에 단 한 곳뿐이다. “성당 건축에서는 전례 행위의 실행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 확보에 적합하도록 힘써 배려하여야 한다.” 어떤 평면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 없다. 「전례헌장」이 이렇게 성당 건축을 간단히 언급한 것은 성당 건축이 성미술보다 덜 중요해서가 아니다. 보편 교회는 공적이며 사적인 예배에 적합한 아름다운 성당으로 축복받았으므로, 성당 건축은 개혁하거나 변형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거룩한 건축이 지니는 예술적이며 역사적인 유산을 더 잘 간직하는 것이 공의회가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당 건축의 새로운 변화를 크게 요구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삼위일체 성당, 라이프치히, 슐츠 운트 슐츠, 2015년 출처=simon menges
그런데도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는 현대 성당 건축을 쇄신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오랜 건축적 전통을 무시하거나 장축형 성당은 위계적이라며 원, 타원형, 부채꼴 등의 성당 평면을 정당화하는 데 어김없이 등장한다. 나아가 공의회의 원칙에 따른다며 본래 있던 제단을 훼손하며 제대를 회중석 한가운데로 옮기기도 했다. 또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만든다며 ‘제단 뒤 장식벽(reredos)’이 있는 아름다운 주제대(主祭臺), 제대 난간, 발다키노, 감실 등을 없앴고, 벽화나 모자이크를 흰색으로 칠하고 패널로 덮어 버렸다.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에 대한 건축가들의 관심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위계적으로 놓였던 회중석과 제단으로 가깝게 두고 이 둘을 분명히 구별 짓지 않거나 적어도 뚜렷하게 구별한다고 강조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부 전체를 쉽게 지각하고 신자들과 사제 또는 신자들끼리 긴밀한 관계를 갖도록 좌석을 다시 배치하였다. 그렇지만 20세기 중반까지는 이러한 공간의 통합을 주장한 이들도 어느 정도 사제와 평신도의 구별은 있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점차 시각적으로나 건축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신자 모두가 참여자가 되는 중심형 평면을 선택하게 되었다.
회중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하려고 제대를 중심으로 좌석을 완전히 원형으로 배치했다. 도형적으로도 함께 모이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지만 이 원형 배치에는 제단과 회중석의 위계적인 특성이 사라지고, 사제의 등 뒤에 앉게 되는 많은 신자는 행렬 축을 잘 볼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점을 보완한 것이 원으로 완전히 에워싸지는 않고, 제대를 중심으로 반원을 이루며 또는 세 변에 회중이 앉는 중심형 공간이다. 부채 모양의 평면도 이에 속한다.
주님 고통에 동참하는 공간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전례 개혁자들이 모두 중심형 평면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중심형 평면에서는 확실히 제대를 향해 집중하지만, 그 대신 좌우가 벌어져 평신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느끼게 하기에는 어렵고, 또 마주 보거나 좌우로 또는 비스듬히 다른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게 되어 단점이 있다. 중심형 평면은 성당을 꽉 채울 정도라면 함께 에워싼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 수가 적을 때는 에워싼다는 의미가 크게 떨어진다. 신자 수가 적을 때와 많을 때 모두 고려하여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건축으로 계획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좌석을 어떻게 배열해도 회중과 주례 사제의 관계는 여전히 남을 수밖에 없다. 전통주의자들은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위한다며 좌석을 원형 등으로 배치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지만, 좌석을 어떻게 배열하든 성당 안에서는 주례 사제는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며, 평신도는 이에 반응하는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바꾸기는 어렵다. 평신도와 떨어져 있을 때도 회중 바로 앞에 있어도 사제는 돋보이게 되어 있다. 제단 뒷면에 ‘제단 뒤 장식벽’을 두어 모든 회중이 제대에 집중하게 했지만, 오히려 주례 사제 의자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장축형은 전통적인 성당이니까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을 방해하고, 반대로 중심형은 현대적으로 해석한 성당이며,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중시한다면 중심형 성당을 지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그렇다면 모두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두 성당을 보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하나는 라이프치히의 삼위일체 성당(Propsteikirche St. Trinitatis, 2015)이고, 다른 하나는 뮌헨의 예수 성심 성당(Pfarrkirche Herz Jesu, 2000)이다. 사진을 잘 살펴보며 생각해 보자. 중심형인 삼위일체 성당은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잘 이루어져 있는데, 장축형인 예수 성심 성당은 그렇지 않게 보이는가? 아니다. 그런데도 만일 두 성당이 큰 차이가 있다면 그 근거를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교회 건축가 스티븐 쉴뢰더(Steven Schloeder)는 큰 비용을 들여 기존의 성당을 고쳤다고 평신도가 능동적인 참여를 더 깊이 느끼고 공동체 감각이 더 깊어진 것도 아닌 예를 많이 보았다고 하며,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건축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을 크게 비판하였다. 이것은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 아닌가는 평면형과 좌석 배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능동적 참여’를 말할 때 이 ‘능동적’은 영어의 ‘active’와 같은 뜻이 아니다. 공식 라틴어 번역은 ‘participatio activa’가 아니라 ‘participatio actuosa’다. ‘activa’는 외적으로 무릎을 꿇거나 기도하고 노래하는 등의 능동적인 참여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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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미나 동산에서의 고뇌. 안드레아 만테냐, 1458?~1460년. 출처=Wikimedia Commons |
그러나 ‘actuosa’란 이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참여라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이 두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리햐르트 슐러(Richard Schuler) 몬시뇰의 말로 쉽게 구분된다. “눈이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잘 걸을 수 없는 신자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런 외적인 신체의 능동적인 참여(participatio activa)는 못했어도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예배한 이 사람은 미사에 능동적인 참여(participatio actuosa)를 한 사람이다.” 그러면 무엇이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인가? 주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극한의 고통의 순간을 앞에 두고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38)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안드레아 만테냐의 그림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뇌’에서 보듯이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자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깨어서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듯이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의 본뜻일 것이다. 이는 중심형 평면 같은 건축적 해석으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