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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年度 現場學習
1. 개 요
가. 일 시 : 2014년 11월 1일(토) 08:00 ∼ 17:30
나. 대 상 : 대전연수원 각 과정 재학 및 졸업생 중 희망자. 기타과정 등록생중 희망자
다. 지 역 : 필암서원(장성), 백양사(장성), 돈암서원(논산)
라. 참가비 : 1인당 3만원, 참가인원 40여명 선
2. 시간계획
07:50 집결 / 승차(연수원 앞 버스승강장)
08:00 출발
09:20 정읍휴게소(20분)
10:30 필암서원 도착 / 답사
≀
11:30 백양사로 이동
12:00 백양사 도착 / 중식
13:00 백양사 관람
≀
14:30 돈암서원으로 출발
15:40 돈암서원 도착 / 답사
17:30 연수원으로 복귀
3. 행정 / 준비사항
가. 행정업무
(1) 차량예약(대형 관광버스 1대)
(2) 중식 예약 (백양사부근 맛집선정)
(3) 음료수 등 간식거리
나. 담당 교수 : 답사지역 사전 점검 / 협조
다. 참가자 : 개별 및 과정별 회장 단체신청(관리실)
한국한문교사 대전연수원장
現 場 學 習
2014. 11. 1(토)
◉ 백 양 사 :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 필암서원 :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378-379
◉ 돈암서원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74 |
연수원(08:00) → 필암서원(10:30) → 백양사(12:00)점심 →
→ 돈암서원(15:30) → 연수원(17:30)
한국한문교사 대전연수원
필암서원(筆巖書院)
長城 筆巖書院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378-379 (사적 제242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이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호암(壺巖)변성온(卞成溫:1540∼1614)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1624년(인조 4) 복원되었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이 서원에 소장된 문서들은 보물 587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는데 총15책 65장의 필사본들로 고문서류이다. 이 자료들은 필암서원의 임원, 원생, 조선 후기 서원의 재정과 노비 소유, 서원의 운영사항과 지방관청 및 유림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河西는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1796년)된 인물이다. 이 필암서원은 경상도의 서원이 대부분 산비탈에 건립된 것과는 달리 야산 아래 평지에 세워져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필암서원의 역사는 1590년 호남 유림이 하서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황룡면 기산리에 사당을 창건해 위패를 모시면서 시작됐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사당이 소실되자 1624년에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3년) 지방 유림의 청액소(請額疎)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1532∼1594)을 추가 배향(配享)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다. ‘필암’이라 이름 지은 것은 河西의 고향(황룡면 맥동)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서원은 강학 공간인 강당이 사당을 향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구조라는 점이 특이하다. 건물 남쪽 면은 벽을 설치하고 창문을 내었으나, 북쪽 면은 기둥 사이에 벽을 설치하지 않고 비워 놓은 것이다. 서원 문인 누각도 유사한 구조다. 이 역시 경상도의 서원과 다른 점이다. 이곳에서는 양송체(兩宋體)의 주인공인 송시열. 송준길의 글씨 편액, 그리고 正祖 임금의 글씨 편액을 만날 수 있다.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표현한 ‘확연루(廓然樓)’
필암서원 앞에 서면 누각에 걸린,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의 ‘확연루(廓然樓)’ 편액이 눈길을 끈다. 힘차고 장중한 글씨이면서, 이름 또한 누각 명칭으로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편액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씨다.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우암은 보수적 정통 성리학자로 북벌론의 중심인물이었다.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우암의 기질이 드러나는 글씨라 하겠다.
확연루의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온 말로, ‘거리낌 없이 넓게 탁 트여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누각 이름을 지은 연유를 기록한 「확연루기」에 의하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해 확연하며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이 특별히 ‘확연’이란 두 글자를 택했다고 한다.
확연루를 통해 들어가면 강당 건물이 가로막는데, 옆을 돌아 강당 마루에 올라서면 마루 위에 걸린 작은 편액 ‘청절당(淸節堂)’이 눈에 들어온다. 이 강당 건물은 옛 지원현(珍原縣)의 객사 건물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청절당이란 이름은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고, 편액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썼다. 이 역시 하서의 인품을 대변하고 있다.
우암과 함께 기호 학맥을 이은 동춘당 역시 글씨를 잘 썼으며, 우암과 함께 웅건한 글씨체로 널리 알려진 양송체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강당 앞 동. 서재의 ‘진덕재(進德齊)’와 ‘숭의재(崇義齋)’편액도 그가 썼다.
강당 건물 처마에 달린 ‘필암서원(筆巖書院)’ 편액은 병계(屛溪)윤봉구(尹鳳九:1681∼1767)의 글씨다. 사액 편액이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다. 병계는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수암(遂菴)권상하(權尙夏:1641∼1721) 문하에서 수학, 우암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 학자이다.
강당 맞은편에 있는 사당 ‘우동사(祐東祠)’에는 하서와 고암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편액 글씨는 주자의 글씨에서 집자(集子). 집획(集劃)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장시성(江西省) 싱쯔현(星子縣) 뤼산(盧山) 북쪽 오로봉(五老峯) 아래 중국의 4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었다. 이 서원에서는 초대 백록동서원장이었던 주자의 친필을 판각한 ‘경재잠판(警齋箴版)’을 보관했었다. 그런데 폭우로 인하여 건축물이 파손되면서, 그 판각들이 양쯔강을 따라 내려와 우리나라 서해안 강진 앞바다까지 떠밀려 온 것을 어부들이 발견하고, 이를 수집. 운반해 강진향교에 보관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필암서원 관계자들이 강진향교를 찾아가 ‘우동사(祐東祠)’ 글자를 집자하고 집획해서 편액을 제작했다고 전한다.
인종(仁宗)이 하서에게 하사한 묵죽도 보관하는 ‘경장각(敬藏閣) 편액은 정조 글씨
필암서원이 기리는 河西는 고고한 절의와 깨끗한 인품을 지닌 도학자였다.
18세 때 벌써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 항아리 秋 水 氷 壺(호)같다.’는 칭찬을 들었던 하서는 31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34세 때는 후일 仁宗이 되는 세자의 학문을 담당하는 시강(侍講)이 되었다. 이때 세자는 河西의 학문과 덕행에 감동해 손수 묵죽도 한 폭을 그려 하사했다.
36세 되던 해 仁宗이 즉위하자 河西는 큰 기대를 했으나 같은 해 7월 仁宗이 갑자기 승하했다. 이에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학문을 닦으며 평생을 보냈다. 明宗 즉위 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다. 仁宗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향리에서 일재(一齋)이항(李恒:1499∼1576),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1527∼1572)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송강(松江)정철(鄭澈:1536∼1594) 고암(鼓巖)양자징(梁子澂:1523∼1594)등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시작(詩作)에도 각별한 소질을 드러냈던 그는 1천6백여 수의 시도 남겼는데,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 늙기도 절로 하여라.”는 시조는 그 대표작이다.
필암서원 사당 앞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건물이 하나 있다. 경장각(敬藏閣)이다.
이곳에는 仁宗이 세자 시절(1543년) 河西에게 「주자대전」한질과 함께 손수 그러 하사한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다, 이 묵죽도는 훗날 河西의 높은 절의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바위 주변에 솟아 있는 대나무를 그린 이 그림에는 仁宗이 河西에게 그림을 보고 쓰라고 해서 쓰게 된 화제(畵題)도 있다. 보기 드문 군신(君臣) 합작품이다.
뿌리와 가지, 마디, 잎이 모두 정미하고 (根枝節葉盡精微)
돌은 벗인 양 주위에 둘러 있네. (石友精神在範園)
이제야 알겠다, 성스러운 솜씨의 조화를 (始覺聖神侔造化)
하늘과 땅 훈훈한 기운 속에 잘도 자라난다. (一團天地不能違)
경장각 편액 글씨는 正祖가 초서로 쓴 친필이다. ‘경장각’은 ‘왕가 조상의 유묵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河西의 덕행과 절의를 높게 평가한 正祖는 하서를 문묘에 배향코자 할 때, 급히 장성으로 파발을 보내 선왕이었던 仁宗이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내탕금(內帑金)을 내려 경장각을 세운 뒤 하서 종가에서 귀중히 간직해 온 묵죽도를 경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게 했다. 그리고 편액 글씨를 친히 써서 내렸던 것이다. 경장각 편액은 왕의 친필이어서 벌레나 새 등을 막기 위해 망이 쳐져있다.
양송체(兩宋體)
양송체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두 사람의 글씨체를 말한다.
이들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었으므로 율곡을 사숙한 석봉(石峰) 한호(韓濩:1543~1605)의 글씨체를 썼지만, 석봉체(石峰體)의 골격을 가지면서도 웅건장중(雄建壯重)한 무게와 기품을 더해 별도의 품격을 가진 서체를 만들었다.
양송체의 등장에는 배경이 있다. 석봉은 性理學者라기보다는 書藝家라고 할수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글씨가 조선의 국서체가 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 대학자 두 명이 의기투합해 새로운 글자체를 만들자 사람들은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우암에게 글을 받고, 동춘당에게 글씨를 받아 비석 등을 세우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나와 公은 8, 9살 때부터 옷을 나누어 입고 한 책상에 공부하여 머리가 흴 때까지 학문을 강마하였다. 옛날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나와 경인은 성이 같지 않은 형제’라고 하였는데, 이제 公과 나는 성도 같으니 이는 다만 부모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나의 성품은 편벽되고 응체되어 公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 비슷하지도 못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기질이 한 번 정하여져 바꿀 수 없는 것이리라.”(우암 ‘동춘당 송공 묘지’)
동춘당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같은 은진 송씨로 11촌 숙질, 즉 아저씨-조카 뻘이었다. 한 살 차이로 어릴 때부터 동문수학한 이 두 사람은 병자호란을 겪고 明 대신 淸이 들어서자 존주대의를 내세워 북벌론을 주도하고 예학의 정통론적 입장에서 예송을 통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천한, 조선 17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정치가들이다.
핏줄과 정치적 사상을 같이 하여 흔히 ‘양송’이라 하는 이들 두 사람의 글씨는 무엇이 같고 다를까. 두 사람의 서예는 인격 수양이나 도학 공부와 직결된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동일하다. 양송체는 朱子의 ‘서자명(書字銘)’ 즉 “한 점 한 획에 순일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반영하고 이는 도학의 핵심인 敬사상과 상통한다. 두 사람의 글씨는 모두 ‘석봉체’를 토대로 안진경(顔眞卿:唐709∼785)과 주자(朱熹:南宋1130∼1200)의 필법을 녹여냈다.
동춘당의 글씨가 송설체와 석봉체를 바탕으로 안진경체의 비후미(肥厚味)를 더해 유려하고 활기차다면, 우암은 안진경체를 더 깊이 받아들여 안진경체의 웅건장중미가 더욱 돋보였다. 이에 따라 양송체는 근엄장중(謹嚴壯重)하고 원만웅건(圓滿雄建)한 특징을 띠게 되었다. 또한 이때의 안진경체 수용은 조선 후기 안진경체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안진경 역시 충절이 높아 예학시대의 표상으로서 사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획질에서는 큰 차이가 나 동춘당이 석봉체의 원만하고 부드러운 필획을 구사하면서 획에 굵기를 더했다면 우암은 웅건한 안진경체에 가까워 거친 갈필(葛筆)을 구사하고 있다.
이들을 추종하는 많은 유림이 그 서체를 배워 쓰게 되는데, 이의현(李宜顯:1669∼1745)의 함안 조려신도비(趙旅神道碑:1726년), 이간(李柬:1677∼1727)의 부여 의열사비(義烈祠碑:1723년), 이양신(李亮臣:1689∼1739)의 정읍 송시열수명유허비(宋時烈受命遺墟碑:1731년), 민우수(閔遇洙:1694∼1756)의 수창 삼인대비(三印臺碑:1944년), 홍계희(洪啓禧:1703∼1771)의 완주 안심사사적비(安心寺事蹟碑:1759년)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백양사(白羊寺)
◎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내장산국립공원에 포함됨)에 있는
백제 때 건립된 절. 백양사에서는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 古佛叢林,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40여 개의 사찰을 관할.
632년(백제 무왕33)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암산 백양사라고 했으며, 고려시대인 1034년(덕종3) 중연(中延)이 중창한 후 정토사라 개칭하였다. 1574년(선조7) 환양(喚羊)이 백양사라 이름하였다. 당시 환양선사가 절에 머물면서 염불을 하자 흰 양들이 몰려오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이를 보고 사찰이름을 백양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786년(정조 10) 환성(喚星)이, 1864년(고종 1)에는 도암(道巖)이 중건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각진국사를 비롯해 만암(曼庵:1876~1946)대종사, 서옹(西翁:1912∼2003)종정 등 이름난 스님들이 거쳐 갔다.
1996년 고불총림(古佛叢林)으로 격상되었으며, 주요 건물로는 환양이 세웠다는 극락전이 가장 오래되었다. 대웅전은 1917년 만암이 주지로 있으면서 백양사 중건 때 지은 것으로, 석가모니불, 보살입상, 16나한상이 봉안되었다.
현존 당우(堂宇)로는 대웅전(大雄殿: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극락보전(極樂寶殿: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사천왕문(四天王門: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진영각(眞影閣), 보선각, 설선당(說禪堂), 선실(禪室), 요사채, 범종각 등이 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齋式)이 집전되는데 관조부(觀照部) · 전경부(轉經部) · 정근부(精勤部) · 송주부(誦呪部) · 범음부(梵音部)가 각각 행해진다.
이밖에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太能)의 소요대사부도(逍遙大師浮屠: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叢林]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로 최고어른을 방장이라고 한다.
해인사 가야총림(1967), 송광사 조계총림(1969), 통도사 영축총림(1984), 수덕사 덕승총림(1984), 백양사 고불총림(1996) 등 5개 총림이 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74.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사계 김장생이 타계한지 3년 후인 1634년(조선 인조 12년) 창건되었으며 1659년(조선 효종 10년) 사액되었다. 창건 시 김장생(金長生)을 주향으로 설정하였으며 1658년(효종 9) 김집(金集)을 추배하였고 1699년(조선 숙종 14년)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하였다.
1871년(대한제국 고종 8년)의 전국적 서원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1881년(고종 18년)에 이르러 서원이 있던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문화재]
◎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論山 遯巖書院 凝道堂) : 보물 제1569호
◎ 돈암서원유경사(遯巖書院惟敬祠)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조선조(朝鮮朝) 예학(禮學)의 종주(宗主)이다. 대궐(大闕)에서의 일이건, 사가(私家)에서의 일이건 예(禮)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金長生에게 물었고, 그의 대답이 곧 禮가 될 정도였다.
金長生은 명종(明宗)3년(1548), 서울 황화방(皇華坊) 정능동(貞陵洞)에서 김계휘(金繼輝)와 평산(平山) 신씨(申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字)는 희원(希元), 호(號)는 사계(沙溪),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어려서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禮學)을 배우고, 뒤에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워 통달함으로써 예학(禮學)과 유학(儒學)의 거두(巨頭)로 예우 받는다. 나라의 전례나 모든 행사에 의문이 생기면 모두 金長生에게 물어보고 그 해답으로 규범(規範)을 삼았을 정도이다.
金長生의 첫 번째 전환기(轉換期)는 열세 살 되던 해,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 들어가 예학을 배우면서 맞게 된다. 이때 성리학(性理學)의 기본서인 『근사록(近思錄)』을 익히면서 학문적 기초를 착실하게 쌓아 간다. 그리고 스무 살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고, 그의 정통(正統)을 계승(繼承)함으로써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맥(學脈)을 이어가는 주축이 되었다.
金長生은 이 시기에 성학(聖學)을 터득하면서 예학(禮學)에 정통하게 됨으로써 율곡(栗谷) 이이(李珥)로 하여금 특별한 기대와 촉망을 걸게 하였다. 스승 율곡(栗谷) 이이(李珥)로부터 극찬을 받을 만한 학문(學問)이었어도 시험(試驗) 운(運)은 극히 없었던 모양으로 金長生은 과거(科擧)에 응시는 하였어도 늘 실패만 거듭하였다.
결국 선조(宣祖) 11년(1578), 등과가 아닌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된 후, 순릉참봉(順陵參奉)을 거쳐 동몽교관(童蒙敎官),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있으면서 피란 온 사대부들을 구휼.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 난 이후인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남양·양근·안성·익산·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선조(宣祖) 13년(1580), 서른세 살 때 파산(破山)에 있던 우계(牛溪)성혼(成渾)을 찾아가 배움을 청한다. 이로써 金長生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세 거봉인 율곡(栗谷), 구봉(龜峰), 우계(牛溪)의 학문에 연원(淵源)을 대게 된다. 그 세 선생은 아버지 김계휘(金繼輝)와 동지이기도 했다.
金長生은 자신의 주론인 예론(禮論)을 실천하는 것으로 맡은 고을을 다스렸으므로 그의 선정(善政)은 고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또한 예론(禮論)을 실천(實踐)하는 것을 선정(善政)의 바탕으로 삼았기에 청렴결백(淸廉潔白)함으로도 일세를 풍미한다. 물론 후일의 일이지만 청렴결백의 표상인 청백리(淸白吏)로도 녹선(錄選)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말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조선 성리학(性理學)을 학문적으로 토착화(土着化)하고 있는 과정에서 沙溪 金長生은 임진년(壬辰年)의 왜란(倭亂)과 정묘년(丁卯年)의 호란(胡亂)을 모두 겪으면서 극도로 황폐해진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여 하나로 통합하고,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예치(禮治)를 바탕으로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길이 최선임을 솔선수범(率先垂範)해 보였다.
조정과 백성이 서로 禮로서 신뢰하고, 義로써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金長生의 신념(信念)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닦아서 그 성과를 알았다면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것이 사림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金長生이 추구하는 예치(禮治)에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등장한다. 광해군(光海君:15대 왕1608∼1623) 5년(1613)에 일어난 소위 계축옥사(癸丑獄事)는 그의 禮와 義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일대 참변(慘變)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른바 대북파(大北派)의 거두이자 정권의 실세인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광해군의 정통성을 보장한다는 구실로 선조조(宣祖朝)의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1562∼1613)을 사사(賜死:사약을 내림)하고, 김제남의 따님이자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1584∼1632)를 서궁(西宮:德壽宮)에 유폐한다.
그리고 그분의 외동아들이자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江華) 섬에 유배(流配)하였다가 쪄서 죽이는 참변을 저지른다. 역사는 이 사건을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덕(悖德)이라고 적었다.
沙溪 金長生은 탄식을 거듭한다.
예치(禮治)만이 나라를 다스리는 최선의 길이요, 의로운 길을 다루는 것이 품격(品格)있는 나라를 만드는 첩경(捷徑)이라고 가르쳐왔는데 조정 실세들에 의해 이 철칙이 무너지고, 한 술 더 떠서 임금이 이에 동조를 한다면 무지한 백성들은 도덕적 가치나 기준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나.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했던가. 이 때 철원부사로 재직하던 金長生은1613년(광해군5)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癸丑禍獄)에 金長生의 서제(庶弟)가 반대파에 연루됨에 따라 그도 화(禍)를 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광해군(光海君)은 장모인 정씨에게 金長生의 처단을 자문 받는다. 정씨는 金長生이 당세(當世)의 대유(大儒)인 까닭으로 많은 선비들이 따르고 있는데 만약 체포하여 치죄(治罪)하면 크게 인심을 잃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 충고로 金長生은 화를 면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모든 관직(官職)을 사퇴하고 연산(連山)으로 은퇴하여 오직 학문의 궁구에만 전념하게 된다.
金長生은 52세 때인 宣祖 32년(1599)에 필생의 역작인 『家禮輯覽(가례집람)』을 완성한다. 지금까지 가례(家禮)의 전범(典範)이었던 『朱子家禮(주자가례)』를 미완성으로 간주하고, 여러 예기(禮記)의 학설을 모아 조목별로 재해석하여 보충했음은 물론, 책머리에 도설(圖說)를 실어 고금(古今)의 의물(儀物)을 증험(證驗)할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조선(朝鮮) 예학(禮學)의 집대성(集大成)이나 다름이 없는 『家禮輯覽(가례집람)』의 특징은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예론(禮論) 정립에 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사람들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행할 때 『朱子家禮(주자가례)』를 조금씩 자신의 가문이나 현실에 맞게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정도였으므로 조선에 맞는 예서(禮書)의 출현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金長生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그랬던 것처럼 『小學』을 최고로 평가하고, 그 가르침을 종신토록 삶의 준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용(中庸)』『대학(大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등의 고전을 완벽하게 암송하여 마치 자기의 생각을 말로 옮기는 것처럼 유창하였다. 이러한 독서의 결과물이 또 하나의 명저(名著) 『경서변의(經書辯疑)』이다. 어떤 책을 독서하면 그 책의 취지를 밝히고, 의심이 나거나 석연치 못한 부분을 평설(評說)하는 한편, 친구나 문인 후생에게도 문의하여 그들의 설 까지 빠뜨리지 않고 함께 적은 책이다. 이 경서변의(經書辯疑)』는 1618년 71세 때의 역작으로 『家禮輯覽(가례집람)』과 쌍벽을 이루는 沙溪 金長生의 대표 저작이다.
金長生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벌어진 예송(禮訟)은 禮의 기준을 정치 문제화(問題化)한 것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간 노선(路線) 분립(分立)의 주요 기점이 되었다. 예론(禮論)을 탐구하는 학문이 禮學이고, 禮學의 입문서(入門書)가 예서(禮書)이며, 예론(禮論)을 정치 문제화한 사건이 예송(禮訟)이다. 金長生이 그러한 일련의 지적(知的) 풍토(風土)에 초석(礎石)을 놓았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인조 1년(1623)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 주역인 김류(金瑬:1571~1648)와 이귀(李貴:1557~1633)에 의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추천, 장령(掌令:정4품)·사업(司業:정4품) 등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행호군(行護軍:벼슬앞에 붙이는 行은 높은 품계의 관리가 낮은 직급의 벼슬에 체임될 시 붙였다)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金長生은 인조 2년(1620),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충청도 공주로 이어지는 인조의 피난길을 호종(扈從)하였다. 3년 뒤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는 80세의 노령(老齡)임에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의병(義兵)을 모집하는가 하면, 강화도 행궁(行宮)에 입시(入侍)하는 등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공손히 다하였다.
仁祖가 자신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 최명길 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定遠君:仁祖의 아버지, 훗날의 元宗 추존(追尊)]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仁祖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종2품)로 임명되는 등 仁祖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元宗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仁祖 9년(1631) 金長生은 파란으로 점철된 생애(生涯)를 마감한다. 향년 84세. 사람들은 그의 이름처럼 오래 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金長生은 살아서 이미 당대 사림(士林)의 상징적 존재였고, 국가의 부름이 끊이지 않았던 말년의 7,8년이 생애(生涯)의 전성기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金長生이 세상을 떠나자 상복(喪服)을 입은 문인(門人)이 수천 명에 이르렀고 고향인 연산(連山)의 진금면 성북리에 묻혔다.
金長生의 아들인 신독제(愼獨齊)김집(金集:1574~1656) 역시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아버지의 禮學을 완성하고, 아버지의 사후에 그 제자들까지 계승(繼承)했으니 문인들은 金長生을 老先生, 金集을 先生으로 불렀다.
그의 제자는 우암(尤菴)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해서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1606~1672),초려(草廬)이유태(李惟泰:1607∼1684),월당(月塘)강석기(姜碩期:1580∼1643),계곡(谿谷)장유(張維:1587년∼1638년), 우재(迂齋)이후원(李厚源:1598~1660),화당(化堂)신민일(申敏一:1576~1650)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등이 있고, 죽은 뒤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 등에 제향 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遯(달아날 둔[原音:돈])
1. 달아나다(=遁)
2. 숨다
3. 피하다(避--)
4. 도망치다(逃亡--)
5. 회피하다(回避--)
遁(둔)과 동자(同字).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豚(돈→둔)이 합(合)하여 이루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