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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이레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역술인이나, 각종 종교를 통하여
미래에 있을 일을 알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을 일을 예언하였던 사람들의
말에 세상은 귀를 기울이고 얼마나 정확하게 맞는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일 가운데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사람이 쓴, 백시선에 예언한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람에 관심을 받았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의사 겸 점성가의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이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노스트라다무스’로
통칭했다.) 그는 1503년 12월 14일에 프랑스 남부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유대인 가문(훗날 가톨릭으로 개종)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증인이었기 때문에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으며, 친가와 외가 모두 할아버지가 저명한 의사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린 시절에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로부터 고전과 역사는
물론이고 의학과 점성학의 기본 지식도 물려받았다고 전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4세 때인 1517년에 아비뇽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서 인문
교육을 받았고, 19세 때인 1522년에 몽펠리에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525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의사로 일했고, 1529년에
다시 몽펠리에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이와는 반대로
대학에서 퇴학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1534년에 그는 마르세유 인근 아장에
정착해서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지만, 1537년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아내와
자녀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처가에서 사망한 부인의 지참금 반환 소송을
걸고, 심지어 종교재판소까지도 불경죄로 소환 명령을 내리는 등의 악재가
계속되자, 결국 노스트라다무스는 아장을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각지로
떠돌면서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543년에 그는 살롱 드 프로방스라는
도시에 정착하고 재혼했으며, 머지않아 여러 권의 역서(曆書)와 실용서(화장과
식품 제조에 관한 내용)의 저자로 난생 처음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52세 때인 1555년에는 예언서인 [백시선]의 초판본(1-3부)을 간행했다.
이때부터 노스트라다무스는 점성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556년 여름에
파리를 방문하여 당시의 국왕 앙리 2세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 부부를
알현했다. 살롱으로 돌아온 노스트라다무스는 [백시선]의 집필을 계속했는데,
1559년에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부상을 입고 뜻하지 않게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급기야 이 사건이 그의 예언서에 나온 4행시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스트라다무스의 탁월한 예언 능력에 대한 명성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1564년에 노스트라다무스는 새로운 국왕 샤를 9세의 시의 겸
고문으로 임명되어 각종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2년 뒤에 노스트라다무스는
국왕의 밀사로 출장을 다녀오다가 통풍을 앓게 되었고, 이 질환이 점차 심해진
끝에 1566년 7월 2일 새벽, 63세를 일기로 살롱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이런 비문을 지었다. “여기 그 유명한 미셸 노스트라담의 유해가
묻혀 있다. 모든 인간의 펜 중에서 오직 그의 성스러운 펜만이 미래에
이루어질 전 세계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백시선”
노스트라다무스의 사후인 1568년에야 완간된 예언서 [백시선]은 전10부(원래
구상은 12부까지였다고 한다)로 이루어졌으며, 각 부마다 100편(7부는
42편까지만 있다)의 4행시가 수록되어 있다(원제인 프랑스어 Centuries를
영어식으로 읽어서 “(모든) 세기들”이라고 번역한 것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책이 1555년부터 3797년까지의 역사적 사건과 대규모 재난(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등등)을 예언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워낙 모호한 내용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둘러싸고 해석이 엇갈린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사후인 1568년에 완간된 예언시 [백시선]의 속표지. 이 난해한 예언시는
오늘날까지 숱한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다.
[백시선]에 수록된 예언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 서문 격으로 수록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예언시를
쓰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외부적인 힘 (…) 돌발적인
흥분을 통해 천상계의 인과 관계가 나에게 공표된다. 하지만 신성한 영감이
없다면 목적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모든 권위 있는 예언은 먼저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좋은 조건에서, 마지막으로
천성적인 소질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자신의 신비스러운 예언 능력을 어디까지나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영감이라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은 과학적이고 엄밀한
점성학의 연구를 통해 그 비밀을 살짝 엿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밤에 홀로 /
비밀 서재의 청동 제단에 편히 앉아 있노라 / 잔잔한 고독의 불길로부터 /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노라.” (제1부 1편)
노스트라다무스는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심지어
프로방스 사투리까지 뒤섞어서 4행시를 썼고, 그 순서조차도 뒤섞어 놓았다고
전한다. “공동의 선을 위해 내가 본 대변혁의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글로 적어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나는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서술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평이한 문장이
아닌 난해하고 왜곡시킨 문장을 썼다.” 이런 의도적인 난해성은 아마도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신탁이나 예언은
그 모호성으로 악명이 높았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침공하기 전에 신탁을 묻고
이런 답변을 얻었다. “너는 강력한 왕국을 멸망시키리라.” 이에 용기백배한
크로이소스는 전쟁을 벌였다가 대패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강력한 왕국, 즉
리디아를 멸망시킨 셈이 되었다. 이처럼 예언은 양면성과 다의성을 지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 즉 예언을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이 교훈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시의 해석 방법과 문제점
현재 나와 있는 노스트라다무스 관련서는 하나같이 4행시의 원본이 아니라,
해설서에 불과하다. 4행시는 막상 읽어도 뜻이 안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시에서 갖가지 해석을 이끌어내는 해설자들이 더욱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에 한참
높아졌다가 1999년 초에 절정에 도달했다가 약해졌지만, 2001년의 9/11 테러
이후로 다시 강해진다. 하지만 합리적인 시각에서 그의 예언에 대한 해석은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
첫째로 점성학의 비합리성의 문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인류가 겪을 사건이
섭리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으며, 자신은 하느님의 은총과 점성학의 연구(그는
자기 방법의 엄밀함과 과학성을 강조한다)를 통해 이를 알아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코페르니쿠스 이래 천문학이 크게 발달한 결과,
오늘날 점성학은 과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점성학이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면, 점성학에 의존해 만들어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역시 합리적 근거가 없는 셈이다.
둘째로 역사적 입증의 문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해설자들은 각종 역사적
사건이 4행시로 예언되었음을 입증하려 애쓴다. 즉 히틀러에서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에 대한 언급을 4행시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런 “적중” 사례에는 한 가지 뚜렷한 맹점이 있다. 즉
사건이 발생하기 전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예언이 해석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사후약방문”이라는 것인데, 그런 예언이라면 사실상
예언(미리 말함)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셋째로 임의적인 해석의 문제다. 이 분야의 전문 연구자 존 호그는 철자와
문장의 변형과 생략, 고어와 외국어를 뒤섞은 혼란스러운 표기법, 일반명사와
고유명사의 상호 변환, 그리고 무작위적인 순서 등을 노스트라다무스가 남긴
예언의 특색으로 잡는다. 이처럼 4행시는 해석 가능성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견강부회”가 일어나기 쉽다. 가령 오늘날의 해설자는 대부분 4행시에 나오는
‘히스터’(Hister)가 ‘히틀러’(Hitler)를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히스터’는
‘도나우(다뉴브) 강’의 옛날 이름에 불과하다.
넷째로 궤변의 문제다. 종말론이나 예언서에 대한 가장 확실한 검증 방법은
시간이다. 즉 예언서에서 말한 바로 그날이 오면 과연 예언이 정확한지 아닌지
여부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경우에는 “일천구백구십구 년의
일곱 번째 달 / 거대한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예언이 결정적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머지않아 “틀린 것은
그의 예언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었다”라는 궤변이 등장하면서, 또다시 가까운
미래에 종말의 가능성을 점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틀린 것은 예언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핑계는 모든 예언의 신봉자들이
반복하는 말이다. 문제는 이런 궤변에 담긴 역설이다. 가령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워낙 모호해서 해석이 종종 틀릴 수 있다면, 가령 어떤 해석이 정말
옳은지 여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결국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 설령 그가 “정말로” 미래를 예언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한, 그 예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스트라다무스 [NostradamusMichel de Nostredame]
- 수수께끼와 논란 속의 예언가 (인물세계사, 박중서)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일이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은 관심이 갔었고
그가 예언한 일이 이루어지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에 눈을 열어
주신 이후에 보았던 영화로 깨달은 일은 성경 말씀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애매모호한 예언서 해석으로 예수님 자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에 마지막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교회마저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신학으로 성경이 기록된 시기와 저자의 사상과 문학적인 사조로 해석
하면서 사람에게 유익한 방면으로 해석해 받아들인다는 심각성이 안타까웠습니다.
최근에는 당나라 예언서 추배도에 육십 가지에 예언 중에서 오십오 개가 적중,
나머지 다섯 가지에 예언이 있다고 하여, 관심이 있어 살펴보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에 기록한 말씀과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예언서 가운데 긍정적인 예언서는 성경 말씀과 추배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는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며,
사람이 우주 만물 가운데 있는 피조물로 깨닫게 하는 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
성령으로 동행하며, 마음의 중심을 살피고 뜻과 계획을 알려주어 있는 일입니다.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5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9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16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9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
20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아브라함은 밀가가 자식들을 낳았다는 말을
들었다. 밀가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 사이에서 아들들이 태어났는데,
21 맏아들은 우스이고, 그 아래로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과 같은 동생들이 태어났다.
23 브두엘은 리브가의 아버지이다. 이 여덟 형제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과 그 아내 밀가 사이에서 태어났다.
24 나홀의 첩 르우마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 등 네 형제를 낳았다.
창세기 22 : 1 ~ 24절 - 새번역성경
하나님은 왜 믿음의 조상과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을 확인하려고 모리아 산에서
신본주의로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이러한 명령은
어쩌면 하나님 아버지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사랑은 연민이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선과
악을 죄를 지어서 갖게 된, 하나님과 같은 마음, 양심 곧 이성으로 오감에 의하여
생기는 오욕칠정에 욕구가 선인지, 악인지를 자유의지로 판단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게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심판의 날에는 삶을 산 일에 책임을 묻고
하나님과 성 삼위일체가 되어 살든지, 사탄과 불바다에서 영원한 고통 가운데서
살든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으로,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영원한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와 책임을 지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혼의 잠에서
깨어서, 인생에 의미를 알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리아
산, 곧 예루살렘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본주의 믿음을 확인하셨던
것처럼, 창세 이후로 모든 사람의 믿음을 확인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하여, 죄에서 회개하는 삶으로 악인조차 회개하고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33장 말씀으로 파수꾼에 임무를 말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의 삶을
통하여 죄의 값을 치러주셨고, 하늘나라에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파수꾼에 임무를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동행하며,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라
성령의 파수꾼에 임무를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 기록하여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믿음 가운데 동행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 성령을 거스르는 삶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이 같은 죄에서 구원하는 은혜가 임마누엘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 아브라함에 자손들이 전쟁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일은 모리아 산, 예루살렘을 두고 일어나고 있으며, 크게는 이슬람 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전쟁으로 하나님께서 이들의 조상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경고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이는 믿음에 조상 아브람에 인본주의와 아브라함에
신본주의에 싸움이기에 창세 이후로 모든 영혼의 믿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확인
하시면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획을 따라서 이루심과 같이 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재림으로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영혼의 잠을 자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는 일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
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십 년이
지난 뒤이다.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
5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6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다.
7 주님의 천사가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은 수르로 가는 길 옆에 있다.
8 천사가 물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9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10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11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12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13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
14 그래서 그 샘 이름도 브엘라해로이라고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그 샘은 지금도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
15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다.
16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
창세기 16 : 1 ~ 16절 - 새번역성경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창세기 15장 말씀으로 이삭에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 년 동안 종살이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본처 사래에 생리가 그친 후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본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사람에 마음의 생각과 같지 않았고, 십삼 년이 흘러
아브람에게 흠없이 살라고 하시며, 새로운 이름, 아브라함이라고 하시며,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행하라고 이스마엘을 비롯하여 모든 집안 남자에게 행하라고 하며,
신본주의적인 아들 이삭을 여자로서 기능을 잃은 본처 사래에 이름을 사라라고
개명하여 주시면서, 일 년이 지날 때 이삭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사람에 마음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는 웃었고, 이 때문에 이 일을 잊지 말라고 아이에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이삭이라고 부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에 초림을 영접할 수 없게 하는 일로, 법 위에 사랑의 법을 공생애
삶으로 몸소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과 계획을 사람에 마음의 생각을 뛰어넘는 일로, 마음의
중심을 확인하여, 다시는 배반하는 일이 없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 중에
성령께서 동행하시며, 순종하려는 사람에게 뜻과 계획을 깨닫고, 순종하게 합니다.
이는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한 양심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판으로 책임을 묻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관계없이 사람은 모두가 자아(自我)의 생각으로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선한 양심으로
용서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아야 하며,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성취하셨고, 성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사야서가 기록되고 약 700년 후에, 말씀의 성취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며, 삶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정경 66권에 말씀은 여호와이레에 관한 기록으로, 불순종하는 죄로부터 영원한
삶을 살게 하는 순종에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삶으로 고난과 환난이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하는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에 은혜가 여호와이레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닌 숫양으로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고, 이 숫양은 예수님으로 구원하는 여호와이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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