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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파파보이의 반란과 율법>의 줄거리:
파파보이의 반란과 율법
(롬3:19~20)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파파보이의 반란과 율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우선 본문을 따라서 내용을 개괄적으로 요약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민들에게 주신 이유가 그것을 잘 지킬 것이라 기대하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이해하자면.
그러면 왜 주셨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지금 죄인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9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시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본래 죄인인 상태에 있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못 깨닫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현재 죄인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자, 이렇게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의도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데, 이 율법이 인간의 어떠한 내부적인 상태 속에서 주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파파보이의 반란과 율법>이라는 제목 하에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결혼적령기에 달한 아가씨들이 제일 곤란해 하고 난처해하는 상태가 바로 마마보이 파파보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답이 없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답이 없다는 것은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일류대학을 나오고 훤칠하게 인물이 잘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마보이입니다.
다른 조건은 다 좋은데 마마보이이면, 이 마마보이라는 것은 고칠 길이 없다는 거예요.
파파보이라는 이 점이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일류대학을 못 나왔어도, 가만 사귀어보니 사람이 근성이 있고 생활력이 강하고 사막에 갖다놓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한번 고려해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지금 형편이 너무 안 좋지만, 미래가 보이면 한번 고려해볼 필요가 있어요.
근데 다 좋아도 마마보이면 이건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마보이 파파보이가 무엇입니까?
주체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그런 청년입니다.
어떤 상황에 마주치면 그 상황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고 대처해나가지를 못하고, 모든 상황을 만날 때마다 핸드폰으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전화 드려가지고 ‘나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어떻게 해야 돼?’ 하고 일일이 물어보는 사람.
여자 친구가 여름 커플 티 하나씩 사 입자고 하면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엄마, 나 여자 친구가 여름이라고 커플 티 하나씩 사 입자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이거 여자 친구는 미쳐버리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여자들 입장에서 볼 때 제일 찌질이같이 느껴지는 이 파파보이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는 겁니다.
창조의 원안대로 인간이 계속 살았다면 모든 남자 모든 여자는 파파보이 파파걸로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얘깁니다.
그 파파보이 파파걸이라고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가 에덴동산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얘깁니다.
선악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체적으로 인격으로 인간은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가 있다는 것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가 없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내게 주어지는 상황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판단할 수가 없으니까.
주체성이 별 겁니까? 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주체성이 있는 건데, 선악과를 만들어놓고 사람은 주체적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그게 무슨 뜻인가?
주체적인 기질을 가지고 내 주체성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일에 사용한다 이겁니다.
쉽게 말하면 주체적으로 주체성을 반납하라는 얘기에요.
억지로 주체성을 반납하는 건 로봇이지요, 아예 주체성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로봇인데, 인간으로 지음 받아서 주체적인 인격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주체성의 대표격인 행동을 하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결심하라는 얘깁니다.
주체적으로 파파보이 파파걸로 살기로 결심하는 삶, 이것이 바로 에덴에서의 삶이었다는 거예요.
우리 자식들 입장에서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떠나가야 됩니다, 언제까지 아버지에게 의존해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셔야 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 위한 관계, 이 관계가 가능하게 유지되도록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바로 선악과라는 거예요.
주체적으로 날마다 이 선악과 시스템을 받아들여서 내가 에덴동산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고 상황만 주어지면 하나님께 전화해서 ‘하나님, 나 이런 상황인데 이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돼요?’ 이렇게 나의 판단적 주체성을 다 반납하며 사는 것이 바로 에덴의 삶이고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악과라는 시스템이 도입이 되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사탄의 소원이 뭐였겠어요?
뱀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탄의 소원은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서는 거예요.
함께하기 위한 시스템을 파괴하는 겁니다.
부귀영화를 우리가 누리는 것, 우리가 지금 바라고 있는 이 세상적인 삶에서의 형통 따위는 뱀은 얼마든 주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줄 수 있는 한에 있어서.
그까짓 것 문제가 될 게 없어요, 뱀에게 아까울 게 없습니다.
뱀이 아까워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함께하느냐는 거예요, 왜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파파보이와 파파걸로 사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뱀이 꾄 거예요.
그래서 일어난 일이 아담과 하와의 파파보이 파파걸로서의 반란입니다.
파파보이의 반란 파파걸의 반란, 이것이 바로 타락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어떻게 변합니까?
주체적으로 선악을 판단하며 사는 삶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이제는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하나님아버지를 향하여 파파보이 파파걸로 사는 사람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 거예요.
자, 이렇게 선악과를 통해서 파파보이의 반란이 일어난 상태에서 율법이 주어진 거예요.
이걸 다시 한 번 봅니다.
타락 전에 파파보이로 살고 있었던 상태, 이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세 가지 요소를 기억하시면 돼요.
마음이 있고 몸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파파보이로 살 때는 주어지는 상황을 몸으로 만납니다.
몸으로 만나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마음이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몸에 붙어있지 않습니다.
몸이 상황을 만나게 되면 마음은 그 상황에 대해서 떨어져 나와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상황에 대해서 판단하시면서 대처방안을 알려주시고 내가 할 것은 내가 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처리해나가십니다.
이게 바로 타락 전의 상태였어요, 파파보이의 삶과 똑같은 거예요.
‘엄마, 여자 친구가 커플 티 하나씩 사 입자고 해, 사 입을까 말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모든 상황을 엄마 대신에 지상의 아빠 대신에 하나님께 마음이 먼저 가 붙어버리는 겁니다.
타락 후에는 몸이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몸이 사람을 만납니다, 몸이 사물을 만납니다.
그때 만나는 사람과 사물과 상황에 대해서 마음이 몸에 붙어버립니다.
그래서 몸이 만나는 것을 마음이 직접 판단해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가 타락 후의 상태요, 주체적인 인간이 된 상태고, 파파보이의 반란이 일어난 상태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면 이 두 경우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어려움이 생겼다, 혹은 승진 같은 바람직한 일이 생겼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 경제적인 여유가 찾아왔다, 자녀문제가 형통한다, 자녀문제가 불통한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타락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는가 하면, 내가 몸으로 만나는 이 상태들에 대해서 마음이 몸에 붙어있지 않으면서 직접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 이게 뭐지?’ 그리고 하나님께 전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잔고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이렇게 물어봤던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분간 그 상태가 되게 좋은 상태야, 잔고가 하나도 없는 게 너에게는 굉장히 필요하고 유익한 거야!’ 이렇게 얘기하시고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잔고가 없게 돼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았던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잔고가 없는 게 좋은 시간이 지나면, 어디선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돈이 또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또 그 돈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 돈이 들어왔어요,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그 돈은 좋은 거야, 그 돈은 이렇게 저렇게 써라!’ ‘아, 알았습니다, 그렇게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파파보이로 살 때는 걱정이 없는 것이 천지를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로 계시면서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직장에서 부장님이 나를 잘 대해 주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다 대처해나가실 그런 길을 가르쳐주시고 내가 할 것 말고는 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었느냐?
돈이 없다고 하면, 몸이 돈이 없다는 상황을 만나자마자 내 마음에 큰일이 납니다.
돈이 좀 있으면, ‘아, 마음이 든든하네, 한동안 걱정 없이 살겠네!’ 내가 판단을 해버립니다.
이게 바로 죄악의 상태라는 거예요, 이 죄악의 상태를 모르고 산다는 겁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있으면서 몸이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내 마음이 직접 판단해버립니다.
이 상태가 바로 파파보이의 반란의 상태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의 원안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상태인데, 모든 세상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붙어있으면서 몸이 만나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주체적으로 이건 좋다, 나쁘다, 개선의 여지가 있다, 없다, 판단하며 살고 있는 그 상태를 자연인의 상태라고 얘기하면서 그게 죄적인 상태라는 걸 모른다는 얘깁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언제 성립하느냐?
나라의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한 것을 했을 때, 하라고 한 것을 안 했을 때, 이렇게 행동적인 범죄의 사실들이 나타날 때만이 우리는 죄라고 하는 것을 걱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동으로 죄를 짓기 이전에 먼저 우리는 이미 죄인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 어떻게 주어집니까?
모든 사람이 자연인의 상태라고 생각하고 죄인의 상태로 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선민의 가계가 형성이 되고, 선민들이 번성해나갑니다.
그런데 이 선민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선민이 아닌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반란을 일으킨 파파보이의 상태, 파파보이가 더 이상 아닌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찰싹 달라붙어가지고, 마음이 하나님과 달라붙어서 몸으로 나가야 되는데, 마음이 몸과 달라붙어가지고 삶으로 나가버리고 마는 이런 모습 속에서 선민이 선민으로 택해집니다.
그러니까 몸에 의존되어서 몸을 통해 접하는 모든 상황에 대해 주체적인 사람이 돼서 살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들을 선택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유는 에덴의 삶을 회복하시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게 바로 구원이고.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께 가서 달라붙어야 될 사람들이 몸에 가서 달라붙어있는 상태가 죄인 줄 알아야 어떻게 바꿔보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지든 할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자연인의 상태라고 하는 몸과 마음이 묶여있는 이 상태가 죄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겁니다.
지금 이 파파보이 반란사건을 우선은 놔두시는 거예요.
그것을 아무리 잘못했다고 이야기해봐야 잘못이라고 깨닫는 자들이 없으니까 우선은 그 상태를 놔두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봐라, 선민들에게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상태? 좋지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상태를 살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부귀영화를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 그래서 구약에서 말하는 축복의 내용과 신약에서 얘기하는 축복의 내용이 바뀌어버린 거예요.
팔복이 세상적인 오복과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는 겁니다.
타락한 상태에서 좋아하는 가치들을 하나님께서 일단은 인정하십니다.
‘그래, 너희가 돈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걸 좋은 거라 생각하고, 이 땅에서 계획하는 일들이 다 형통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걸 좋은 거라고 치자! 너희가 내 마음에 들게 살면 너희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것들을 내가 줄게!’
그게 좋은 것들도 아니에요, 타락한 상태에서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일단 따라주신다 이겁니다.
즉, 자신이 몸에 안 좋다는 콜라를 계속 먹겠다고 우기니까 ‘네가 10시간 공부하면 콜라 줄게!’ 그렇게 공부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콜라 마시고 싶은 마음에 ‘내가 10시간 공부할래, 그래서 콜라 먹어야지’ 하고 10시간 공부하겠다고 달려들어 봤는데 도저히 10시간 공부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율법이라는 거예요.
그래놓고 6시간쯤 있는 힘을 다해 공부하다가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나가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엉엉 웁니다, 왜 나는 못할까?
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인의 상태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 상태가 죄라는 걸 깨우치기 위해서 일단은 죄의 상태를 묵과하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면 너희가 내 마음에 들어서 의를 얻기 때문에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 세상의 돈, 건강, 장수, 형통을 다 주겠다’고 했는데 율법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왜 지켜지지 않느냐?
먼저 첫 번째 계명인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랬는데,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마음에 들려고 하는 이유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인 겁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질 수가 없는 거예요.
십계명이라는 것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좋아할 때라야만 지켜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돈을 좋아하고 있고, 오래 사는 걸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 마음에 들어가지고 이 모든 원하는 것들을 다 얻겠다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니까 이게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고 지켜지지도 않는다는 얘기에요.
왜 안 지켜질까요?
좀 더 자세히 말해보면, 지금 내 마음은 몸에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느끼는 이 세상으로부터 내 마음속으로 소원이 들어옵니다.
마음과 몸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몸을 통해서 소원이 들어와요.
‘돈이 있으면 좋겠다, 좋은 차도 사고 좋은 집도 사고…’ 다 몸이 있기 때문에 느끼는 소원이에요.
귀신들은 이런 소원 안 가져요, 귀신이 벤츠 타고 싶어 하는 것 보셨어요?
귀신이 명품 백 들고 다니고 싶어 하는 것 봤어요?
귀신이 왜 서울대학을 들어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게 다 몸이 있는 존재들의 소원입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붙어있으니까 마음에 생기는 모든 소원들이 다 몸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에요.
근데 하나님의 율법은 내 몸과 마음이 붙어있는 연합 상태 밖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율법으로 주셔도 그 율법보다도 항상 몸으로부터 솟아올라서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소원이 앞서 있으니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갖고 싶어요, 몸으로부터 소원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밧세바가 예쁘게 생겼습니다, 몸으로부터 소원이 올라옵니다, 분명히 간음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떡합니까? 몸이 더 가까워요, 몸으로부터 올라오는 소원이 더 가까우니까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그랬지만 몸으로부터 올라오는 소원이 더 가까운 거예요.
‘내가 왕으로써 이게 발각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 우리야를 죽여야 되겠다!’
그러니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뿐만이 아닙니다.
방학이 되면 모든 아이들이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을 세우지만 3일을 못 지키는 거예요.
계획은 밖에 책상 앞에 써 붙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몸이 내 마음에 찰싹 달라붙어서 몸으로부터 소원이 일어납니다, ‘좀 더 자자, 방학인데!’ 지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의를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율법이 지켜지지 않아요, 3천 년 동안 율법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왜 안 지켜질까? 들여다봤더니, ‘아, 내 몸과 마음이 붙어있구나, 그래서 몸에서 비롯되는 소원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보다 항상 내 마음속에 먼저 전달이 되는구나, 아, 이 상태가 바로 죄로구나! 내가 이 상태가 죄인 걸 모르고 몸에서부터 비롯되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 이것 이루어주세요, 하며 살았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라는 얘깁니다.
이걸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렇게 율법을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내 존재의 구조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고, 이걸 알아야 ‘내 존재 구조가 잘못 되었구나, 마음은 몸에 붙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붙어야 되는 것인데, 몸에 먼저 붙어버린 바람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이룰 수가 없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정말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셨던 참된 구원의 길인 복음으로 마음이 돌아설 수가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몸과 마음이 연합되어 영원히 함께할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가지고 몸으로 만나지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반응하는 이 어그러진 주체성으로부터 도저히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느낄 때 드디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주셨던 겁니다.
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왜? 율법을 지켜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 이 세상의 오복을 율법을 지키면 주신다고 했으니까, 그 복을 받겠다고 우리가 타락한 상태에서 판단하는 죄를 통해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돈이 좋다, 건강이 좋다고 판단한 상태에서, 그 좋은 것들을 주시겠다고 하니 기를 쓰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해봤지만 안 돼서, 문제가 어디 있나 보고 나의 존재의 구조가 죄적인 상태임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와 원래의 파파보이 상태로 영원한 에덴을 살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유하시는 초청장이 바로 율법을 제시하신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율법이라는 게 그 의도가 참으로 감사한 것이 아니겠어요?
우리가 지키지는 못하지만 너무너무 감사한 것 아닙니까?
이 감사한 율법을 주신 그 의도, ‘파파보이 파파걸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면서 십자가로 향할 때 오늘 하루가 정말 복된 에덴의 회복의 하루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도와주세요!
주신 율법 앞에서 단순히 내가 문자적으로 율법 따라 행위를 못할 뿐 아니라, 행위 이전에 나의 존재의 구조 자체가 죄적인 상태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로 향할 수 있게 하심으로 오늘 하루 파파보이 파파걸로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