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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바꾸는 사랑
창세기 50:15~26
지난 시간에 야곱이 세상을 떠나게 된 일을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요셉의 형들에게는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절에 보세요.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여 염려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요셉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가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죄를 느끼는 마음과 용서하고 잊어버린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기들만이 가지는 생각이 있고, 요셉의 호의에 대해서 그 진지성을 의심하게 한 것입니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리라”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안전함을 느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 지금에 와서는 그들은 요셉으로부터 닥쳐올 원수 갚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는 잠언의 말씀은 옳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네 죄가 너를 찾아 만난다.”고 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요긴한 때 가서 만납니다. 우리 내려오는 말에는 “도둑놈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고,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의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공포증을 자아내게 하며, 아무런 두려울 것이 없는 곳에서도 깜짝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모든 사람을 의심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한 다음에 하나님 만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숨었습니다.
가인도 그 동생 아벨을 죽인 다음 창세기 4장 13절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심이 우리를 가책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공손히 조아려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사람을 시켜서 요셉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16절과 17절을 보세요.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어릴 때 꾼 꿈 그대로 이제 요셉 앞에서 저들의 죄를 뉘우치며 그들의 전과를 아뢰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소서.” 그들은 요셉의 발앞에 엎드려 그의 처분에 맡깁니다. “우리도 당신의 종이니이다.”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죄와 우리가 은총 입기를 희망해서 용서받은 죄까지도 뉘우치며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바랄 때 우리는 그의 종이 될 것을 약속해야 합니다. 17절에 “우리는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이니이다” 이때에 요셉은 큰 동정심을 발휘하여 형제들에 대한 화해와 사랑을 다짐하며 그의 동정심을 나타냈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들을 때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형제들이 자기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요, 그들이 종의 자세로 복종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는 순간 자비스러운 마음에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형들은 요셉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했습니다. 이때 요셉은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두려워 마세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여기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복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안되는 일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20절에 뭐랬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 순간 요셉은 지나온 자기의 과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일, 이상한 꿈을 꾸어 이야기했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샀던 일, 결국 그것 때문에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던 일, 웅덩이에 던짐 받았다가 애굽 가는 대상에게 팔려 가게 되었고 보디발 장군 집에서 종으로 사서 거기서 일했던 일, 거기서도 무서운 시험을 받았으나 잘 이겼는데 결국은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하게 된 일‧‧‧‧‧‧.
이런 과거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 같이 요셉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나 할 정도였는데,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해 주신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았습니다. 베드로 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우울한 생각과 감정을 씻어 버리고 그 대신 맑고, 신선하고, 긍정적이며 건전한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둔탁하고 무거워진 공기를 방안에서 내 몰고 맑고 신선한 공기로 바꾸어 넣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생각을 마음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이 말씀의 뜻은 그 날에 있었던 상처나 후회, 우유부단한 행동을 그대로 가지고 잠자리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그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더 강해지고 새로운 기분으로 변하여 우리의 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밤에 잠자리에 들 때 그날에 겪은 실패나 실수, 근심과 걱정, 공포와 무기력감, 좌절감 같은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일의 삶의 성패가 오늘 저녁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상스럽게도 이런 유감스러운 일에만 집착하여 어두운 면을 발산시키지 못하고 삽니다.
만일에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면서 형들에 대한 원망과 불평 속에 잡혀 지냈고 애굽에 가서 일하면서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일을 제대로 했겠습니까? 그가 비록 종의 몸이지만 보디발 장군 집에 있을 때 그 집에 복이 임했다는 것은 그만큼 요셉이 열심히, 신실하게 일을 잘 보았다는 결론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가정에서 매일매일 생기는 쓰레기를 어떻게 하십니까? 쓰레기통에 모았던 것을 비닐 봉지에 담았다가 쓰레기 차가 와서 저 멀리로 가지고 가서 쏟아 버립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쓰레기 같은 생각과 사건을 다 쏟아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로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주님께 아뢰세요.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모든 것을 주님께 아뢰세요. 쏟아 놓으세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기도의 생활에서 오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기도회가 끝나면 왜 남아서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놓으라고 그럽니다. 아버지 앞에 나오실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계속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고요하게 평안히 밀려 올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눈을 감고 그 열려진 창문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고요의 바다를 바라보세요. 우리 마음 속에 있던 더러운 공기는 사라지고 신선하고 맑은 바닷가의 미풍이 밀려들어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얼마 있지 아니해서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새해를 맞기 전에 그 동안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무거운 생각이나 사건을 다 떨쳐 버리고, 주님께 맡겨 버리고 새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 채우십시다. 요셉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마음 속에 희망으로 가득 채우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과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을 가장 미워한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처지와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동안 절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3장 5절에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중에 큰일을 베푸시리라”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큰일을 베푸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캄캄하게 구름 덮인 밤하늘 구름 사이로 비치는 별빛을 찾는 것이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 사도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지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나는 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하루를 시작할 때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희망에 찬 생각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그리하면 이 커다란 가능성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희망에 찬 기도를 드림으로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하시는 일이 힘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긍정적인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됩니다. 따라서 멋있고 즐거운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일에 더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와 같이 건설적이며 만족스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찾게 될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를 억누르는 긴장으로부터 열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계획과 생각에 열중한 나머지 우리의 게으른 마음 속에 찾아와 큰 긴장을 야기시키곤 하는 분이니 조그마한 문제 같은 것은 자연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희망에 찬 마음은 우리에게 활기를 안겨 줍니다. 이 희망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요셉은 소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에게 닥치는 모든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 보면 대개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실망이란 적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반대에 부딪치고 왜 그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이유를 들을 때 우리 자신도 부정적인 큰 혼란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마음 속에 항상 밝은 소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부정적인 생각의 화살을 막기 위하여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신 말씀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낙심과 좌절에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기억하세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세상에 아무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만일에 두렵고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이렇게 확신함으로써 걱정,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 얼마나 담대한 말씀입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도 이 말씀을 꼭 믿으십니까? 요셉이 성공하고 승리한 까닭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오고 큰 산이 가로막힐 때에도 포기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며 뚫고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약속된 승리가 보장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정적이고 추한 생각들을 고상하고 긍정적인, 그리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형들을 향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요셉의 생애는 한 마디로 파란곡절의 일관이었습니다. 너무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런 가운데서도 불평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날개를 펴고 공중에 떠 있는 새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새는 날개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바람에 기대어 그 기류가 주는 압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새 있는 쪽으로 불어오면 새는 거기에 의지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가는 대신에 바람에 의지하여 편히 쉬는 것입니다.
압력과 긴장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활력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빌립보 1장 12절 이하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겪은 악조건을 원망과 시비로 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복음전파를 위하여 선용했습니다. 바울이 감옥 안에 있으면서 쓴 편지는 그가 자유스러운 몸으로 평생을 복음 전해도 다할 수 없는 많은 성과를 오는 세대에 가져오고 있습니다. 바울도 말하자면 악을 선으로 바꾸는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말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대하시는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그 택하신 자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말은 세상을 사랑하거나 거기에 집착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지 성령의 은혜는 성도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선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의 지나온 모든 일이 힘들고,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한 일이지만 이 모든 일이 합력해서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의 억울한 일까지도 합해서 오히려 크게 축복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인간의 미움을 이깁니다. 인간의 모략과 중상을 이깁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도 초월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크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고난도 초월해서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해야 합니다. 요셉이 얼마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협력했습니까? 어떤 불행 속에서도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불평하며 살았다면 평생 종으로 살다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양심적인 생활, 최선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가 현재는 불행하게 보이더라도 이 불행까지 큰 축복으로 바꿔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