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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삼규 목사
최근 미국 기독교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성인의 비율은 선진국 중에서 미국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시간 대학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주 드려지는 예배나 종교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전체 성인 미국인 인구의 44%인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전 인구의 38%인 캐나다와, 27%인 영국 그리고 21%인 프랑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며, 이밖에 독일은 14%, 일본은 3%, 러시아는 25%인 것으로 각각 조사되었습니다.
이 조사를 실시한 로널드 잉글하트 연구원은 미국이 이처럼 다른 선진국들보다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은 노령인구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곳으로 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이나 이루어 놓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부족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 줍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가 그 본질은 결여된 채 형식적이요, 가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지 아니하시며 그런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사 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때 솔로몬이 지은 성전도 불에 타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중심의 신앙,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구심점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생활을 하던 많은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진 창문을 열고 하루 세 차례씩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하려고 하였던 것이 무엇이었을 까요?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지 보이는 건물의 회복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도 성전을 건축한 후에 봉헌 기도를 드리면서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대하 6:18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우리 한국 개신교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세계적인 10대 교회가 한국에는 즐비합니다. 건물의 크기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형교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대형교회를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건물의 크기나 인원의 많고 적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어떤 예배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건물의 크기로, 또는 인원의 많음으로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웅장한 건물을 지어 성전으로 봉헌한다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은 그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 말씀을 보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보좌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판으로 삼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눈곱만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예배자
1)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본문 2절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재산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 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 자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할 구주를 기다리며 사는 성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심령의 전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높은 지위에 앉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더 좋은 가치와 보배로운 것들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큰 교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큰 교회 다닌 다고 지위가 높아집니까? 자기의 가치가 상승합니까? 유명한 사람이 됩니까? 오히려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신앙, 사회 생활 때문에 많은 사람들 속에서 드러내놓지 않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 가면 누가 십일조를 하는지, 누가 주일성수를 하는지, 누가 어떻게 사는지 금방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곳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알만하면 옮겨다니는 나그네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의 영적인 빈곤을 인정하는 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영적인 빈곤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과 궁핍함을 알고 그것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채움 받기를 갈망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온갖 쾌락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사모하고 말씀과 은혜를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급한 심령,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갈급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린 심령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배부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2)심령에 통회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2절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라고 했습니다.
통회는 죄를 깊이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통회'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치다, 때리다, 죽이다"입니다. 구약 성경에 약 500회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니느웨 백성들이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연약하여 죄를 범하여도 진심으로 통회하면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미7:19)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면 깊숙이 숨은 죄성과 부패함을 알고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마음에 찔림을 받고 뉘우치고 고치고자 몸부림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를 찾지 아니하시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똑 같은 죄인이었지만 사울은 자신의 죄를 통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그 자리에 엎드려서 통회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침상이 눈물로 뜰 정도로 눈물의 회개를 드렸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3)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사람입니다.
본문 2절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떠는"이라는 말은 "떨다, 진동하다, 두려워하다, 놀라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는 떤다는 것은 '전율'을 느낄 정도의 떨림을 의미합니다.
스 9:4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스 10:3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사 66:5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요시야 왕은 옷을 찢고 통곡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왕이 율법 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왕하22:11),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왕하22:19)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들으면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탄식해야 합니다. 위로와 기쁨을 받아야 합니다.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말씀을 두려워하며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가슴아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앞세우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으며 실천하기를 애쓰고 노력하는 성도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고 계시며 이런 예배자들을 권고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예배자, 심령에 통회하는 예배자, 말씀을 들을 때 떨림으로 받는 예배자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심정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갈급한 심령으로 나오셨습니까?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채워주실 것입니다. 통회하며 자복하는 심령으로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싸매어 주시기 소원하십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두려움이 없다면 떨림이 없다면 양심이 무디어진 사람일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있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예배자
우리는 앞 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권고하시는 예배자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심령에 통회하는 사람, 말씀을 인하여 떠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가짐이나 바른 자세를 가지지 않고 제물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하실 까요?
사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포로 귀환 후 세속화한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로 전락하진 않았지만 하나님 예배에 매우 부주의하고 소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멀고 절고 병든 짐승을 희생물로 바쳤습니다(말 1:8, 13). 그들의 제사는 이처럼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희생물을 눈여겨보지 않았고 중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제사를 존중하시고 중시하실 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형식적인 제사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잠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나 제물 자체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았습니까? 가인의 제물보다도 그 인격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악인이었습니다.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께서 열납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드리는 예물 이전에 그의 인격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가 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자기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택한 길은 자기의 악한 마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의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증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행위가 악하고 부도덕했으며, 하나님이 명심하신 길보다 죄의 길을 택했고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실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제사를 하나님께 역겹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 1:1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지 못할 때 어떤 형벌이 임할까요?
사 66: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1)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신다.
음탕한 죄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간음이 더욱 무서운 범죄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2)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신다.
시 34: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물질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으며,
전쟁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지 못할 때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징벌을 내리시는 분명한 이유를 4절 하반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응답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 하십니까?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하지 않으며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십니까? 우리 낙양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