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1장
<하나님 나라 역사의 관점>
1. 에스더서의 역사적 배경
페르시아의 전성기는 고레스 대왕 이후 등장한 다리우수 1세에(다리오, BC 522-486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다리우스는 모든 점에서 유능한 통치자이며 고레스의 훌륭한 후계자로 판명되었다. 그는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해안까지 통치권을 확장시켰다. 다리우스는 제국 전체를 20개의 속령으로 나누어 통치했고 지방의 태수들에게는 준 자치적인 통치자로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시키기 위해 운하를 건설했고, 제국 전체에 걸쳐 용이하게 이동하기 위한 도로망을 구축했으며 법률의 개혁과 금융, 상업, 공업의 신장과 표준 화폐제도 등을 도입하는 등 페르시아의 최대 전성기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가장 야심적인 계획이었던 헬라 정복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계획을 위해 수 년 동안 준비했지만 마라톤(Marathon) 전쟁에서 패배의 쓰라린 맛을 보고 말았다. 다리우스의 왕위를 계승한 아들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는 히브리어식 이름, BC 486-465년)는 다리우스가 죽기 전에 발생한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그리고 BC 482년에는 바벨론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그는 바벨론의 에사길라(Esagila) 신전을 파괴하고 마르둑 신상을 녹여서 없애 버렸다. 그리고 바벨론을 피정복 지구로 다루었다. 어느 정도 제국의 평화를 되찾게 된 아하수에로는 부왕 다리우스가 실패했던 헬라 침공에 다시 눈을 돌렸다.
아하수에로는 즉시 헬라 침공 계획을 수립하고 최종 작전을 점검하는 일종의 작전 회의 성격을 가진 대대적인 연회를 6개월에 걸쳐 베풀었다(3-4절). 아하수에로는 20개 속령의 총독과 127도의 방백과 각 지방의 귀족 및 관리들을 교대로 초청하여 피로연과 연회를 베풀며 자신의 권세와 부와 영광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7일 동안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 백성들을 고무시킬 목적의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게 되었다(5절).
7일간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아하수에로는 백성과 방백들 앞에 왕후 와스디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해 한껏 단장하고 잔치 자리에 나오도록 초대하였다. 그러나 왕궁에서 부녀들을 위해 잔치를 배설하고 있던 와스디는 왕의 초대를 거절하고 말았다. 이 일은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 아하수에로의 심경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12절).
당시 아하수에로는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7명의 방백들에게 왕후의 문제를 처리할 방안을 상의했다. 그러자 그 중 하나인 므무간이 남편의 말을 거역한 본보기로 와스디 왕후를 폐위함으로서 제국 전역에 걸쳐 모든 아내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하수에로는 이 말을 받아들여 와스디를 왕후에서 폐위하고 제국 전역에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라”는 등의 조서를 내렸다(22절).
이후 아하수에로는 BC 480년 헬레스폰트(Hellespont)에 다리를 건설한 다음 대군을 거느리고 야심에 찬 헬라 정복을 꿈꾸며 마게도냐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는 테르모필레(Thermopylae)에서 영웅적인 스파르타 군을 제압하고 아테네를 점령한 뒤 아크로폴리스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유명한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대패하였고 페르시아 함대 3분의 1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어 BC 479년에는 플라테아(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는 헬라군에 의해 참패되었고 믿었던 페르시아 함대 역시 사모스(Samos) 부근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결국 아하수에로는 부왕 다리우스가 실패한 헬라 정복에서도 역시 쓴맛을 보고 말았다.
당대 최고의 부와 군사력과 통치권을 자랑하던 페르시아는 헬라 원정의 실패로 말미암아 점차 기울어 가고 있었다. 페르시아는 200여 년 동안 존재했지만 실지로 세계의 패권국으로 그 위용을 자랑한 것은 고레스(BC 550-530년)와 다리우수(BC 522-486년) 시대였을 뿐이며 아하수에로는 무능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아하수에로는 BC 466년에 재차 헬라 정복을 시도했으나 유리메돈(Eurymedon)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 후 아하수에로는 암살되고 그의 작은 아들 아닥사스다 1세(BC 465-424년)가 왕위를 계승했다.
2. 역사를 보는 성경 기자의 관점
에스더서는 아하수에로 왕이 헬라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연회를 개최한 사건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연회가 끝날 무렵 아하수에로는 제국의 백성과 방백들 앞에 왕후 와스디의 미모를 자랑하기를 원했지만 와스디의 거부로 이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 일로 아하수에로는 격분이 되었고 그가 자신의 최고 조력자들과 상의해 내어놓은 해결책은 왕후를 폐위하고 제국의 모든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반포한 것이었다.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아하수에로의 명령은 절대적인 위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령은 왕후조차 거부할 수 있는 정도의 무력한 것이기도 했다. 에스더서는 이 사실을 조명함으로서 세속권력의 허상과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도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통제하고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형적으로는 자신의 아내마저도 왕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세상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속의 권력이라는 힘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로서 힘있는 권력자의 손에 의해 유지되고 바뀌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역사는 실지로 전혀 다른 요소에 의해 뒤바뀔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 때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바벨론이 그처럼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막강한 세력의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페르시아의 군주라 할지라도 결코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아하수에로는 야심에 찬 헬라 정복 전쟁에 도전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헬라 원정에 앞서 6개월 간의 연회를 베풀고 자기의 부와 권세를 자랑했지만 그것으로 헬라를 점령할 수 없었다. 또한 모든 제국의 지도자로부터 시작해 시민에 이르기까지 그의 승전을 축복했지만 이것으로도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이 사실은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당시 헬라는 아직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페르시아의 적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더서 기자는 세상 역사의 흐름에서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적인 사건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아무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아주 작은 일을 조명하고 있는데, 왕후 와스디가 그 와중에서 폐위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세상사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끌 아무런 이유가 없다. 심지어 그러한 일이 발생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며 이런 사소한 일에는 단 한 줄의 기록도 배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상의 역사가들의 관심과 성경 기록자의 관심이 전혀 다른데 있음을 암시한다. 세속사의 기자들은 크고 웅장한 사건들과 여기에 관련된 인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가들은 힘으로 지배하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건설한 업적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사에서는 아하수에로 왕의 업적에 관심을 가지지만 성경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역사를 이끌고 가시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에스더서는 아하수에로 왕의 업적보다는 왕후 와스디의 폐위 사건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모르드개의 사촌동생인 에스더가 구속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의 인물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