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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우리니
성경본문 : 에스라 10:1-4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생존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여분의 시간이나 물질이나 건강이나 기회들은 하나님이 각자에 대한 기대를 가지시고 그것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회는 놓치지 않고 그것을 잡는 자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여러 교회들이 있는 가운데 하필이면 이 교회로 인도하신 까닭은 은혜만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에 동역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 교회에 거시는 기대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선교하며 성장하는 교회”라는 영구 표어에 나타난 대로 주님의 지상 명령인 선교를 구체화 시키고 확산시켜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우리 모두 동역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식구들은 이 비전을 공동비전만이 아니라 개인비전으로 삼고 구체화시키기기 위해 기도하는 일과 협력하는 일과 동참하는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참여할 때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되고 소속감과 일체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으로 이미 지나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선한 역사에 대해 우리 각자가 어떤 모양으로 동참하여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 회복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성경 여러 곳에 토기장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기서 토기장이라는 말은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값싼 흙으로 빚은 것이지만 고려청자처럼 유명한 골동품은 부르게 값이며 한 점에 수억 원, 수십억을 호가할지라도 애호가들은 고가를 지불하여 그것을 소장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작품은 누구나 손쉽게 대량 생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예촌에 가보면 우리 눈에는 멀쩡하여 그 사람의 유명세만으로도 얼마든지 상품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불가마에서 나온 작품을 이리 저리 훑어 본 다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에 들고 있던 망치로 사정없이 박살을 내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도예가에게는 돈이 아니라 자기의 명예와 직결된 작품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인은 도자기만 보아도 누구의 작품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낼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자기는 곧 그 도예가 자신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예가는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또 물레를 돌리면서 또 만들고 불가마에 굽고, 깨뜨리고 다시 빚어 굽는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는 과정 속에서 몇 점 안 되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티끌이라는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였을 때는 쇠망치로 도자기를 박살을 내듯이 심판하시고 징계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도자기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바로 이스라엘 성전의 파괴와 이방나라의 침략과 포로 생활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 마침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을 목도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쪽 유다는 마침내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이 박살이 나버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천리만리 타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 잠시 여행을 하거나 파견을 받아 얼마동안 사는 것도 불편한 것이 많은데 노예가 되어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지 기약이 없는 패망국민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을 작품으로 만드시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오늘 성경에 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진노중에 긍휼을 약속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포로 된지 칠십년이 지나면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렘 25: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아무리 좋은 약속도 기간이 너무 오래게 되면 기대감이 반감되어 무관심하기 쉽기 때문에 약속한 사람이나, 약속을 받은 사람 모두가 약속을 망각하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도 잊지 않으셨고,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은 약속하신 칠십년의 기한이 차게 되었을 때 바벨론을 멸망시킨 신흥제국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 사면령을 내려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게 하라고 그가 통치하는 온 나라에게 공포를 하였습니다.
(스 1: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스 1: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고레스로 하여금 유다 민족을 해방시켜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나라의 왕인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사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레스 왕은 이를 위해 조서만 내린 것이 아니라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물자들을 공급하여 주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독려하였습니다.
(스 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2)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
칠십년이라는 기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라 한 세대가 가고 다시 새로운 세대가 와야만 하는 기나긴 기간입니다.
비록 그 약속을 들은 어른들은 이방 나라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없는 기나긴 기간이며, 이방 나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는 그 약속을 부모로부터 듣지 않으면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생각되어지는 약속이며 오직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신실하신 분으로 한번 약속하신 것은 어떤 모양으로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신다는 믿음의 사람만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은 고레스왕의 명령에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 건축에 필요한 것이라면 은금 패물 짐승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기꺼이 드렸습니다.
(스 1: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스 1: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황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즐거이 드렸더라”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고레스 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선언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와 같은 귀국 명령이 결코 즐겁고 신나는 일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원한 일이 아니라 고레스 왕이 내린 명령을 따라 고국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황폐해진 고국에 가서 무슨 희망이 있으며 또 무슨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현실적인 상황이 좋지 않을지라도 그 약속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평안한 바사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황폐한 예루살렘을 더욱 사모했으며, 비록 바사의 풍요로운 포로 생활보다는 못하지만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의 자유를 더욱 귀히 여기고 사모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망과 범죄
칠십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포로들은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된지 칠개월이 지난 후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닙니다. 자원해서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시작한 일은 두 가지 였습니다.
1) 제사의 회복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황폐하여졌기 때문에 제사가 끊긴지 칠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들이 모여 무엇보다 먼저 시작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릴 성전이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룹바벨과 그 형제들이 일어나 제단을 만들고 모세의 율법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되 아침 저녁으르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거룩한 절기를 지키되 억지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제물을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있었습니다.
(스 3: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즐거이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2) 성전의 기초
고레스 왕의 특명과 더불어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들의 헌신을 통해서 칠십년 만에 먼저 제단이 수축되고 제사가 드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공사가 찬송가운데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스 3:11)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입니까? 이 모습을 보고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무너지기 전의 성전을 생각하며 감격하여 울었으며,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은 성전이 재건되기만 하면 축복이 시작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감격과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성전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사단의 훼방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포로가 되지 않고 그 땅에 남아있던 잔류민과 혼혈화가 되어 칠십년이 지나는 동안 신앙이 변질되어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득권을 내세우며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뇌물 공세와 투서를 마다하지 않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동족을 배신하고 아부하면서까지 고소를 하여 결국 성전 건축을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스 4:21)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예나 지금이나 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더 많이 있으며, 배신은 얼굴모르는 남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방왕 고레스가 돕는 일을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훼방을 하여 결국 성전 재건이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감동하셔서 시작한 일이 이처럼 허무하게 중단되어 버린단 말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악한 대적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역을 방해하는 데 성공을 거둡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고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수많은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적자들의 방해 공작과 시험으로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이 그러한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여 이루어질 때에 그 일에 착수했던 성도들의 영광은 더욱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역경을 만날 때에 더욱 기도하게 되고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에게 실패는 없습니다.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성전 재건의 무려 15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단되고 보니 기대감과 열심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1) 선지자들의 출현
성전 재건의 중단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다시 일깨워 더 확실한 방법으로 성전 재건을 완성케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학 1: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학 1: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학 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2) 다리오 왕의 칙령
역대 정권이 바뀌면서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대사면령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리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역대 왕들이 조서를 보관하고 있던 보물고를 조사하여 고레스 왕이 내렸던 명을 다시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성전의 크기까지도 명시하였고 그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한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감동을 받은 다리오 왕도 15 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을 신속히 이행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스 6:12) “만일 열왕이나 백성이 이 조서를 변개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저희를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이제는 누구도 성전 재건을 막을 자가 없게 되었으며 성전 재건 공사는 다시 순탄하게 시작되어 마침내 다리오 왕 육년에 완공되어 마침내 하나님께 봉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칠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아무리 성전 재건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헌신한다면 못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문제는 불신앙이요, 무관심이요, 방관이요, 비협조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인간이 수고를 하였을지라도 그 모든 좋은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점입니다.
(스 6:22) “즐거우므로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것으로 다가 아니며 항상 영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을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룬 줄 알고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태만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혼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재건한 성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솔로몬 성전을 하나님이 왜 무너뜨리셨는지를 그들은 까맣게 잊은 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반복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비난하고 받아주지 않았던 잔류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하는 죄 이방여인들을 받아드림으로 이스라엘의 혈통을 더럽히는 일이었습니다.
(스 9:2)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결단과 헌신
하나님께서는 제일 미워하시는 죄는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경로 중에 가장 위험한 요소가 바로 이방인들과 잡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금해야 할 일이 바로 이방인과 통혼하는 일이었습니다.
(신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신 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다 된줄 알고 그 때부터 영적으로 나태하면서 지도층에서부터 세속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스 9:2)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지난날에 멸망을 당하였으며, 재건된 성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화려한 성전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게 되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그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상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죄송하여 옷을 찢고 수염을 뜯고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회개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노예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게 하여 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배반한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스 9: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에스라는 자신이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이 범한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하며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에스라의 그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엘람 자손 중에 스가냐라는 사람이 에스라에게 간곡하여 말하기를 비록 이방 여자를 아내로 취했지만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희망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스 10:3)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가냐는 범죄한 자들이 자기 집에서 아내와 그 소생을 내어보내면 하나님의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의 권면을 그에게 해줍니다. 그 일에 우리가 도울테니 힘써 행하라고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스 10:4)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에스라의 신앙 개혁, 그것은 그가 바사 왕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목적이요,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스가냐의 권면대로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삼일 안에 예루살렘에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였습니다.
(스 10: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이와 같은 에스라의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의 개혁 의지에 순복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스 10:12)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칠십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 궁극적인 기대가 성전 제건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재건이 고레스 왕 한 사람의 힘만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합심협력을 통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함으로 성취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도 에스라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민족적 대 각성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한 “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라는 말과 온 회중이 에스라가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듣고 “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라는 결단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결 론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계획하고 주관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통해 자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하시기보다는 더불어 협력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임을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천지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며, 인간의 출생도 부모의 협력으로 통해서 새생명이 태어나게 하셨으며, 인간의 구원도 신인 협력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씨 뿌리는 농부의 수고위에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결실을 얻게 하시는 것처럼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도 연약한 인간을 전도자로 세우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전도자들을 가리켜 놀랍게도 사람끼리의 동역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이 그 행한 일에 대해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파도타기 명수는 큰 파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게 주어지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일에 스가냐와 같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회중과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듣고 우리도 다같이
1)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2) 우리가 힘서 행하겠나이다라고 결단할 수 있는 마음에 감동을 하나님이 이시간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스 10:4)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스 10:12)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