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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장9-12
형제사랑
여러분! 옆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좌우 앞뒤)
여러분이 방금 인사를 나눈 그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형편이 어떠한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들의 믿음의 형편이 어떠한지 알고 계십니까? 지난주에 누가 나왔으며 누가 나오지 않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교회의 목사나 알아야 할 일로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또한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1장3절에 보면 사랑은 수고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있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사랑의 모습은 ‘관심’입니다.
결국 형제에 대한 사랑 시작은 내 마음이 과연 그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에게 관심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빌 2 : 4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춰 있으면 안됩니다. 다른 형제들의 일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삶이 어떤지, 그들의 믿음 형편이 어떤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형제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사랑이 어떤 것이냐는 것보다도 실제로 우리 안에 형제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생겨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형제 사랑은 결코 이론이 아닙니다. ‘이러 이러한 것이 형제사랑입니다.’ 아무리 이야기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봤자 소용없습니다. 형제사랑에 대한 하나님 말씀 아무리 많이 암송하고 있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마음에 그 사랑이 없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형제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것보다도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형제를 실질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에게 내 마음을 두며,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며, 그의 부족함을 함께 채울 수 있는 그 사랑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사랑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가면서 한마디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 안에 이 형제사랑이 풍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 형제사랑에 관해서는 쓸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들은 이미 온 마게도냐의 모든 형제들을 대하여 이 형제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 3절에서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이미 형제사랑이 풍성하게 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말할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지금 하고 있는 그 형제사랑을 더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 형제사랑은 풍성할수록 더욱 좋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형제사랑이 풍성하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저와 같은 소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더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한번 더 말을 건네시기 바랍니다. 한번 더 그들의 형편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나를 여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내 것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22장37-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큰 계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계명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게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첫째 계명은 참 잘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횟수나, 드려지는 헌금의 액수나 기타 다른 모든면에서 볼 때, 그 열심을 따라갈 나라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두 번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입니다. 하나님은 참 사랑하는데, 내 형제를 사랑하는데는 매우 인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형제는 별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요일 4 : 20에 보면 사도 요한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는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만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착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을까? 왜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사랑하지 못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랑이 없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를 살피기 전에, 누가 나를 사랑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그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만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내게 그 사랑이 없음만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은 매우 의지적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이 끌릴 때만 하는 사랑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코펙’이라는 기독교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참 사랑이란, 감정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사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사랑이 참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감정에게 이끌리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그 감정이 식어지면 함께 식어지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육체의 욕망을 쫓아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사랑은 내 의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이 내 감정을 흔들지 않아도 내 마음을 빼앗을 만한 것이 없어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보실 때에 그 마음이 감동이 되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사랑의 감정이 솟아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을만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의지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로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이라면 굳이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 둬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쁜 여인을 사랑하는 것, 멋진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 우리가 세상의 재물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시키지 않아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신다는 것은 그처럼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그 이웃이 그만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렇지 못할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에 있는 형제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임해 있음으로 내가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너도 나처럼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향하여 의지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사랑이 함께 붙어 있는 명령이라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계명입니다.
내가 형제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악인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죄악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믿음의 형제를 말합니다. 물론, 여러분과 피를 나눈 육체의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로 끌려가기 때문에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를 향한 사랑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힘써야 하는 사랑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라온다고 하였습니다. 입술만의 사랑은 가짜 사랑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 역시도 가짜 믿음입니다. 참 사랑은 수고하는 사랑입니다. 참 믿음 역시 행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삶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하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입술의 사랑,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모릅니다. 내 것을 나누지 못하는 사랑,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그를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 사랑,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랑의 수고는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 사랑의 나눔은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공동 소유를 원칙으로 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부터 보시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밭과 집 있는 자들이 팔아서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이 그 때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고자 할 때에는 목숨을 내 놓고 믿을 때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지금 교회 안에서 그렇게 한다고 하면, 다 같이 굶어죽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거지들이 다 교회로 들어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교회 안에 그러한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빌붙어서 얻어먹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이 형제사랑의 나눔이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가 그렇게 나누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함을 늘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할려고 해야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일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의 형제가 옆에서 굶주리고 있는데, 나 혼자 호의호식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경을 좀 넓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구역, 아는 사람들, 거기에만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대안교회 안에 함께 들어와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나오지 못했는데, 목사나 구역장이 아닌 다른 믿음의 형제들 5명으로부터 전화가 온다면, 그는 감동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형제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큰 일부터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작은 것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함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음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를 위해서 내 것을 나누지 못하고, 수고하지 못했음을 회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