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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잘못된 신앙 막 7:1-5
예수께서는 자주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매우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신앙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1. 다른 사람의 잘못에만 관심을 두는 신앙입니다.
1절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명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이 계신 예루살렘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을 주시리라고 믿고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어디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라면 찾아가는 열성이 필요합니다. 삭개오나 소경 거지 바디매오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갔기 때문에 놀라운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막10:46;눅19:2)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예수님께 찾아온 목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심령이 갈급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악인은 이와같이 행악을 위해서는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예수께 와서 제일 먼저 바라본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떡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정통적인 유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우치는 일에 있지 않고 이와같이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에게서 헛점과 오류를 찾아내는 일에만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먼저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과 부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고 고치기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인은 남의 잘못부터 보려합니다. 남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기능ㄹ적으로 잘하는지 못하는지에만 관심을 쏟고,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이 진리보다 허식에 집착하는 사람들로서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신앙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례를 어기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곧장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그들의 행위를 비방했습니다. '어찌하여…떡을 먹나이까'(5절) 이러한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그 이유를 묻는듯이 보이나 내용은 결국 예수님께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을 덮어두거나 그것에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다가 제자들이 그러한 일을 하지 재빨리 그 일을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잘못을 범한 자에 대한 긍휼과 자비심은 없고 오직 비난과 문책만 있을 뿐입니다. 채찍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섣불리 남을 판단하여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그 징계 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항상 남을 정죄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롬2:1) 하였습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여 정되하는데 쏟는 관심을 오히려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데 쏟아야 하겠습니다.
3. 종교적인 의식에만 관심을 두는 신앙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행위는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유대 풍습을 어긴 것에 불과한 행동이었습니다. '유전'이라는 말은 '손을 건너서 준다'라는 의미로서 모세부터 전해 내려오던 구전법을 말합니다. 이 구전법에는 유대인의 엄격한 생활풍습과 규칙들이 있는데,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일은 위햇에 관한 풍습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교리화되어 종교적 계율로서 제정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와같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 행해야 할 신앙적 도리와 풍습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외식적인 신앙에만 관심을 둘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이 종교적 의식을 행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히 의식을 행합니다.
2)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쌓아올린 종교의 질서 안에서 마음속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인 그들이 그러한 모습을 내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의식을 통하여 그들의 불신앙을 감출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신앙인의 특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결여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의 신앙생활은 하나의 의식적이 종교생활에 불과하며 그의 생활은 위선과 가식, 그리고 독선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헛된 신앙 막 7:6,7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종교적 이단자라고 비판하자, 주님께서는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사, 그들의 무지함과 위선됨을 지적해 주시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음을 책망핫겼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신앙에 비진리적인 헛된 요소가 없는지 본문의 말씀을 살펴봄으로 깨닫고자 합니다.
1. 헛된 신앙의 모습
1) 불순종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6절)라고 책망하셨듯, 저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며, 중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롬1:28) 참된 신앙은 그 속사람부터 거듭나고, 진리로 변화받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와 말씀을 마음속에 늘 간직해야만 하는데, 거짓 종교인들은 주님께 대한 불신앙의 태도를 도무지 고치지 않고 오히려 대적만 하려 듭니다. 태풍은 요한한 것이지만 그 중심이 비어있는고로 곧 소멸되는 것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주님을 모시지 못한 종교적 활동은 비록 열심이 있다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헛된 것입니다.
2) 사람의 가르침을 신앙함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가 가르치니'(7절)라고 지적하신 것처럼 거짓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대신 인간들의 유전이나, 법이나 사상을 신앙의 근거로 삼으로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으믕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인간의 것을 우상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는 종교인들이 외국의 국방력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조상의 전통을 하나님의 자리에다 앉히고 생명처럼 숭배했습니다. 고귀한 신앙적 전통은 선진들의 눈물과 피와 기도의 결정체이기에 성도의 신앙 여정에 귀중한 이정표는 될지언정 (고전10:11) 결코 신앙의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계시된 영생의 말씀을 유한한 인간들의 전통으로 대체하려는 곳에 가증하고 헛된 우상 숭배의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1:22)
2. 헛된 신앙의 요소
1) 의식주의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6절) 그들의 전통주의 신앙은 그 모든 내용들이 생명을 상실한 의식적이며,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들의 기도에는 진정한 감사가 없으며, 저들의 찬송에는 기쁨의 샘물이 말랐고 저들의 구제행위에는 따뜻한 눈물이 없습니다. (눅14:1-6)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신앙이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경각심을 주시기도 합니다. (마8:23-27)
2) 율법주의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7절)라고 하셨듯이 저들은 선조들의 구전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을 신앙에 있어서 최선의 것이요, 구원의 절대조건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뜻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된 모습과 구원에 대한 무능함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구원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갈3:10-24) 그러므로 모든 율법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행10:43;요5:46)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종교적 의식과 윤리로만 해석하여 교훈한 장로들의 구전은 율법의 진정한 뜻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방해하며, 영원하신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교훈으로 격하시킨 것이므로 주님께서는 통렬히 책망하시며, 또한 그것을 생명으로 삼은 율법주의 신앙의 허구성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을 대할 때 구속중심, 복음중심으로 해석함으로서 영원하신 말씀의 생명과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올바른 성경관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3. 헛된 신앙의 결과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기록하였도다'(6절)하시며 성경의 예언을 통하여 주께서 그 시대의 거짓 신앙인들의 폐단을 책망하시듯 오늘날은 더 다양한 형태의 헛된 신앙들이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며, 질식시키며, 또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1) 성도의 신앙을 감정과 체험 중심으로 대체하려는 무분별한 신비주의(요20:26-30;고전14:20-25) (2) 성도의 순수한 봉사정신을 욕심으로 변질시키려는 기복적 상업주의(딤전6:3-12;벧전 5:2) (3) 주께서 피 흘리신 댓가로 얻은 성도의 거룩한 영생 소망을 흐리게 하고, 세상의 계급적 폭력투쟁으로 변질시키려는 극단적 사회주의(요18:33-36;딤전6:11-14) 사상등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경험과 사상과 욕망으로 대체한 헛된 신앙으로 후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갈1:5-10) 성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오직 그 안에서 행사고 그 안에 신앙의 뿌리를 박으며 복음 중심의 믿음과 감사함으로 그를 참되게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골2:6-8)
의식주의의 해독 막 7:8,9
예수의 사역이 활발해지자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의 인기와 명성이 점점 높아져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명이 와서 예수의 사역을 탐색하기 위하여 갈릴리에 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떡 먹는 것을 보고(2절) 예수에게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낭까'(5절). 여기서 그들과 예수와의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종교 생활에 대하여 실랄한 비판을 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8절) 주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신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장로들의 유전의 형성과정
1) 구전율법
'장로들의 유전'이 형성된 것은 포로시대의 부산물로 보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돈 에스라와 그 후대의 서기관에 의하여 부흥되고 강조되었던 율법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은 유대의 종교적, 민족적 기원과 긍지를 회복시켜 주는 가장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랍비들 사이에서 모세의 율법, 즉 '성문율법'에 관계된 새로운 이론이 대두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십계명의 적용에 관한 세밀한 부분까지의 완전한 설명도 함께 주셨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구전율법'인데, 이 구전 율법은 모세에 의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구전되었으며,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달되어 오는 과정에서 하등의 손실과 유실도 없이 전수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전 율법에 대한 이론이 백성들의 지지를 얻게 되자 성문 율법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되다가 점차 오히려 성문율법보다도 더큰 권위와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구전 율법은 랍비들에 의한 계속적인 연구로 그 강해와 부가적 설명이 집적되어 하나의 별개의 교훈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요약하면 구전 율법이란 성문 율법에 대한 전통적 관습에 바탕을 둔 랍비들의 상세한 강해와 그 부가적 설명으로서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문 율법의 근본 바탕에서 떠난 별개의 다른 교훈 체계를 이루게 된 것으로 법적인 것과 교훈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교훈과 토론을 위하여 개괄적으로 편집된 것입니다.
2) 구전 율법의 집대성
구전율법 즉 미쉬나가 별개의 교훈체계를 이루자 이것을 방대한 문서로 집대성한 것이 케마라와 탈무드입니다. 예수 당시에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장로들의 마릉ㄴ 선지자들의 말보다 더 큰 중요성을 지닌다'고 했으며, 더 놀라운 것은 '모세의 율법은 물과 같고, 미쉬나는 포도주와 같으며 게마라(또는 탈무드)는 히포크라스(온갖 향료를 넣은 귀한 음료)와 같다'고 했습니다. 결국 게마라 또는 탈무드는 유대 후기 역사의 산물로서가장 부패하고 타락했던 시대의 정신적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의식주의의 해독
1) 계명을 버리고 유전을 지킴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8,9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식사하기 전에 손만 씻는 것이 아니라 팔까지 씻었습니다. 그것은 탈무드가 팔꿈치까지 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랍비가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먹었다 하여 파문 매장한 일이 있습니다. 이낙ㄴ보다 의식이 더 중요시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시장을 불결한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는 율법에서 정한 부정한 물건,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이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은 것은 이방인, 죄인들의 접촉 등을 전제로 한 데서였습니다. 이와같은 유전은 율법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며 율법의 정신적, 내적 교훈을 도외시하고, 율법적 행위에 대한 지엽문제에 집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뜻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2) 의식주의의 해독
종교가 인간의 내적, 영적 품성에 대한 정결과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의 의식적 규례를 어떻게 행하느냐에 집착하게 될 때 그것은 '외식'이며 '위선'이 됩니다. 종교의 가장 치명적인 해독은 위선에 있습니다. 위선은 거짓이며 악의 위장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사랑과 의의 길이어야 합니다. 결국 종교는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며, 의식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을 잃고 인간의 눈에 아첨하게 되는 때 이미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들으려 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존경을 받으려 한데에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오도한데에 그 해독이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는 장로들의 유전 막 7:10-14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데 대하여 시비를 걸어오자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빌어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다음(6,7절) 그들이 제5계명을 어떻게 가증스러운 방법으로 폐기하고 있는가를 통박함으로써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장로의 유전'이 인간을 어떤 모양으로 타락하게 하며, 율법 자체를 모독하고 있는가를 예수께서는 실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로의 유전'에 집착한다는 것은 인간을 위선자로 만들기에 합당한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부모공경에 대한 가르침
1) 인간의 계명 중 첫째 계명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10절) 이 말씀의 상반절은 십계명 중 제5계명을 인용하신 것이고(출20:12), 하반절은 이 계명에 대한 보충 교훈으로써 출애굽기 21:17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제5계명은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째 계명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생활의 기본이 '효'에 있음을 가르치며 만일 불효가 심하면 사형에까지 처하도록 율법으로 정해 놓은 것은 그만큼 부모 공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분이며 경건한 삶의 의무입니다.
2) 모든 덕의 근본으로서의 의
효는 모든 덕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자기 수양과 자기 정립의 기초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다만 물질적인 공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효는 전인격적인 애정의 봉사이어야 하고 마음ㅇ로부터의 존경이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인색함이나 오만도 그 앞에서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효는 집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 밖의 사회적 처신에 있어서도 그의 언행이 부모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품성과 행동은 가정 교육이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그의 품행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곧 그 부모의 명예에 직접 관련을 갖기 때문입니다.
2. 부모 공경을 회피케 하는 장로들의 유전
1) '고르반'의 진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11절)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린 헌물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다 거룩한 목적에 우선적으로 바쳐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는 부모를 공양하는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 최선의 목적에 사용되었을 때 차선의 목적은 이미 그 안에서 동시에 달성되었다고 보거나, 최선의 목적이 달성되면 차선의 목적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유전은 이러한 고르반의 진의를 악용하도록 하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2) '고르반' 제도의 악용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12절) 장로들의 유전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고르반 제도를 악용하도록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부모를 부양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 재산이 하나님께 '고르반'되었다고 서원함으로써 부모부양의 책임에서 벗어났으며, 그렇다고 '고르반'된 자기 재산을 당장 하나님께 바치지 아니해도 되었으므로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은 백성들로 하여금 (1) 제5계명을 범하는 죄와 (2) 고르반 되었다고 서약하고서도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 바치지도 아니하는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러면서도 이 '고르반'제도를 장려한 것은 '고르반'된 재물을 그들이 소유해 버리려는 탐욕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적한 한 가지의 예에 지나지 않으며, 장로들의 유전은 이런 식으로 율법 자체를 폐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3.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임
가장 율법을 귀중히 여기고 율법에 의하여 존경받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유전 때문에 율법을 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하여 가르친 장로들의 유전이 오히려 율법 자체를 범하게 만드는 올무가 되게 하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부정의 정체 막 7:15,16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ㄹ이 제기한 시비를 예수께서는 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하여 율법 자체를 폐하는 외식과 위선에 빠져 있음을 몇 가지로 비판하신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손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모든 악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깊은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레위기 (11장-1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식물에 대한 규례를 폐지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외형적 행위만을 강조함으로써 가리워져 있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구약의 식물에 대한 규례를 초월하는 위대한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의식주의의 허구성
1) 마음을 씻지 않고 손을 씻음
예수께서는 '장로들의 유전'이 인간의 마음을 씻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손을 씻음으로써 정결하게 산다는 것을 표현코자 한 그 허구성을 지적하셨습니다. 종교의 영역은 내적인 것이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영혼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물질을 정신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2) 인간의 관습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우위에 둠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한 전통적인 행동양식으로서 그것에 대해 지나친 관심과 집착은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는 형식 위주의 사고방식을 탄생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사람은 외모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삼상16:7) 하나님은 본질에 관계하시고 사람은 형식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을 형식적 '유전'에만 치우치고 하나님의 뜻은 도외시 하였습니다. 그들의 허구성은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우위에 둠으로서 나타났습니다.
3) 마음으로 경배를 말로써 대신함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6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사람의 계명인 '장로들의 유전'으로 교훈했기 때문에 신앙인격의 분열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말'과 '마음'과의 괴리는 종교의 가장 비극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2. 부정의 정체
1) 부정의 근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6절) '더러운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힐난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말에 대한 직접적인 교훈입니다. ㅅ람을 더럽게 하는 부정의 정체는 음식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8-20절) 인간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2) 부정의 정체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악이 부정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부정의 정체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설명도 예수님께서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1,22절) 이것을 정리해 보면 살인, 흘기는 눈, 훼방, 악독, 교만, 광패 등은 제6계명에 해당하고 음란, 간음, 음탕 등은 제7게명에 해당하고 도적은 제8계명에 해당하고, 속임은 제9계명, 탐욕은 제10계명에 각각 해당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인간의 도덕 전반에 관련된 죄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부정의 정체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악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원죄때문입니다. (롬3:10-18)
3. 도덕적 부정으로부터의 정결
인간의 마음은 사고와 언어와 행동의 모체, 즉 근원으로서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이 창조되는 곳입니다. 인간은 그 원죄로 인하여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12) 이러한 도덕적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길은 성령으로 거듭나 말씀과 성령으로 성화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마음의 생각을 거룩하게 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물질과 마음의 관계 막7:17-19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5절)하고 질문한데 대하여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도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6절)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후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18절)고 책망하시고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1. 음식과 믿음과의 관계
1) 음식은 선한 것이고 깨끗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18,19절) 육신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창1:29)를 식물로 주셨습니다. 이처럼 처음에 인간에게 식물로 주신 것은 채소와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창9:3) 그 이후 다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실 때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하여 부정한 음식은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레11-15장) 그러나 예수께서는 음식은 모두 '깨끗하다'(19절)고 하시고, 사람을 깨끗하게 하거나 더럽게 하는 것이 음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무시하는(초월하는) 이 말씀에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받아들여 모든 식물이 다 정하고(행10:12-15 롬14:14,20)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먹을 것이며 기도하면 다 거룩해진다고 믿었고(딤전4:3-5), 다만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31)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롬14:17). 이러한 사상들은 이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다 선하며 깨끗하며 거룩한 것이라는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고전8:6)
2)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예수께서 본문에서 하신 말씀은 음식은 인5간의 육체를 보양하기 위한 것이며 마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5절) 다시 말하면 물질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 물질의 세계와 영의 세계의 원리가 각각 다르다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은 물질의 영역에서만 작용하고 마음은 마음의 영역에서, 그리고 영은 영의 영역에서 각각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육으로 난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요3:6)
2. 악의 원천으로서의 마음
1)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악한 생각'(21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이란 비물질적인 것이며, 정신적이며 영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 생각은 인간성의 근본적인 부패로 인하여 항상 악한 것만을 도모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창6:5;마15:19;롬3:10-18) 인간이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그 생각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 이 악한 생각이 곧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의 죄를 만들어 냅니다. (21,22절) 이처럼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음식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악한 생각'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2) 악한 생각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6절)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람의 안'은 곧 '마음'(19절)이며, 모든 '악한 생각'이 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21절)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렘17:9)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항상 악이 가득하다고 했으며(전9:3), 그 마음 속에서 악이 솟아난다고 하셨습니다. (마12:34,35)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3. 물질을 악하게 하는 마음
음식이나 그 밖의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 물질을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용할 때 그것들은 악한 것이 됩니다. 우상으로 만들어진 금송아지, 음란과 악을 조장하는 서적, 불의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뇌물 등은 다 악한 물질이 되나 그것은 그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마음은 악의 원천입니다.
인간을 더럽히는 마음 막 7:20-23
당시 율법주의에 젖어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죄를 인간의 행위에서만 관련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즉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하나하나 지키면 의인이요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근원이신 예수께서는 죄에 대해서도 그 근원을 살피셨습니다. 그래서 행위자체보다는 마음을 죄와 관련시키셨습니다. (마5:28)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그 악한 행위를 촉발케 하는 마음이 더 근본적인 심각한 죄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사상의 연장입니다. 이제 인간을 더럽히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죄악된 마음의 상태
성경은 인간의 마음을 심히 부패한 것으로 봅니다. (렘17:9) 따라서 그 생각이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선을 생산해 낼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마음이 항상 악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선한 생각, 선한 의도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 선한 생각이 계속되지를 못합니다. 완벽하지도 못합니다. 용수철이 복원력을 가지듯 선한 마음도 일정한 시기에 이르면 악한 생각으로 되돌려 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본문에서의 주님께서 지적한 마음들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2. 부패한 마음의 원인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게 된 원인은 '저희가'오직 이 세상에서 한 분 '선하신' 하나님(눅18:19)을 '마음에 두기 싫어'(롬1:28)하기 때문입니다.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렘12:2)멀기 때문입니다.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심령이 결코 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마음을 청결케 하는 길
1) 우리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청결케 하는 일은 우리의 마음의 부패성, 죄악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우리는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청산하는 유일한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반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실 것이요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요일1:9)입니다. 다윗도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하였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라고 기도하였습니다.
2) 선을 위한 마음의 투쟁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선한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벧전2:11) 제어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수없는 실패를 맛보면서도 이 싸움을 했습니다. (롬7:15-24) 그리하여 그는 결국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롬8:2) 그를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지키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4. 가꾸어갈 마음의 상태
우리의 마음이 청결케 된 이후 다시 그처럼 황폐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마음의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1) 비워야 합니다.
우리는 늘 마음이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채워져 있는 마음은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려 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5:3)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야 하듯이 채움바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2) 청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결코 부패한 곳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벧전1:16) 따라서 우리는 한번 깨끗해진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닦아내야 합니다. 특히 흰 빨래가 빨리 더러워지듯 한번 깨끗해진 우리의 마음은 쉽게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는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며(마5:8), 성령님을 모셔들이게 될 것입니다.
5. 청결한 마음에 임하는 복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먼저 하나님께서 내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주관하시고 책임지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각에 뚜이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빌4:7)입니다.
부패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회개의 문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부패한 마음을 정결케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27
본문은 예수님께로부터 그 믿음을 칭찬받은 수로보니게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개 취급을 받는 이방 헬라의 수로보니게 족속의 이 여인이 제자들도 받지 못한 주님의 칭찬을 들은 이유는 그 여인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인정한 메시야로 사실(마15:22)과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본 순전한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불러들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불신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녀를 사랑하는 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도움을 청한 근본 이유는 사랑하는 딸이 귀신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귀신들려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딸의 치유를 위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15:22)라고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자녀들의 육체적 고통은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고통과 비례합니다. 여기서 여인은 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신체적 결핍이나 장애에서 오는 고통보다 더 무서운 정신적 장애, 즉 귀신들렸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들려온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그녀에게 있어서 캄캄한 밤중에 불빛을 만난 기쁨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자신이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의 심도가 너무 깊었기에 예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자녀의 영혼에 대한 부모의 관심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 부를 자녀에게 물려준다 해도 신앙이 없는 부는 오히려 악이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오히려 모든 복의 근원이 되는 신앙을 심어주고 그를 예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심정에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먹고 마시며 죄로 오염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아픈 마음을 가지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여실히 입증되었습니다.
2. 이방인이면서도 복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인이 거처하는 곳은 두로와 시돈이었습니다. 두로는 솔로몬 왕 때 레바논의 백향목이 이곳에서 보내졌다는 기록이 열왕기상에 있으며, 시돈은 아합 왕의 왕비인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왕상16:31)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를 소개한 우상숭배로 유명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패역한 도시에서 그녀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으며 그 소식을 사실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녀가 '진리에 대한 바른 눈'이 있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과 여건이 어둡고 좋지 않은 곳일지라도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며, 그곳에서 몇사람의 의인을 단련시키어 그 의인의 믿음으로 하여금 그 시대를 이끌어 가도록 섭리하십니다. 중세 암흑기의 암울한 시대에 루터를 예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우상숭배의 타락한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님의 소식에 관심을 가졌고 그 관심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관심은 믿음을 낳고 믿음은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3.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25,26절)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있던 중 예수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시자 즉시 예수님에게 달려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신앙의 대상을 바로 보았고 간절히 그 앞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으로 아니면 가난하고 외로운 자와 함께 하는 자선 사업가 정도로 보았음에도 그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결사적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문제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주체이십니다. 그리고 성도의 고통과 문제를 치유해 주시는 의원이시며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이 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간구하는 자의 호소를 예수님께서는 외면치 않으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절을 극복한 믿음 막 7:28-30
본문에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천국 복음의 사역을 유대 땅에서만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고을인 두로와 시돈에 도착할 즈음부터 시작됩니다. 이 도시에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즉시 달려와 딸의 질병을 치유해 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자비하심과 온유하심 그리고 인자하심의 이미지를 깨고 그녀의 간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냉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끝가지 인내와 겸손으로 예수님께 매달림으로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큰 여자'라는 칭찬도 듣고 딸도 나음을 받습니다.
1. 예수님의 모습
1)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이유로 그녀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마태는 본문의 내용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마15:24)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스라엘 민족 밖에 있는 이방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면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민족, 즉 이방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온 유주를 영역으로 전인류를 대상으로 한 사역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의 순서는 첫째가 유대인이며, 그 다음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2장9절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도 둘째는 이방인에게 복음의 길이 열렸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내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복음은 이방인에게 더 빨리 전해졌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이제 전세계로 확산되어 온 누리에 편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정연한 인류 구원의 계획은 차츰 차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섭리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거절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시험을 하신다면 상급을 주시기 위한 방편으로서 시험을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이유도 그에게 '복의 근원'과 '믿음의 조상'이라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고 욥의 시험도 그의 의로움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한 후 전보다 더욱 훌륭한 '정금 같은 신앙'을 소유하였고 그의 환경 역시 전과는 비교가 안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필사적인 간청을 예수님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다가 그녀를 이방인(개)이라 하여 거부의 태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냉정한 모습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 시험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때때로 응답이 지연되거나 아예 무응답일 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성도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뜻'을 파악하여 끝까지 인내하며 간구하는 신앙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1)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냉정하고 단호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답은 '주여 옳소이다'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축복에 자신은 끼지 못할 이방인임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여 있었으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종종 우리를 당황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성도는 '주여 옳소이다'라고 응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처음에는 부당하게 보이는 것도 결국에는 우리를 위한 축복의 조건이 됩니다. 뜻밖의 지시가 지금의 나에게 괴로운 현실이 될지라도 그것은 축복의 과정일 뿐입니다.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주여 옳소이다'라고 응답하는 순종이랴말로 축복받는 생활의 열쇠입니다.
3) 겸손함으로 인내하였습니다.
개로 비유된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소원을 끝까지 간구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끈질긴 신앙의 인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내는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그녀가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냉정한 태도와 비하된 자신의 신분에 화를 내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하였기에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인내의 결과는 구원의 축복이었습니다.
에 바 다 막 7:31-35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 동쪽 지방인 데가볼리로 가셨을 때 주민들이 귀먹고 반벙어리 된 병자를 고침받고자 데리고 왔습니다. 전에 이 지방에서 주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침으로 돼지때가 몰사한 사건이 생겼을 때에는 배척을 당하셨으나(마4:25;8:30), 나음을 입은 사람의 전도로 인해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전도의 입이 열려야 불신자들의 마음이 열리며, 또한 은혜의 문도 열리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막힌 귀와 입을 향하여 '에바다'(열려라)하며 탄식하시는 주님의 뜻을 상고함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육체와 영혼의 장애
1) 육체적인 장애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32절) 사람들이 데리고 온 병자는 반벙어리 된 청각장애자였습니다. 청각 장애로 인한 고통은 정상인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의 청각은 언어와 지능과 방향 감각과 정서 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청각을 상실하면 그 모든 기능도 상실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음식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위의 장애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2) 영적인 장애
육체의 장애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영적이 막힘들입니다. 육체적 장애는 주위의 관심과 당사장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장애를 극복할 수 있으며, 나아가 헬렌켈러 같은 위대한 위인도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영적인 눈이 닫혀 있고, 귀가 막혀있고, 입이 굳어 있으면 영원히 불행함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막4:12) (1) 영적 장님에 대해서.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 중의 한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라고 키에르케골이 지적했습니다. 주님께서도 교만함으로 신앙의 눈이 감긴 종교지도자들을 가리켜 '소경들'이라고 책망하신 적도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떠진 마리아는 주님께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눈물로 봉헌했으나 탐욕에 눈이 어두운 제자 유다는 그리스도를 은 삼십 냥을 받고 사탄에게 팔았습니다. (2) 영적 귀머거리에 대하여. 사람들은 홍등가의 유혹소리, 시장의 돈 헤는 소리,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에는 민감하지만 하나님의 음성과 양심의 흐느낌과 이웃의 한숨과 광야에서 울부짖는 선지자의 진실한 소리에는 귀가 막혀 있습니다. (3) 영적 벙어리에 대해서. '어눌한 자'란 반벙어리라는 뜻입니다. 반벙어리 성도는 기도를 할 줄 모르고 전도 한 번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는 불의 앞에 잠잠하고 위로와 칭찬에 인색합니다.
2. 치료하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벙어리 환자를 독특한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치료의 방법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무리를 떠나 따로 데리고 가심
주님은 군중을 떠나 한적한 장소로 병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성도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또 기도의 문이 열리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많은 욕구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분리시켜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빌3:7,8)고 했습니다. 세상과 사귀면서 또 한편 하나님과 사귈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온 몸으로 치료하심
'손가락을 그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33절) 주님께서는 발로, 손가락으로, 입안의 침으로, 탄식으로, 기도로, 또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몸 밖의 것과 몸 안의 것, 그리고 육체와 영혼 모두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인생을 사랑하시되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빌2:5-8), 젊은이의 꿈과,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누릴 행복의 권리와 귀한 생명을 인간을 위해 포기하신 것입니다.
3. 에바다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4절). 주께서 기도하신 후 병자를 향하여 에바다(열려라) 하시자 드디어 귀와 입이 정상적으로 치료되고 그는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1) 하늘문이 열림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 기도하시니 하나님의 은총의 문이 열렸습니다. 인생이 죄악으로부터 구원함과 치료함을 받으려면, 오직 중보자 예수님의 간구를 통하여 하늘의 은총을 입는 길 밖에 없습니다. (롬8:33-35;히4:14-16)
2) 귀와 입이 열림
병자는 비록 주님의 음성을 못들었지만 주님의 몸짓을 통해 감동을 받고 주님을 확신했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십자가와 주님만을 바라볼 때 믿음은 더욱 성장하고 그때까지 듣지 못했던 은혜의 음성이 들리고 잃었던 신앙고백과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숨기시는 예수님 막 7:36,37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과 기사, 특히 병고치는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 특이한 일은 이적의 주체자이신 예수님께서 본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그러한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1. 숨기신 이유
1) 와전의 방지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그것을 엄히 숨기신 이유 중의 하나는 주님이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그렇게 알려져야 했습니다. 단순한 예언자나 능력을 행하는 자, 엘리야나 세례요한과 같은 유의 사람으로 알려지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시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먼저 병고치고 기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면 그는 단순한 예언자 내지는 요한과 같은 사회 개혁가로 밖에 알려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극구 자신이 행하신 이적을 매번 숨기려 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이러한 우려는 그대로 적중하여 주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16:13,14)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알려진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돈 많은 부자입니까? 권세가입니까? 아니면 단순한 사회사업가나 인격이 좋은 성인 군자입니까? 우리가 드러내야 할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의 아들로서의 모습입니다.
2) 사역 수행의 차질 방지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의 왕으로 오셨지만 이 땅에서 높임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20:28) 일정한 기간 동안에 땅에 계시면서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후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십자가에 달리셔도 안 되었고, 율법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 전에 인생들에 의해 헛되이 고난을 받으셔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가 정하신 방법대로 죽으셔야만 했고, 주님 스스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요2:4)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본문처럼 때가 아직 이르기도 전에 당할 고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사역을 숨기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재능과 소질, 지혜를 있는 대로 드러내 놓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하게 사용되어야 할 그 때에 드러내 놓고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2. 숨김의 의미
1) 겸손
우리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귀를 여시고 혀의 맺힌 것을 풀어주신 주님께서 '경계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사실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겸양의 미덕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될 수 있는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들도 곧잘 이 명예욕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유혹을 잘 물리치셨습니다. 참으로 겸손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처럼 주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거절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주님을 높이셨습니다. (빌2:5-11)
2) 신실
우리는 또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주님에게서 그 신실하신 성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 신실하심이란 다름 아닌 그가 하나님으로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찌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세례요한으로부터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요1:34;3:26)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막1:9,10) 이러한 하나님의 증거는 늘 가슴에 살아 있으며(요8:18), 주님은 늘 이 증거로 인해 마음의 위로를 얻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참으로 신실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기쁨을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증거,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직접 받은 (요5:39) 내적 증거로 인해 큰 기쁨을 얻고 있습니다.
3. 숨기실수록 드러나심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되니'. 우리가 여기서 얻는 또 하나의 귀중한 교훈은 진리는 숨긴다고 해서 그빛이 가리워지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진리는 어둠 속에서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억지로 드러내려 하지 않더라도 복음의 진리만 간직하고 있다면 그 복음은 반드시 세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원문보기 글쓴이: 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