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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1864~1921 언론인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초명은 장지윤 자는 화명 순소다 호는 위암. 숭양산인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 향시응제과에 입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다. 이후 서너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1894년 2월 식년시 진사 3등 682위로 합격했으나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임명되지는 못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부터 내부주사를 겸직하다가 1898년 10월에 의면했다.
1894년 4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는 데 참여했고 9월에 『황성신문』으로 개편해 창간할 때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독립협회에서 주관한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같은 해 9월 『황성신문』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으나 수개월 후 그만두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간행했다. 1901년 봄 다시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에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경장에 관한 주요 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윤치호/이달용 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반대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해 11월 21일 투옥되었다. 이 일로 11월 20일자 『황성신문』이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06년 3월 『문헌비고』 증보 편집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대한자강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4월부터 여러 차례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교육확장을 위한 교과서 인쇄와 출판을 담당하는 회사인 광학사의 평의원을 맡았고 평양일신학교 교장을 지냈다. 1906년 5월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같은 해 6월부터 1907년 6월까지 대한자강회 기관지 『조양보』의 편집위원 및 주필을 지냈다. 1906년 6월 이후 휘문의숙 휘문관 편집원을 지냈고 1907년 3월 휘문의숙 숙장으로 취임했다.1907년 11월 대한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2월에는 『대한협회회보』 편찬원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흥사단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동조하고 찬양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08년 2월 『해조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주필에 취임했다. 같은 해 5월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상해/남경을 거쳐 9월에 귀국했다. 1909년 1월 교남학회 취지문을 짓고 『교남교육회잡지』편집원을 맡았다. 같은 해 9월 대한협회가 이완용 내각에 대응하기 위해 일진회와 연합해 정견협정위원회를 구성하자 이를 반대하며 평의원을 사임했다. 같은 달 대동교 편집부장에 선임되었다.
1909년 10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된 지방신문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11년 10월 진주로 이사했다. 『경남일보』는 1915년 1월 경영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지방신문이면서 전국 규모의 신문이었다. 『경남일보』 1910년 10월 11일자 「」란에 일제의 합병을 비난하며 8월 30일 자결한 매천 황현의 「」를 게재하고 자신의 평을 달았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신문지법 제21조 위반’으로 10월 25일까지 10일간 정간되었다.
주필로 재직할 때 『경남일보』는 1910년 11월 5일자를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기념호로 발행했는데, 엇갈린 일장기와 오얏문양으로 제호 위와 옆을 장식하고 아래에는 봉축천장젓이라 표기해 이를 기념했다. 다음 해인 1911년 11월 2일자에도 천장절을 기념해 2면을 일장기와 오양문양으로 장식했는데 2단을 합친 전체 크기에 ‘축천장절’이라 표기하고 기념 한시를 무기명으로 게재했다. 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동쪽 바다 일본에서 해가 떠오르니 태양이 빛나는구나/무지개와 북두성이 정기를 길러 우리 천황께서 나셨다/ 보위에 오르신 지 44년 동안 성수무강하셨네/ 덕과 은혜가 두루 미치고 위엄이 널리 빛나는구나/ 뭇 백성들을 어루만지시니 우리 동양의 기초를 세우셨네/ 오호라 이러한 해가 만년이 되어 영원하리라”『경남일보』는 1911년 11월 3일 개최되는 천장절 경축행사를 위해 10월 27일부터 본문에 고정란을 마들어 「천장절축하의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매일 게재했다. 『경남일보』가 주관하는 천장절 경축행사도 열렸는데 진주군 수정봉 정상에서 천 가지의 등화로 봉장한 ‘축천장절’이란 네 글자가 밤을 밝히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1913년 7,8월경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했다.
1914년 6월 마산 통도사 포교 신당을 공동으로 만들어 취지서를 발표했다. 같은 해 11월1일부터 부산에서 경남공진회가 개최되었고 11월 14일 공진회를 기념해 ‘조선양반 유생의 시문대회’인 백일회가 열릴 때 시관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 음력 10월경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매일신보』의 사설은 아첨이 많고 기사는 숨기는 일이 많아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기신보사『위암문고』),『매일신보』를 비난하면서 초빙을 거절했지만 한 달여 만인 1914년 12월 23일 『매일신보』는 2면에는 매일신보사 편집부 로 ‘숭양산인 장지연 씨’라는 제목 아래 장지연을 “객경의 자리에 초빙”했음을 알리는 「」가 실렸다. 이 「사고」에서 “씨는 원래 강호 간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나 본기자 우리 사우가 된 씨를 위하여 특별히 소개”한다고 광고했다. 장지연의 사망 소식을 알린 1921년 11월 4일자 『매일신보』 「장지연 씨 」에도 “증왕에 황성신문 주필로 있다가 근년에는 본사 객원이 되야”라고 했다. 『매일신보』를 비난하며 초빙을 거절하기 전에도 1913년 7월 19일자 『매일신보』에 ‘경남일보 기자 장지연’으로 한시 「축 매일신보윤전기증설」을 기고해 “매일신보 윤전기처럼 영원히 돌고 돌아/ 날마다 천만번 돌아서 인쇄를 하여라”면서 “지혜의 기틀”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축하했다. 이 시는 『매일신보』에 본격 참여하기 전에 확인되는 첫 번째 글이다. 매일신보사는 조선의 문사로 널리 알려진 장지연을 영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객경’으로 초빙했다는 「사고」에서 밝혔듯이 조선총독부의 “신정과 민지개발”을 위해 앞장서 이끌어 가는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38년 5월 1일 『매일신보』 창립 34주년을 기념해 명월관에서 역대 편집국장 등이 참석한 좌담회가 열렸고 좌담회 내용은 『매일신보』 5월 5일자에 「창간 이래 34년 본보 성장의 회고---본사 선배의 좌담회」라는 특집으로 실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전 편집국장 나카무라 겐타로는 경성일보사 2대 사장을 지낸 아베 미쓰이에가 재직당시 “언론의 으로서 이름이 높던 장지연 씨를 회유하느라고”고심이 많았음을 밝혔고 전 편집국장 방태영(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은 자신이 장지연을 매일신보사로 영입했을 밝혔다.
장지연은 『매일신보』 1915년 3월 14일자 「기창만필」(3)에서 “평소의 뜻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을 바라는 것 아니었는데 그대의 권유하는 뜻에 감격하여 종유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베가 자신을 알아주고 권유한 데 감격해 그와 사귀게 되었음을 밝혔다. 방태영은 합병 이전 경상남도 상주와 진주경찰서에서 경부를 지냈고,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로 재직할 때 『경남일보』에 「경찰의 현상론」을 연재했으며 1913년에는 『매일신보』기자로 진주에 주재했다. 장지연은 매일신보사에 ‘객경’으로 참여하면서 아베가 사임할 때 함께 그만둔다는 조건을 제시한 바 있고(「위암 선생 자필수기」『장지연전서』10), 1918년 6월 아베가 사직하자 그해 12월 1일자 기고를 끝으로 『매일신보』에 글을 게재하지 않았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아베와 장지연은 함께 각지의 사찰을 답사했고 한시에도 조예가 깊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다. 장지연은 맹리신보사가 주도해 만든 에 남작 작제빈/ 경학원 강사 여규형/ 군수를 지낸 심종순/ 이기/ 중추원 찬의 유맹/ 경학원강사 정봉시/ 조선총독부 촉탁 정만조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다른 시회에도 적극 참석했다.
1914년 11월 경성부 수송동 각황교당에서 불교진흥회 발기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앞서 8월 발기회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22명과 새로 가입한 장지연 등 6명을 더해 28명이 참석했다. 같은 해 12월 열린 불교진흥회(1917년 2월 불교옹호회로 개편)설립총회에서 간사에 선출되었다. 불교진흥회는 친일 승려 이회광()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설립취지에서 “위로는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우리 동포로 하여금 모두가 불교에 귀의하게 하고자 불교진흥회를 발기한다”라고 하여 설립 당시부터 뚜렷한 친일 색채를 표방해 회주 이회광은 많은 승려들의 비난을 받았다. 1915년 7월에는 불교진흥회가 개최한 천도식의 제문을 지었다. 『매일신보』 7월 6일자에 불교진흥회 간사 장지연의 제문과 함께 중추원 고문인 자작 조중응이 지은 제문이 실렸다.
1914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와 함께 같은 날짜 1면에 숭양산인 장지연의 실명으로 「-」의 연재가 시작됐다. 이후 1918년 12월까지 4년여 동안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었고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과 한시가 포함되어 있다. 1910년대의 『매일신보』는 식민정책과 관련한 각종 법령.제도를 일제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전파하는 기능을 수행했으며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식민주의적 관점을 관철하고 있었다. 식민체제의 우월성과 근대성을 내세우거나 동화정책선전을 제일의 목표로 삼아 조선인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하편, 식민 개발 정책을 ‘시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합병 이후 4, 5년이 지나면서 장지연 사상의 기본 틀은 ‘변통론()·변법론()’은 사상으로서의 유학 혹은 학문 자체의 ‘변통’으로 기울었다. 곧 유학의 본령은 정치와 경제에 있다는 것이다.(「만필한화:공자탄일-속」『매일신보』1915.10.7.) 따라서 유학, 곧 구학을 읽힌 사람들은 절망하지 말고 신학을 ‘참호변통’하여 학정을 개량하고 유풍을 진작할 것을 주장했다.(『매일신보』1915.1.9.) 이외에 『매일신보』에 발펴한 많은 글에서도 신.구학을 언급하면서 신학의 우월함을 특히 강조했다.(「만필쇄어」-신구학 『매일신보』)1915.4.13.~4.23) 구학을 진부한 동양의 철학 이학 문학 정치 등의 인문 기초 학문으로 신학을 근대 서양의 이화 공예 광무 농상 기기 등의 실제 응용 학문으로 구분했다.
이러한 신 구학 참호변동롱는 자기 개선을 동반한 구학이 윤리와 도덕을 담당하는우위에 서서 신학, 곧 서양의 자연과학 내지 응용과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논리는 일본에 압도된 ‘변통론’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지리적인 관계로 쇄국의 습성이 굳어졌고 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해 결국 스스로가 포기할 정도가 되엇다.(「만필쇄어18-신구학」『매일신보』1915.4.22.) 또 일본을 “동양의 선각”이라고 하면서 아시아를 제패한 전술로 보면 동양의 독일이라 부르는 것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만필쇄어17-신구학 『매일신보』1915.4.21.) 때문에 스스럼없이 ‘일본은 세계 열강 사이에서 웅비하는 동양의 패왕이므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인이 서로 제휴하여 장벽을 없애고 동제공장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전할 것’을 주장했다(「만록」-지리관계5)『매일신보』1916.9.16.) 이어서 같은 글에서 ‘일본은 비록 우리 조선과 물을 끼고 나위어져 있으나 그 국경이 서로 이웃이고 인종과 문화 역시 우리와 상동’하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일제가 합병을 합리화하는 허구적인 논리로 내세운 동종동문론과 다르지 않았다.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주일 후인 1915년 1월 1일자 「조선풍속의 변천」에서 “초총독부에서 신정을 시설한 이래로는 착착 구폐를 개혁하고 신화를 선포함에 있어 조선 구습의 풍속도 점차 개량되어 변천하는 경우에 이르렀다…¨부지불언간에 자연히 풍속이 변천하였음을 깨달았은즉 정화의 신첩함이 북소리의 울림과 바람을 맞은 풀이 눕는 것과 동일함을 여기서 확인하고 믿을 것이니, 그런즉 지금부터는 전 조선의 풍속을 통일하여 민족의 관념도 일단에 이를 줄로 미루어 생각한다”라고 했다. 곧 조선총독부의 신정은 더 이상 조선의 전통을 훼손하는 존재가 아니라 조선의 풍속을 개선하는 존재로서 미화와 찬양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이 외에도,
총독부가 각 도에 병원을 설치해 ‘자혜구제’하는 동시에 의학의 장려와 개량을 위해 ‘규령’을 제정하고 시험을 실시하는 등의 노력으로 조선의 의학이 점차 발전하고 있음을 기뻐했다(「만필쇄어(55)----파계승에 가일봉」『매일신문』1915.6.21.)
『매일신보』에 ‘객경으로 긍르 발표하던 1915년 겨울에 매일신보사가 화재로 불에 타버렸고 10월 새 사옥을 중건하자 1916년 10월 4일자에 「중건낙성축사」를 게재해 “가 고운 빛을 더하고 금벽이 갑절이나 휘황하다. 윤환제도는 전날에 비해 줄어든 것이 없으나 견고한 처마와 기둥은 옛날에 비해 더욱 새로워졌으니 이것은 대가 사장 이하 일반 임원이 마음속으로 조용히 헤아리고 계산하여 정신과 힘을 쏟은 결과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이에 『매일신보』를 애독하는 일시의 진신명사들이 분연답지하여 축하하는 글을 서술하여 낙성을 찬송하는 노래가 지면을 채우고 흘러넘치니 재앙이 도리어 복이 되었음이 실로 회록의 보응이니 감히 찬송하여 축하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하면서 축시를 첨부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 내 근정전/교태전/경회루 등의 주요 건물에서 총독부의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4년 7월 당해 연도의 예산 처리결과를 소개하면서 그 대강을 발표한 것인데, 1915년 9월 11일 공진회가 개최될 때까지 거의 매일 『매일신보』에 관계기사가 실릴 정도로 선전에 전력을 기울였다. 장지연은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리자 의의와 성과 등에 대해 적극 선전했다. 공진회가 열리기 전인 1915년 3월부터 지방인사들의 공진회 관람과 참가를권유했고(「남귀기행」『매일신보』1915.3.9.)공진회 개최일이 다가오자 “대개 공진회라는 것은 우리 조선의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니 실로 공전한후의 일대 성회라 하겠다”라면서 크게 환영했다(만필쇄어(88)---공진회관람자관1) 『매일신보』1915.9.5.
9월 9일자 「만필쇄어(90)---공진회관람자관(3)」에서는 “조선총독부 시정 5년 동안 혁구쇄신하며 과거의 찌꺼기를 모두 제거하여 농업 공업 실업을 부지런히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한결같이 모두 수집하여 한 건물 안에 진열하여 경향의 사람들의 관람에 이바지하였으니 이 어찌 공연히 한 번 구경거리에 제공하고 말뿐이겠는가”라면서 관람을 권장했다.
조선물산공진회의 공식 일정이 끝난 10월 31일 이후에도 『매일신보』에는 성공적인 공진회를 축하하는 각종 글들이 소개되었다. 특히 공진회가 경제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되었다. 이러한 때 『매일신보』1915년 11월 4일부터 12월 15일까지 25회에 걸쳐 「」라는 사설을 1면에 연재했다. 주요 내용은 합병 이후 5년동안 조선총독부의 산업개발정책으로 조선인의 삶이 크게 나아졌음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결론적으로 “불과 5년의 성상에 산업의 발달이 이에 이르렀으니……위에 있는 이(조선총독부)는 목하의 성적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독칙하며 장려와 지도와 계발에 여력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산업개발지급무(25)---총결(하)」)『매일신보』1915.12.15.
일제와 총독부의 식민지정책을 미화하고 장려와 지도를 원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조선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만약 집정자로 하여금 허락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의 집회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 이라고 하면서 “오호라 동종동족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우너수가 되어 망국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송재만필」(9)---단체성이 흠결호) 『매일신보』 1915.12.26.)라며 한탄했다. 식민지가 된 원인은 단체성이 없는 조선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한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어 인용하면서 같은 민족을 열등 인종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1915년 4월 3일의 ‘신무천황 제일’을 맞이해 같은 날짜 『매일신보』에 일본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면서 “신무는 영웅의 신명한 자질로 동정서벌하여 해내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어찌 세계 만국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만필쇄어(5)---신무천황제」 『매일신보』 1915.4.3.)”라고 하면서 특별히 이 글을 지어 바친다고 밝혔다.
『매일신보』에 ‘객경’으로 글을 게재하던 무렵,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독일 측에 맞선 연합국으로 참전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승전국의 지위를 누리며 세계대전을 인종전쟁으로 파악하면서 백화론에 대비할 것은 주장했다(「황백인종론」『매일신보』 1918.3.19.) 그러면서 독일이 패하더라도 또 다른 제2, 제3의 독일이 나타나 무기 위력시대→군국주의→척토주의→인종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이라고 보았다(「시사소언」(7)『매일신보』1916.6.7.) 따라서 “금일 동양의 평화를 유지코저 할진대 유일의 자위책은 즉 미국의 「몬로」주의를 차용하여 아세아몬로주의를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은 “지리상 관계던지 종족상 관계던지 의 민족된 자가 마땅히 민족주의를 채용하여 일대 범아세아주의를 발달함에 노력할지니 즉 아세아몬조주의가 이것이라”고 강조했다(「시사소언(8)『매일신보』 1916.6.8.」)
이제 조선은 굳이 식민지라는 현실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독립된 민족이라기보다 일본과 같은 문화를 가진 범민족의 일원이라고 파악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지리 종족으로 하나인 일본 중국 조선의 연합을 주장했다. 곧 “오늘날 동양의 지위는 지나 일선 두 나라가 있을 뿐이다. 이 두 나라가 서로 함께 나아가 순치보거지세를 만든 연후에야 국방을 보전하고 민족을 보전”할 수 있으며 (「지나각성」의 금일(속)『매일신보』 1918.3.21.) “동양 대국은 오직 일본과 지나 두 나라일 뿐이다. 보거순치 관계로 어찌 서로 떨어질 수 있겠는가. 반드시 서로 제휴하여 친선을 한 연후에 외부를 막을 수 있는 술책”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했다.(만필쇄어(72)---일지친선은 동양행복)『매일신보』 1915.7.13.
1918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는 「대정6년 」 라는 제목으로 매달 2편씩 총 24편의 한시가 실렸다. 이 한시들은 1917년의 주요 사건들을 소재로 쓴 것이다. 1월에 일어났던 사건을 주제로 쓴 시 중 하나인 「군함 축파 침몰」은 다음과 같다. “한 소리 폭음에 불꽃 치솟더니/ 거함이 정박 중에 침몰하더라/ 위문하는 무관이 성지를 전하니/ 조원들 높은 은총에 사례하였다” 1월 14일 일본 군함 쓰쿠바가 요코스카에서 화약고 폭발로 침몰해 일본 천황이 위문한 것을 소재로 했다. 일본 군함이 침몰해 위문한 것에 은총을 느끼는 주체를 일본과 조선으로 일치시켰다. 10월을 주제로 한 「」는 “전에 없던 호우 폭풍 많아/ 홍수 지나가자 곳곳에 재해 입었네/ 하사금 내리심은 구휼하는 은전이라/ 조선 인민 한 가지로 파도 같은 그 은혜에 젖었네” 일본에 큰 홍수가 일어나자 일본 천황이 구휼금 내린 것을 소재로 썼다. 여기에서도 일본 천황이 일본인 수재민을 위해 하사금을 내린 것에 은혜를 느끼는 주체를 조선으로 일치시켰다. 2월(「」제 사업 속속 발흥)는 “여러 사업들 활발히 일어나니/ 다투어 자본 투자함은 예전에 없던 일/ 새 회사 신청함 매우 많아/ 일일이 그 이름 기록하기도 어렵네”라고 하여 경제발전을 부각시켰고, 11월(「각지 농산 품평회」)은 “기지국 팔정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했거니와/ 농산물 품평 위해 진열하고/ 등수 나눠 우수한 것 상을 주니/ 장려함에 감격하여 모두들 기뻐한다”고 식민지 농정을 찬양했다. 두 시는 합병 이후의 회사 증가와 농산진흥을 소재로 기민통치를 선정으로 미화하고 있다. 공업화와 농업장려는 식민지 수탈 착취를 위한 경영정책이었지만, 본질보다는 표면적인 변화를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판단해 받아들였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 천황 다이쇼를 만나러 간 것에 대해서는 「」이라는 시에서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었으니/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라고 했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동생인 영친왕 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것과 일본황실과의 결혼 내정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숨겨진 의도는 영친왕과 일본황실의 결합을 통해 이왕가의 권위를 낮추어 식민통치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를 두고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찬양한 것이다.
1916년 12월 10일자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환영하는 한시가 게재되었다.(현대시단---환영 장곡천 총독) 『매일신보』 1916,12,10
“채찍이며 모자 그림자에 수레 먼지 가득한데/ 문관과 무관들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한 겨울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 하세가와는 청일전쟁의 공적으로 남작에 올랐고,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내면서 이토와 함께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자 임시 통감대리를 지냈다. 합병 후 총독으로 승진해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자 이를 환영하면서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한 겨울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이라고 표현했다.
1917년 10월 문예구락부가 주최하는 문예대회 고시원으로 참여했다. 문예구락부(총재 후작 박영효)는 1911년 7월 한문의 폐지에서 유래되는 위기감과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조직했다. 문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의에 관계된 것을 제거한다”고 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금지했다. 1918년 12월 1일자에 실린 「마산에 신조한 석탑」이 『매일신보』에서 확인되는 마지막 글이다. 1919년 4월 양산을 유람했다.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했지만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1962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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