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부두는 일제 강점기부터 갯벌을 매립해 포구로 전환한 인천의 3군데 포구중 하나이다. 1930년부터 2년간 일대를 매립하고 북성포구와 만석부두, 그리고 화수부두가 생겼다. 1970년대까지는 수도권에서 알아주는 새우젓 전문시장이었으며, 옹진, 강화, 충청권의 어선들이 드나들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항 중의 하나였다.
100여가구 200여 명이 낮은 집에서 서로 기대며 살아
지리적으로 화수부두는 긴 갯골로 이루어진 인천의 유일한 포구이다. 긴 갯골을 따라 배가 정박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 화수부두는 100여척의 배들이 몰려 파시를 이루고 배에서 갓 잡아온 생선을 판매하였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이곳에서 풍어제 굿이 벌어졌었고 선박에 관한 모든 상점들이 모여있었다.
화수부두엔 아직도 약 100가구에 2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안 쪽 끝으로는 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두 군데나 있었던 얼음공장, 여기에서 생산한 얼음을 컨베이어 밸트로 바다까지 연결된 독특한 풍광, 한 달에 두 번 높은 물이 들어오면 갑자기 풍요로워지는 동네의 분위기, 물을 퍼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이것을 구경하러 온 도심권 인근 시민들의 모습까지 동네는 시끌벅적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동네풍광이야말로 사진 마니아들의 천국이었다.
1975년에 연안부두를 대규모로 매립하고 모든 행정을 이전하면서 어선들의 주무대도 이동했다. 더욱이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고 북항부두의 건설과 더불어 부두는 고립된 양상으로 변해갔다. 화수부두 갯골 앞은 동국제강이 들어서 바다경관이 가려지고, 두산인프라 토어의 건물을 끼고 들어가면 고립된 채로 남아있는 화수부두를 만나게 된다. 화려했던 화수부두는 조용하고 한적한 도심의 섬처럼 외톨이가 되었다. 이곳 동네는 그 옛날 못살던 시절, 철거촌이었다. 어깨가 닿은 정도의 게딱지같은 집들에서 아직도 깊은 시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시간대마다 달라지는 풍광에 사람사는 냄새 가득
아름답지 않는가? 적어도 50년 이상이 된 물건들이 갯골을 끼고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화장실이 가장 좋은 건물이고 여기에 게딱지같은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삶이란 고통이라는 인식이 절로 생각난다. 아직도 바닷물이 들어오고 온갖 어구를 팔며, 낚시꾼들이 드나들고 사진마니아들을 위한 새로운 풍광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인천이나 동인천에서 10분 남짓 갈 수 있는 나의 고향 인천에서 그것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아는가? 누구는 찌든 바닷가 내음과 너저분한 풍광이 역겨울 수 있지만 항구도시 인천의 역사를 한 몸에 느끼는 인천의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소래포구와는 달리 사람의 흔적과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 2층 구조의 주택들이 남아있고, 독특한 풍광에 서로 다른 시간대마다 달라지는 풍광은 사람사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역사의 소중함은 알지만 이곳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물이 가지는 정체성과 있는 그대로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동네다. 빛으로 가득한 대지 위에 태양의 빛은 모든 곳을 비춘다. 내가 살지 않아도 바닷물을 보고 작은 어선을 보며 삶은 소라 한 조각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맛을 누가 느끼랴….
2003년부터 10년 동안 이마고 사진그룹에서는 화수부두를 드나들며 4회에 걸쳐 현장에서 사진전을 하고 마을사람들과 문화적 접촉을 시도하였다. 사진전과 더불어 마을축제의 성격으로 1년에 물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음력 7월 보름에 축제기간을 정하고 마을사람들과 공동기획으로 동네에서 공연과 나눔행사를 진행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마을단위가 움직여 기쁨을 서로 나누는 문화예술행사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이 고립된 마을에 2013년에 야심차게 수산물직판장을 열었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소망과는 달리 적자가 계속되어 가게가 문을 닫고 있지만 이곳을 고향으로 알고 살아온 주민들이 있는 한 화수부두는 옛 이름대로 남아있으리라 생각한다.
화수부두에서 인천의 가치를 앞으로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지만 개발의 의지와는 별도로 남겨야하는 인천의 가치재창조로서의 명단에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글, 사진 류재형 자유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