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5
1.
오늘은 초복이다.
더위가 시작된다는 의미의 절기,
근데 그건 아무리 더워도
30도 넘을 일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
더위는 이미 한달 전부터
기승을 부리고
맑았다가 흐렸다가
국지성 소나기 (스콜)까지 내리니
여기가 한국인지 동남아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상기후, 지구 온난화
인류가 망한다면
핵전쟁이 아닌 준엄한 자연의
분노에 의해서일 것 같다
태양광, 풍력 등등...
내가 그쪽 일을 해서가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원전, 화석연료는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야 한다
2.
그건 그렇고
오늘은 복날이니
복날에 얽힌 어릴적 이야기 하나.
사실 복날 하면
개하고 관련이 깊다
개패듯 팬다는 말을 아는지?
글자 그대로 개를 묶어 매달고
죽을때까지 몽둥이로...
더 이상의 묘사는 차마 못하지만
우리 어릴 적에 복날이면
동네 어른들이
강가에서 그렇게 개를 잡아 먹었다
세상에...
키우던 개를 잡아 먹는다고...??
그딴건 배부른 소리였고
철딱서니 없는 헛소리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지만
당시에 개는 돼지나 닭처럼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 짐승이지
반려동물이 아니었다
고기는 커녕 끼니나 안거르면
다행이던 때였으니
개를 잡아 된장을 발라서 끓여낸 국은
한여름 힘든 농사일을 버텨내고
몸 축나는 것을 보호하는
글자 그대로 보신탕이었다
3.
복날 음식에
삼계탕도 빠질 수 없다
지금이야 치킨이니 뭐니
닭이 흔하지만
그때는 일년에 두어번 먹었나?
참 귀한 음식이었다
단백질을 보충하려고
개구리나 잡아서 구워먹다가
복날이나 되어야 먹는 삼계탕은
비록 한그릇을 네명이 나눠먹었지만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었다
고기를 먼저 다 뜯어먹고
남은 죽에다 보리밥 두그릇을 말면
죽이 아니라 비빔밥처럼
뻑뻑한 이상한 음식이 되지만
그래도 닭국물 맛이 나니 좋았다
4.
우리집은 가난했지만
어릴적 외가는
극장을 세 개나 가지고 있던
큰 부자였다.
외할머니는 복날이면
막걸리를 스무말씩 시키고
내 키보다 큰 가마솥에
닭을 몇백마리씩 삶아서
영계백숙을 만들었고
애부터 어른까지 한마리씩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 먹였다
어른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막걸리 한사발을 쭈욱 들이키고는
잘 삶아진 닭다리를 통째로 들고
쭉쭉 찢어서 게걸스레 먹었고
아낙들은 아낙들대로 한켠에 모여
젖먹이 아이들에게
닭고기를 잘게 찢어 먹이면서
막걸리 한잔과 노랫가락에
모처럼 시름을 달랬다
너나 할 것없이
모처럼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불콰해진 얼굴로
니나노~ 노래도 부르고
덩실덩실 막춤도 추면서
가끔 아차차...
외할머니를 칭송도 하고...
내가 기억하는 복날의 한 장면은
늘 이런 모습이었다
5.
그런데 사실
내가 더 기억나는 복날 음식은
개고기 보신탕이 아니고
삼계탕이나 영계백숙도 아니고
맑게 끓인 민어탕이다
외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닭을 한 마리씩 삶아주셨지만
우리에겐 민어탕을 손수 끓여 주셨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민어는
무척 귀하고 비싼 식재료이며
전라도나 경상도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복날 음식으로는 으뜸으로 친다
생민어탕도 좋지만
할머니는 전라도 식으로
말린 민어를 쓰셨다
최소 두자 (60센치)이상되는 민어를
황태처럼 내장을 빼고
몸통을 벌려서 잘 말려 보관하다가
먹기 전날 쌀뜨물에 담가
하루 종일 불리고
먹기 좋게 토막을 툭툭 쳐서
별다른 거 없이
무하고 파만 좀 넣고
맑게 끓여낸 민어탕,
그 쫄깃한 민어의 식감과
곰탕처럼 뽀얀 국물,
이 세상의 모든 해장국들 보다도
더 시원하고
더 오묘하고
더 깊은 맛,
당시 어린 우리가
무슨 그런 맛을 알까만은
그 민어탕 한그릇이면
정말 먹다가 픽 쓰러져도 좋을만큼
말할 수 없이 맛있었다
6.
그게 할머니의 맛이었는지,
민어 본연의 맛이었는지,
세월이 흘러서
추억이 보정된 맛의 기억인지
그런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 글을 쓰다보니
지금 내 입에는
계속 침이 고여만 가고
급격히 배가
고파온다는 것이 중요할 뿐
이럴게 아니라
건조 민어를 좀 사야겠다
비리지 않고 맛있는 생선이니
아무렇게나 해도 맛나지만
무, 파, 마늘 약간, 두부 좀 넣고
한소끔 끓이다가
곰탕처럼 뽀얗게 국물이 우러나면
밥을 같이 먹으면 안되고
온전히 탕만 한 그릇,
거기에 소주 한병 겻들이면
그야말로 천상의 맛,
그만한 복달임이 없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