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성 Re:마더 데레사의 기도와 영적 어둠
지도사제 16.09.10 07:53
그 뒤 가톨릭 성인들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마더 데레사의 영적 어둠의 체험은 내게 깊이 각인됐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고, 선종한 지 6년 만에 복자가 되고, 성인으로 선포되기 전에 20세기 가장 위대한 성녀라고 불렸던 그녀가 ‘영혼의 어둔 밤’으로 오랜 기간 고통을 겪었다는 얘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살아 있는 성녀’로서 당연히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겨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로레토수도회 수녀였던 데레사는 1946년 9월 10일 기차여행에서 ‘부르심 속의 부르심’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콜카타의 페르디난트 페리에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데레사는 기도 중에 “네가 도와주지 않겠느냐”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의심과 두려움으로 답하자 하느님은 단호하게 “네가 날 위해 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말씀하셨다.
데레사는 그 뒤 여러 주일 하느님과 심오한 친교를 누렸다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기로 한 데레사는 수녀원 밖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선교회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그 직후부터 선종할 때까지 하느님이 부재하시는 것 같은 어둠을 체험했다.
그녀는 영적 지도자 중 한 분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자신의 고통이 무의미해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페리에 대주교에게 “하느님이 나를 원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이 하느님이 아니시고, 하느님이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끔찍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고 했다.
마더 데레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영적 지도자의 도움으로 자신의 고통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기회로 바라보고 어둠을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상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어둠과 고통의 한 부분,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쓸모없다는 느낌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더 깊이 동화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성녀도 저런 어려움을 겪는구나. 성녀 역시 인간이구나”하는 위로감 같은 것도 느꼈다.
성녀가 그렇게 간절하게 주님을 뵙고자 해도 뵙지 못했다니 우리 역시 주님을 뵙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믿음이 약한 평범한 신자가 성녀의 영적 고귀함과 어둠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진선(대건 안드레아) 논객닷컴 편집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내맡김의 영성포름(마처예함) 영혼의 황폐
무소김소영 12.03.28 08:27
<댓글>
지도사제 12.03.28 09:25
저는 과거 훌륭한 성인들이 경험하셨다는, 과거에는 "영혼의 무미 건조시기"라 부르던 "영혼의 황폐시기"가
과거에 어느 글(댓글?)에서도 밝혔지만 완죤히 100%를 다 내맡긴 영혼들에게도 과연 그 시기가 찾아올 것인가가 매우 참으로 궁금합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아마 내맡긴 영혼들에게는 그 시기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아주 가끔(지금까지 몇 번?)"인간적 외로움?"을 경험하였는데, 그 경험 뒤에는 주님께서 반드시 더욱 당신 가까이로 이끌어 주심을 경험했습니다.
인간적인 외로움이란 제가 독신 남성이라는 측면의 것이 아니라,
제가 이 세상에 혼자 덩그러이 놓여졌다는 느낌을 받거나 저를 통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심에 있어서 저항을 받거나 고달프게 느껴졌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저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펼치시고 계심이 확실하며, 어떤 일에서나 저의 편이 되어 주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사랑하는 여러분을 저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당신께 내맡겼기에, 우리가 참으로 부족하고 때로는 죄에 떨어지더라도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렸는데, 설령 우리에게 영혼의 황폐시기가 찾아온단들 하느님 안에서 겪는 황폐이기에, 그리고 내맡긴 영혼들의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 하느님이신데 걱정 뚝입니다.
이론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하느님께서 아마 *하내영*들에게는 영혼의 황폐시기도 한꺼번에가 아니라 나날이 조금씩 경험시켜 주실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 이다음을 다같이 지켜보면 되겠습니다.
* * * * * * *
★영 성 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지도사제 13.11.05 17:43
<댓글>
지도사제 13.11.05. 19:49
제가 조금 전에 쭈욱 다 읽어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느낀 소감은, "아~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역시 최고의 영성이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 성인의 말씀들은, 하느님께 100%를 완전히 다 내맡기지 못한 영혼들이 체험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 말씀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100%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100% 하느님께 내맡기는 그 행위로써, 이미 그 두 가지의 밤을 다 거치게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젠가의 댓글에서 <하느님께 100%를 내맡긴 영혼들에게는 "무미건조의 시기(어둔밤)"를겪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십자가의 성요한의 영성을 종합하여 강의하신 정무웅 신부님의 글을 대하며, 저는 과거에 가졌던 저의 그러한 생각에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저의 영적수준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언젠가 더 높은 영적수준(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수준)이 에 오르게 되어 지금 저의 생각이 잘못됨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다시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의 수준에서는, 요한 성인께서는 과거의 전통적인(능동적) 수덕생활 방식으로 자신의 영적 완덕에 이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현대에는 과거의 방식(능동적 영성)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주도하여 영적 완덕을 이루게 해 주시는 수동적 영성 즉,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완덕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끌어주실 것임을 저는 강하게 확신합니다. (과거 십자가의 요한 성인 시대에는 매우 드물었지만 말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가장 탁월한 영성입니다. 정말 놀라운 영성, 하느님께 가장 쉽게 나아갈 수 있는 영성입니다.
오! 지극히 흠숭하올 하느님의 뜻이여,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이끌어주소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통하여 영원무궁찬미영광 받으소서!!!
* * * * * * *
★영 성 Re: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2)
지도사제 16.09.13 22:44
<댓글>
지도사제 16.09.16 10:36
<요한은 천성적으로 상냥하고 감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런 성격은 병원에서 일하면서 많이 계발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침묵과 고독을 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련기 동안 함께 살았던 수사님들은 엄격하고 침묵과 고독을 추구했던 그의 모습으로 인해 조금은 기이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 * *
★영 성 Re:Re: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3)
지도사제 16.09.13 22:47
<댓글>
지도사제16.09.14 11:56
<요한 수사 같은 경우에는 사제품을 받을 즈음에 ★더욱 엄격한 수도 생활★ ? 을 하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 * *
★영 성 Re:Re:Re: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4)
지도사제 16.09.13 22:47
<댓글>
지도사제 16.09.14 12:04
<그뿐만 아니라 어느 때부터는 뇌물과 명예를 약속하며 끊임없이 성인을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이 맨발 가르멜 운동을 포기한다면, 원장 자리를 약속한다거나 금으로 된 십자가를 주겠다며 성인을 꼬드겼다고 합니다.> ?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 물음이 성인의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주어지는 것일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다는 말인가?” “혹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이러는 가운데 성인은 그간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체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체험, 자기 나약함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
* * *
▣ 보조교사방 영적지도를 마칩니다
지도사제 16.09.18 21:03
<댓글>
무화16.09.18 22:39
【 서양신비사상의 기원
p.266
[ "어둔 밤"은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겪는 영혼의 체험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영혼은 "어둔 밤" 속에서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아보려 애쓰며 이렇게 애쓸 때에 느끼게 되는 괴로움과 아픔은, 원래 유한한 본성을 지닌 영혼이 자기 힘에 넘치는 경험을 감당하기 위하여 겪는 준비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혼의 어둔 밤"이 뜻하는 바일까?
『어둔 밤』에서 성 요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어두운 밤이란 하느님께서 영혼 속으로 흘러드심을 뜻하는 바, 그리하여 영혼은 원래부터 습관적으로 지닌 영적 무지와 불완전으로부터 깨끗이 정화되는 것이다.
관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주입받은 관상, 혹은 신비신학이라고 한다.
영혼 속으로 흘러드는 하느님의 빛은 영혼을 정화하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준비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성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을 비추어 주시고 정화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빛이 흘러드는 것이라면 왜 어두운 밤이라고 하는지를 묻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이 하느님의 지혜가 영혼에게 밤과 어둠일 뿐 아니라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첫째는 하느님의 지혜가 아득히 높아 영혼의 역량을 초월하기에 어둠이라 이르는 것이요,
그 둘째는 영혼의 더러움과 낮고 낮음으로써 그러기에 괴롭고 아프고 캄캄하다는 것이다.」 ]
p.267 [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은 죄로 인하여 생긴 "어둔 밤"이 아니라 "어둔 밤"이 죄에 가득한 영혼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
p.272
[ "어둔 밤"에 대한 성 요한의 핵심적 사상은 영혼이 어둔 밤을 통하여 정화되면서 하느님께 순수하게 응답할 수 있게끔 준비를 갖추는 과정 이기 때문이다.
"어둔 밤"이 깊어감에 따라 영혼은 어쨌든 수동적인 자세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대단히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수동성이란 확실히 힘든 노력의 결실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 협력한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 완전히 투명하게(순수하게) 되는 자세를 뜻하는 것이다
성 요한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비유를 들어서 영혼의 수동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 힘을 가지고 정신능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영혼의 무위(無爲)와 화평을 통하여 그 안에 박아주시고 굳혀 주시는 보화를 막거나 잃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얼굴을 그리고 색칠하는 초상화가와 같으니, 만약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 얼굴이 흔들리면 화가는 아무 일도 못하고, 하고 있던 일도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영혼이 마음의 평화와 무위에 있고자 하면서 동시에 어느 작업이나 애착이나 정신을 쏟는 일에 마음이 있으면, 그 영혼은 마음이 흩어지고 불안해져서 감성의 메마름과 허전하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둔 밤) ]
└ 지도사제 16.09.19 00:04 @무화
정말 주님은 놀~라우셔요. 지가 <어둔 밤>에 대한 지 개인적인 견해를 결론으로 올릴 것입니다.
아마, 무화의 위의 댓글(십자가의 성 요한)에 대한 저의 반대 견해가 지 견해의 결론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영혼이 마음의 평화와 무위에 있고자 하면서 동시에 어느 작업이나 애착이나 정신을 쏟는 일에 마음이 있으면, 그 영혼은 마음이 흩어지고 불안해져서 감성의 메마름과 허전하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는,
십자가의 성요한의 말씀에 대해서 말입니다.
* * * * * * *
★영 성 Re:Re:Re:Re:Re:{ } / 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영 성
지도사제 17.05.08 16:01
<댓글>
지도사제 17.05.08 16:16
거룩한내맡김의 영성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 다 <내맡긴> 영혼들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관상기도를 통해서 어렵게 깨달은 깨달음을 다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왜냐구요?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 다 <내맡으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애덕을 통해 합일에 이른 영혼의 체험 양식들> ①~⑤도 다 체험케 해 주십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 * * * * * *
★거룩한위탁 22 p.118-122 제 2편 제 I장 이탈 ②
무화 18.03.31 00:10
p.121
「게」주교는 이 영적유아의 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이것은 얼마나 완전한 길이랴! 이것은 고통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욱 완전한 것이다。
왜냐 하면、 진실로 마음 고요히 작은 이가 되는 것보다、 커다란 희생을 인간에게 부과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만은 일곱가지 죄원의 괴수이며、 모든 욕망의 근원이고、 태고(太古)의 뱀이 인간계에 쏟아 넣은 독이다。
유아로서의 정신은 고행의 정신보다도、 보다 확실하게 이 오만의 뱀의 숨을 근절시킨다。
인간은 고통과 싸울 때에 쉬이 자기 자신을 찾아내어、 자신을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감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참으로 유아가 되어 있다면、 자애심은 절망할 것이다。
이 거룩한 유아의 길의 과실을 아무리 압착하드라도、 스며나오는 것은、 위탁 외에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유아는 조금도 거절하지 않으며、 거스르지 않고 자신을 남에게 맡긴다。
유아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이해하고 있겠는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이해하며、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겠는가.
유아는 전연 남의 뜻대로 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얼마나 신중하게 유아를 다루고 얼마나 그를 애무할 것인가。
그런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이를 마찬가지로 과연 다룰 수 있겠는가.」 (「게」주교 「위탁二」)
* * * * * * *
★ 가르멜의 영성 ★ Re:가르멜의 성인들 4부 : 십자가 성요한의 영성_윤주현 신부_영성특강 / 가르멜 산
무화 20.06.26 21:56
( ★영 성 Re:Re:Re: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4) 지도사제 16.09.13 22:47 )
가르멜 산
---
<댓글>
지도사제 20.06.26 22:51
<완덕을 상징하는 가르멜 산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이 이렇게도 알아듣기 어려워서야~ ㅠㅠ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 이다지도 어려워서야~~~ 흨흨 ㅋ
【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가 우리 시대에 선사한 8 가지 선물 1
지도사제 18.09.08 08:57
<댓글>
지도사제 18.09.08 10:35
<십자가의 요한이 자신의 시에 붙인 주석이 그 시에 담긴 진리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힐데가르트가 자신이 받은 조명에 대해 붙인 주석도 그 조명의 이미지와 상징성의 깊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입니다. 만일 힐데가르트, 에크하르트 등의 신비주의자들이 그들의 말을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달했다면?
그들은 즉시 종교재판에 넘겨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의 역사는 아니러니합니다.
★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한 이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한 이들을 심판해왔고 ★
그것은 앞으로도 아니 이 세상 끝날까지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태 13>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