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데레사의 삶과 사랑 8편
정배.보조.기조실 23.12.27 05:21
한 권 이어듣기-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8편(56:27)
한 권 이어듣기-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8편
< 내 생에 가장 큰 발견, 작은 길 >
내가 가르멜 수녀가 된 지도 어느새 6년이 지났다. 1894년 말에 이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성덕으로 진보하기 위해서 많이 인내하고 노력했다.
수녀원에서는 위대한 성인들의 전기를 식사 시간이나 기도 시간에 낭독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로, 프란치스코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같은 분들이다.
그런데 위대한 성인들과 나를 비교할 때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들 성인이 걸어간 길을 나는 결코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엄격한 고행을 할 수 없으며, 은수자처럼 사막으로 갈 수도 없고, 교회 학자들처럼 박식한 책을 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이교도의 나라로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성인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분들을 구름까지 치솟은 산이라고 한다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모래알과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큰 일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용기를 잃지는 않았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모든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주어져야 한다.
나는 작고 약하다. 나는 지금의 나보다 크고 강할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며 수많은 불안전함과 일상적 의무를 실행하는 데 평범함 등을 수용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과 동료, 수녀님들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내적으로 얼마나 빨리 화를 내며, 집안과 정원에서 일할 때는 얼마나 느리고 서투른지, 그리고 성당에서 침묵 속에 기도할 때는 왜 그렇게도 조는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작고 곧고 짧으면서도 간단한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것은 모든 이를 위한 길이어야 한다. 나는 기도하면서 많이 숙고했다. 어느 날 나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 고급 호텔에 19세기 말의 기술 발전에 어울리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셀리나와 나는 신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꼭대기까지 올라가곤 했다.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우리를 건물의 최고 높은 곳에 데려다 주었다.
이 체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성덕의 정상에 빨리 도달하도록 이와 비슷한 수단이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성경을 다 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발견을 했다. 잠언에서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했다. 작은 자여 나에게로 오라. 이 작은 자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하느님은 신뢰를 가지고 당신에게 오는 작은 자를 어떻게 하시는가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대답을 주셨다.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나는 그렇게 너희를 위로하리라. (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 이사야 66,13
나의 가슴에 너희를 안아주고 나의 무릎 위에서 달래주리라.' (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이사야 66,12
나는 나의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것이다. 예수님의 팔이 나를 성덕의 정상에 데려다 주리라.
나는 단지 사랑과 신뢰로 예수님께 다가가면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를 향해 달려가듯이 나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정신이 없었다.
환호성을 지르며 수도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가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설레었다.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크신지요? 당신은 나의 기대를 훨씬 능가합니다.나는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리이다. '
나는 이제야 가르멜의 아버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은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랑을 통해서만 보답할 수 있다. 그렇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이다. 사랑은 사랑을 유혹한다.
'예수님, 당신은 아시지요? 당신만을 사랑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내가 원치 않는다는 것을 당신께서는 내가 가야 할 길로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작은 길 또는 단순한 길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이 길이 보잘 것 없거나 또는 의미없는 길이라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의 각오 외에는 특별한 지식이나 능력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갈 수 있는 길이다.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 어린아이나 어른,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이나 슬퍼하는 사람, 많은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큰 걸음으로 빠르게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모두 갈 수 있는 길이다.
이 작은 길을 가능한 한 편안한 방법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거나 희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샛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작은 길 위에서는 특별하고 눈에 띌 만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각광을 받거나 신문에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작은 길에서는 평범한 인간 생활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한 가지만 필요하다. 크고 강하며 성실한 사랑, 이러한 사랑과 함께 사람이 어디에 있든 매일의 의무를 성취할 수 있다.
학교에서 또는 일터에서, 주방의 냄비 옆에서, 또는 외양간에서 환자를 간호하든, 또는 환자가 되어 누워있든, 작은 길 위에서는 사람이 땅바닥에서 바늘을 주어 올리든, 황금 성전을 짓든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거창한 행동을 보지 않고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랑만을 보신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인생의 좌우명을 이렇게 정했다. < 오로지 사랑만이 중요하다. >
수도원의 일상생활은 작은 길 위에서 날마다 사랑을 실천하도록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러한 훈련은 완성이란 없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른 아침 기상과 함께 작은 길은 시작되었다. 가끔 나는 좀 더 뒤척이면서 얼마나 자고 싶었는지, 몇 분이라도 좀 더 누워있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동체의 기도 시간에 제때 나타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노인 수녀님이 한 분 계셨는데, 허둥대지 않고 성당까지 모셔가기 위해 그녀를 기다렸다. 기도와 미사는 기쁨과 힘을 길어올리는 원천이다. 친절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수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하루를 지탱하게 해준다.
작은 길에서 모든 것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11:00 나는 다음 세 가지 사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많은 자제력을 요구했다.
공동체의 모든 말과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수녀님이 있었다. 그녀의 말과 행실, 성격 등 모든 것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하느님께 호감을 사는 아주 좋은 수녀님이야.' 이렇듯 나는 그녀에게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반감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다. 사랑은 단지 기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이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그녀를 위해서 기도했으며, 예수께 그녀의 좋은 특성을 열거했다.
나는 예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확신했다. 어떤 예술가도 자기 작품에 대해 칭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의 예술가인 예수님은 사람의 외양에만 머물지 않고 그 영혼의 아름다움에 놀라워할 때 행복해 하신다.
나는 그 수녀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녀에게 봉사할 기회를 찾았다. 그녀의 불쾌한 요소에 대해 비난하려는 유혹이 들었을 때, 그녀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어느 날 공동 휴식시간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님 내 어디가 당신 마음에 드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수녀님은 나를 볼 때마다 웃으니 말입니다."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녀의 영혼 안에 숨어 계시는 예수님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대꾸했다. "당신을 보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웃어요." 물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기도가 끝나고 대침묵 시간이었다. 갑자기 손님이 오게 되었으니 램프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기름과 램프, 심지 등을 찾아야 했다. 다른 수녀님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갔으며 각자 1시간의 자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손님들과 이러한 상황에 대해 투덜대면서 휴식시간에 이런 일을 시킨 현관 수녀님에게 화가 났다.
그녀가 램프를 챙길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때 내면의 빛이 내 어두운 상념을 밝혀주었다. 나는 나자렛의 성 가정에서 시중 드는 상상을 했으며, 아기 예수님을 위해서 등불을 밝혔다.
나는 정성스럽게 행동했으며, 기쁘게 재빨리 램프를 현관에 갖다 주었다. 그때 이후로 갈등에 접할 때마다 이런 방법을 적용했으며, 이것은 놀랍도록 도움이 되었다.
어느 겨울 빨래하는 날이었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며, 손은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나는 빨래를 도와야 했다. 어느 수녀님이 조심성 없이 물을 튀겼다. 그녀는 차갑고 더러운 물을 계속해서 내 얼굴과 옷에 튀긴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망을 칠까, 그녀에게 말을 할까 똑같이 더러운 물을 그녀의 얼굴에 튀길까 눈에 띄도록 내 얼굴을 닦아낼까.' 이 모든 것은 다른 수녀님들 앞에서 그녀의 잘못을 들추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경계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예수께 달아나는 것, 그분과 함께할 때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곧 흥분하는 대신 예수께 도망가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세례 받은 우리는 가지다. 예수님과 이루는 결속 안에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은 가지를 통해서 사랑의 열매를 세상에 선사할 수 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성실, 온유, 절제 등 수도원의 공동체 생활을 아이들 장난으로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착각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것은 분명해졌으리라 생각한다. 예수님 없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밤중에 태양이 빛나기를 바라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과 일치할수록 나는 더욱 진실되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다.
수도 생활은 작은 길 위에서 많은 순례를 할 수 있는 나날이 새로운 사랑의 연습장이었다.
내가 아직 학생이라면 나는 나의 작은 길을 학교에서 실천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주의를 기울이고 함께 작업하며 정성을 다해 숙제를 하고, 학교 친구들과도 친교를 나누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가정주부와 엄마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했을 것이며,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가정을 만들려고 온 마음을 쏟았을 것이다.
그들의 기쁨과 걱정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매일 새롭게 작은 길을 출발하는 것은 진정 사랑의 모험이었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활기차고 기쁨이 가득한가 하면 다음 날은 벌써 태만하고 모든 게 싱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내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이 정도가 되면 하나의 방법 밖에 없었다. 내게서 떠나 예수께 가자.
무엇인가 힘들게 느껴질 때, 그것이 꼭 그래야만 한다면 하루에 1백 번이라도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 그런 후 나는 곧장 과제 수행에 착수했다.
내 체험을 살펴보면 사랑과 기쁨을 주는 데서 작게나마 진보했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나를 잊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나는 행복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기분에 좌우되지 않게 되었으며, 자기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거창하고 눈에 보이는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그러한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런 것은 하느님과 인생에 대한 기쁨을 빼앗아가는 감옥과 같은 것이다. 불확실성과 공포가 항상 수반되며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스러운 존재가 된다.
나는 이것을 10여 년간 체험했다. 작은 길은 나를 내적 자유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고, 원치 않는 것은 하지 않으면서 인생을 실컷 즐긴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과 마약, 그리고 부정적 의미의 우정과 성적 관계에 빠지게 된다.
오로지 사랑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이런 뜻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이해했다.
작은 길 역시 사도의 길이다. 사도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선교 여행에 감격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처럼,
나도 역시 수많은 작은 희생을 통해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하게 될 영혼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싶다.
물론 작은 길에서도 넘어질 수 있다. 곧 부실하고 소홀하며 의무 실행의 게으름을 피우고, 과제 앞에서 도망치며 사람들을 대할 때 가시돋친 선인장처럼 날카롭게 대하는 것 등
내가 약점이 있고 불완전하며 실수를 하고 동료 수녀님들이 내게서 그런 것을 발견한다 해도 전혀 비참해야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가 진창에 넘어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야 할지라도, 그 때문에 아이를 덜 사랑하지는 않는다.
만일 내가 죄를 짓고 더러워졌다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덜 사랑하겠는가 나는 내 실수를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의 난로에 집어 던짐으로써 다시 일어서기를 원한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난로 위에 물방울이 떨어져 순식간에 증발하는 것과 같다. 나는 내 길을 기쁘게 계속 갈 것이며, 더 이상 내 실수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가슴속에는 심오한 평화만 가득할 것이다.(21:55)
< 사랑으로 인한 삶 >
어느 날 사촌 마리 개린이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세속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될 수 있는지 알고자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었으므로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사랑의 작은 길은 얼마나 아름답고 확실한 길인가 예수께서 나를 직접 가르치셨으며,
모든 것은 사랑으로 행해야 하며,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 예수께 사랑을 드리기 위해 작은 기회를 모두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비밀리의 사랑으로 이룬 작은 일은 종종 커다란 업적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그것은 행위의 외적 거룩함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것을 증명한다. 내 길에는 항상 빛이 있었으며, 작은 것에 대한 식견을 주었다.
공동 휴식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현관 수녀님이 종을 두 번 치면서 대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구유를 장식할 성탄절 트리용 나무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를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장 수녀님이 나인지, 내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수녀님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현관문을 열어주라는 신호를 보냈을 때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곧 앞치마를 풀기 시작했지만 아주 천천히 행동했다. 내가 그렇게 할 때 내 옆에 수녀님이 나보다 빨리 앞치마를 벗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내 이웃이 작은 기쁨을 얻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항상 다른 사람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며 수도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먼저 해야 하기 때문이다.
1895년 사순절 어느 화요일 성체 현가 되어 있는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내 생각과 마음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사랑해야겠다는 상념으로 꽉 차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상념을 글로 써내려갔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15행의 시가 탄생했다.
나는 마지막 행에서 내 간절한 그리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 그의 사랑이 내 가슴을 불태우길 바란다. 나는 영원히 그와 결합되기 위해서 그를 바라보길 원한다. 그것은 내 천국이며 내 운명이다. 사랑 때문에 살리라.' 25:15
<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의 봉헌 >
1895년 6월 9일은 거룩한 성삼위께 봉헌된 날이었다. 축일 미사가 거행되는 가운데 갑자기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한 번제물로 나를 봉해야겠다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를 떠나지 않는 강한 확신이었다. 성당을 나오자마자 내 계획에 제노베파 수녀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먼저 아네스 원장 수녀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 원장 수녀님은 다른 걱정거리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원장 수녀님은 내 관심사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지나가는 말투로 우리에게 서로 의견을 나누고 계획을 실행해보라고 허락해 주었다. 뷔소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도원에서도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을 발견했다.
내 계획에 셀리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가르멜를 비롯하여 당시 프랑스 그리스도교는 전체적으로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곧 하느님이 모든 죄를 벌하신다는 두려움이 믿는 이들을 위협했다. 사람들 특히 수도자들은 엄격한 고행으로 하느님의 정의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 수도원에서도 그 사이 돌아가신 두 명의 수녀님이 하느님께 자신을 재물로 봉헌했다. 이러한 희생은 거창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왠지 따라하고 싶은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나는 하느님의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에 나를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셀리나는 나를 잘 이해했으며 내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에 대한 봉헌 기도문을 작성했다. 1895년 6월 11일에 나와 제노베파 수녀는 웃음 짓는 동정녀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 두 사람 이름으로 봉헌 기도문을 읽었다.
셀리나는 이러한 봉헌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고자 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내게 모든 것을 주셨다. 당신 자신까지도 나를 위해 당신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님, 당신께 나 또한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다. 나 자신마저 .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며, 자기 자신마저 몽땅 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위한 사랑! 나는 시편 기도자와 함께 이렇게 노래하고 싶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게 된다면 아무도 사랑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그와는 달리 죽도록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죄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어떤 영혼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알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하신 아버지와 되찾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셨다. 무한히 정의로우신 하느님은 되찾은 아들에게 그의 모든 죄를 온갖 호의로 용서해 주셨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나와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게 대하지 않으실까, 자비하신 사랑~!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다.
< 계속되는 기침 >
나는 조용히 그리고 드러나지 않게 작은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오래전부터 마루를 쓸 때 먼지가 나를 자극했으며,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도 심하게 기침을 했다.
목이 계속해서 아팠으며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수도원의 주치의가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그의 수고에 비해 효과는 별로 없었다.
언니들과 친척들은 내 건강에 대해서 걱정을 했다. 나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으며, 내 건강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소임에 몰두하고자 했다.
내 친절과 사랑은 공동체가 깊이 아는 어느 수녀님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쉽게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와 함께 세탁실에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문에 수녀님은 더욱 고립되었다. 나는 스스로 이 소임을 청했으며, 가련한 수녀님과 함께 일을 하면서 수도자다운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우리는 예수께서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 누구도 우리의 사랑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주 웃는 얼굴로, 또는 우정어린 작은 쪽지를 통해 소외된 그 수녀님을 도와주려 했다.
1895년에서 96년에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으며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4월 3일 성 목요일 밤에, 나는 올리브 동산에서 고뇌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기도하기 위해 자정이 되도록 성당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는데 갑자기 뜨거운 물 같은 것이 입술까지 넘어왔다. 나는 재빨리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그때는 이미 등불을 끈 상태였으므로 내가 넘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만일 그것이 피라면 혹시 이번 성 금요일에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생각에 전혀 두렵지 않았으며 오히려 행복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지만 오래지 않아 날이 밝았다. 5시 45분에 나무 딸랑이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창의 덧문을 열었을 때 내가 추측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손수건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드디어 신랑이 나타난 것이다. 내가 그 앞에서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는 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하늘나라에 내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았는가.
여느 때의 성 금요일과 마찬가지로 원장 수녀님은 공동 기도 후에 공동체를 위해서 자매애(愛) 대해 강의를 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서로에게 용서를 청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수녀님을 포옹하면서 어젯밤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 나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으니까 따로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렸다.
단지 두 명의 간호 수녀님들만 내가 피를 토했다는 보고를 들었으며, 아네스 원장 수녀님은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성 금요일에는 늘 그런 것처럼 나도 단식을 하고 평상시 내 일터로 갔다. 나는 회랑의 창문을 닦을 생각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통로에 바람이 차가웠다.
천국에 간다는 희망이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그 다음 날 밤에 나는 다시 한 번 전과 똑같은 신호를 받았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 했다. 내 믿음은 천국에 대한 생각으로 온전한 행복을 느낄 만큼 그렇게 생명력 있고 선명했다.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이 영원한 보상이 될 아름다운 천국의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그들은 최고의 지식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가.
두 번째 경고 신호는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과 간호 수녀님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수도원의 주치의가 아니라 우리 가족과 사돈 관계에 있는 라네일 박사가 나를 진찰하기 위해 왔다. 그것은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곧 그는 나를 진찰하기 위해 면회실의 좁은 창살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어야만 했다.
물론 나는 수도복을 입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진찰하기 위해서는 잘 듣는 좋은 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추측하건데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며, 편도선이 부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피를 토한 것은 식도의 심한 염증으로 혈관이 터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동안 약을 먹고 항생 효과를 위해 스프레이를 사용했지만 약품의 효능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내 기쁨은 순수하게 남아있었다. '이제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겠지.'
37:23 < 수많은 소망 >
내 건강 상태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와는 달리 내적으로 강렬하고 진취적인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망을 품고 있었다. 지금 내 성서에 대해 다시 한 번 말한다면 터무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은 이미 모든 소망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는가. 나는 가르멜 수녀이고 예수님의 정배이며 그분과 결합됨으로써 영혼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확실히 세 가지 특권은 내 소명이었지만 나는 내 안에서 또 다른 성소를 느낀다. 전사도 되고 싶고, 사대도 되고 싶고, 더 나아가 사도, 교회의 교사, 순교자도 되고 싶다.
간단히 말해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영웅적인 모든 일을 성취하고 싶은 것이다. 내 안에서 십자군과 교황님의 용사로서 용맹성을 감지했다.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도 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 예수님, 나의 사랑, 나의 생명이시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통합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소망을 내 작은 영혼 안에서 어떻게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내 작음에도 예언자들이나 교회의 교사들이 했던 것처럼 영혼을 비추기를 원합니다.
나는 사도들처럼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생명의 나무로 이방인들 세계에 심고자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한 가지 선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5대 양, 6대주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단지 몇 년간 선교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세상 종말까지 선교하길 원합니다. 선교자로 예수님을 위해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흘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내 사랑하는 구원자시여 내 모든 소망을 적고자 합니다. 나는 모든 성인들의 행적이 적혀 있는 당신의 생명의 책을 빌려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것들을 다 실행하고자 합니다. 나의 예수님, 이러한 내 우매함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나보다 더 작고 무능한 영혼이 없다는 것을. '
나는 해답을 찾는 심정으로 성경을 집어들고 바오로 서간을 폈다. 우연히 코린토 1서 12장이 펼쳐졌다. 나는 읽어내려갔다.
모두가 동시에 사도나 예언자, 교회의 교사 등이 될 수는 없으며,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다양한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 눈은 손과 같을 수 없고, 귀는 동시에 눈이 될 수 없으며, 발은 또한 동시에 손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답은 분명했지만 나는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13장을 읽어내려갔는데 1절에서 즉시 깨달았다.
<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계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 1 코린13, 1-13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는 내 성소에 대한 열쇠가 되었으며, 사랑의 작은 길을 보증해 주었다.
만일 교회를 여러 지체로 형성된 하나의 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교회는 하나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으로 불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인식했다. 심장이 혈액 순환을 통해 몸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하듯이, 사랑도 그렇게 교회 지체들이 활동하게 해야 한다. 교회 심장부의 사랑이 꺼진다면 사제는 더 이상 복음을 선포할 수 없으며,
박해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이 모든 성소를 성취시켜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은 모든 것이다.
사랑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포괄한다. 간단히 말해 사랑은 영원하다.
나는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 내 사랑, 예수님 드디어 내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내 소명은 사랑입니다. '
그렇다. 나는 교회 안에서 내 자리를 발견했으며,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것이다.
내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부에서 나는 사랑이 되리라. 나는 모든 것이 되리라. 이로써 내 꿈은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 나는 큰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작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길 희망하며 내 열망을 간직합니다. 나는 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꽃을 뿌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희생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말이나 행동, 그리고 한 번의 눈길마저도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려 합니다.
사랑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자 하며, 그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당신을 위한 나의 꽃이며, 나는 가시덤불 속에서 이 꽃을 꺾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어머니이신 교회를 사랑합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서는 순수한 사랑으로 하는 작은 활동이 그 어떤 커다란 행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유용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48:03 < 믿음의 어두운 밤에 >
나는 내 소명을 발견했으며, 가슴은 기쁨으로 뛰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갑자기 두려움 가운데 사라졌다.
1896년 광명이 넘치는 부활 시기에 깜깜한 밤이 내 영혼에 들어와 앉았다. 나를 그렇게도 행복하게 해주던 천국에 대한 생각은 고통스러운 투쟁의 상대로 변했다.
나는 내 앞에 하늘까지 치솟은 장벽을 느꼈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을 기뻐했지만 이제는 암울한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나를 비웃으며 외쳤다.
'너는 빛으로 가득 찬 멋진 고향을 꿈꾸고 있구나. 영원히 하느님 곁에 머물게 되리라고 꿈꾸는구나. 너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안개가 언젠가 거치리라고 믿고 있지? 그래 그렇게 가려무나 계속해서 그렇게 가라고.
그래. 니가 희망했던 것을 아무것도 주지 못할 죽음을 기뻐하라. 죽음은 내게 더 깊은 밤, 허무의 어둠만 줄 것이다.'
이러한 시련은 며칠이나 몇 주 또는 몇 달만 지속된 것이 아니다. 나는 해방의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 시기에 내가 느낀 바를 모두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적 어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암흑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나는 동료들의 축일을 기념하여 작은 선물로 시나 노래를 지었는데, 그때 내 고통의 일부를 표현할 수 있었다.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사랑으로 여기는구나. 하느님께서 내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숨어 계실 때, 그 하느님을 향해 웃음 짓는 바로 그곳에 내 천국이 있다네.'
동료 수녀님들은 이러한 구절이 내 고통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믿음도 없고 한 가닥의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인생을 오로지 물질 세계에 걸고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상념이 이제는 내 세계 안으로 뚫고 들어오려고 했다. 과학이 계속해서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사람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다 해명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한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밝혀져야 할 것이 아직도 많다. 사랑하는 하느님께 나는 수없이 말씀드렸다. '하느님, 저는 이러한 무신론적 생각에도 당신만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께 믿지 않는 모든 형제 자매들을 용서해 주시길 청했다. 그리고 그들 중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광명의 나라를 발견할 때까지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말씀드렸다.
나는 모든 이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불쌍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빛을 받지 못한 모든 이들이 언젠가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저는 그들을 위해 믿음의 어두운 밤을 기꺼이 견뎌내겠습니다. 제가 당신께 청하는 유일한 은총은 당신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둠에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빛과 평화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마치 콜롬버스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예감했듯이, 나 역시 언젠가는 다른 세계가 영원한 고향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희망찬 이런 생각도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하느님 곁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해 생각할 양이면 내적 고뇌는 두 배로 늘어나는데,
그것에 대항하는 무신론적 생각이 곧장 고개를 들었으며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서는 내가 사랑의 작은 길에서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함에도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썼는지 다 알고 계신다.
솔직하게 말하지만 나는 최근 1년 동안 내 인생 전체에 걸쳐 체험한 것보다 더 많은 믿음의 진보를 이루었다. 악마가 믿음과 대항하여 싸우도록 부추길 때면 나는 적대자에게 등을 돌리고 예수께 서둘러 기도했다.
천국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그분에게 확언했다.
아름다운 천국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도 이러한 절망을 예수께 봉헌하면서 가련한 무신론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시길 청했다.
내가 천국의 행복과 하느님의 영원한 소유를 시로 노래했을 때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을 이야기했을 뿐 그것에 대해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커다란 감사와 함께 하느님께 고백하건데, 하느님께서는 내게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내적 힘이 있을 때 주셨다는 사실이다. 더 이른 시기에 그런 십자가를 주셨다면 나는 낙담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나는데 나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소원 밖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 앞에서 죽을 수 있는 것. 이제 나는 더 이상 아무 걱정이 없다. 병 때문에 수도 공동체에 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투쟁 또한 겁내지 않았다.
주님은 내가 서 있는 바위이시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시며, 그분은 내 방패시고, 나는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방 문설주 높이에다 이렇게 써붙였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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