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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생애의 마지막 >의 줄거리:
내 생애의 마지막 이사
(빌4:1~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내 생애의 마지막 이사>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내 생애의 마지막 이사’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시면서 이사를 몇 번 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번 세어봤어요.
제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몇 번 이사를 했는가 한 번 세어보니까, 1년 이상 살던 곳을 옮긴 곳이 꽤 많더라고요, 19번이더라고요 19번.
근데 그 19번의 장소가 가지가지였어요.
어렸을 때 태어나서 자라던 곳은 서울의 모래내, 여러분 다 아실 거예요.
신촌역에서 저 뒤쪽 수색, 남가좌동 쪽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있는 곳이 모래내인데, 거기서 태어나서 참 잘 살았습니다.
부모님 밑에서 할머니 모시고 형님들과 함께 잘 살았어요.
그렇게 살다가, 살다살다 진짜 더 이상 험악한 지경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험악한 처소로도 이사를 갔습니다.
달동네로 이사를 갔고, 결혼해서는 신학교 앞에 상가를 하나 얻어서 살림집으로 꾸렸습니다.
바로 길가에요, 상가니까.
길가에 붙은 곳이 거실이 되고, 거실 안쪽에 조그마한 방이 있고 옆에 부엌이 있는 그런 곳에서 결혼생활을 하면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미국에서는 물론 조그마한 아파트이지만, 프린스턴의 주변 환경이 좋은 곳이었어요.
플레인스보로(Plainsboro)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정말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바로 강에 붙어 잔디밭이 있고 잔디밭이 끝나는 곳에 저희 아파트가 있습니다.
아! 이거 환상적인 거 아닙니까?
또, 밴쿠버에서도 저택은 아니라도 단독주택으로 언덕 위에 있었는데, 언덕 아래 깊이 들어온 바다가 있어서 그 바다 건너에는 또 다른 산과 마을이 보이는, 날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그런 멋진 곳에 있기도 했었습니다.
참 극에서 극이지요?
그리고 지금 강릉에 와 있는데,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사를 가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제 저는 생애 마지막 이사를 날마다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마음이 거처할 곳,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궁극적으로 마음이 거처해야 될 그 곳으로 이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날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려고 애를 쓰고, 그곳에 머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게 마지막 이사라 합니까? 아직도 육체가 거하는 집은 많이 옮겨 다녀야 되는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이 마음의 궁극적인 처소로 이사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미국 프린스턴에 있었던 그 강가, 시냇가에 있었던 그런 아파트나 밴쿠버에서 바다가 보이던 그런 단독주택이나 달동네나,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처하는 처소가 어디로 옮겨졌다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없는 거예요.
내일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마는, 가난에도 부함에도 처할 줄 아는 모든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달동네나 바다가 보이는 단독주택이나 어디에 거하든지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상관이 없다는 것은, 내 기쁨에 차이가 없고, 내 만족에 차이가 없고, 감사함에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어떡하면? 내 마음이 궁극적인 처소로 이사를 해버리면.
그곳으로 마음이 이사를 하면 육체의 상황, 육체가 이사해서 처하게 되는 거처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됨으로, 이게 내 생애 마지막 이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뭐 세상적으로 봐서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던, 나쁜 곳으로 이사를 하던,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그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 필요해서 그렇게 이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사는 차이가 없는 이사라서, 이사라고 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생애 마지막 이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주 안에서’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 안이에요, 주 안.
이 ‘주 안에서’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1절에 나오죠? ‘주 안에 서라’ 그리고 2절에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라’ 두 번 나오지요? 그 다음에 4절에 ‘주 안에서’ 나오지요? 그 다음에 7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렇게 네 번이 나옵니다, 주나 예수 그리스도가 같으니까.
이 ‘주 안에서’라는 말이, 신약성경과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가나안복지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의 삶을, 오늘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 거예요, 복지에서의 삶을.
내 생애 마지막으로 이사를 해야 될 곳으로 이사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지요.
자! 그 삶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
이제, 우리 생애의 마지막 이사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아파트를 다른 데로 옮긴다든지, 어디 전원주택을 가서 산다든지, 아니면 달동네도 가게 된다든지 그것은 아무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뭔가가 필요해서 달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면, 달동네를 가게 됨으로써,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들 모두가 다 그 달동네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되고 뭔가 하여간 뜻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고, 또 좋은 아파트로 세상적으로 좋은 아파트로 가게 된다 그러면, 또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된다는 겁니다.
‘에이~ 그래도 이왕이면 다홍치마, 더 좋은 아파트면 좋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우리 마음이 마지막 이사 처인 그리스도 안으로, 주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실제로 기쁨과 감사에 느낌의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 그곳에서 삶이 어떻게 얘기되느냐?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강조에 강조를 거듭합니다.
‘주 안에서’는 ‘세상 안에서’와 대치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뻐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 안에서는,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이 그렇게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오고 있는데, 무슨 수로 이 세상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거예요.
마음이 주 안으로 이사 간 상태라면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항상 기뻐하라, 그러려면 주 안으로 이사해라’라고 말씀 하시는 것과 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이 주 안에서라는 얘기, 다시 한 번 우리가 살펴봐요.
앞으로 백 번, 천 번, 만 번, 이 ‘주 안에서’가 어디인지를 우리가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의 거처를 바로 잡고, 내 생애의 마지막 이사를 올바르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 안에서가 어디입니까, 여러분?
공간을 말하잖아요, 어쨌거나 주 안에서라는 공간, 이 공간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과 공중과 땅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 마음이 머무는 차원이 공중입니다.
하늘에는 영이신 하나님과 승천하신 주님과 천사들이 머물고 계십니다.
그리고 땅에는, 우리 육체가 머물고 있고, 중국이 있고 옆에 일본이 있고 그리고 아시아가 있고 유럽이 있고 아메리카가 있고 그리고 달이 있고 해가 있는 거 이게 다 땅입니다.
광대무변한 우주 블랙홀까지 있다고 난리를 치지만 다 땅의 차원입니다, 물리적인 차원이죠.
그리고 우리 마음은 공중이라는 차원에 있고, 이 공중이라는 차원을 왜 마귀가 권세를 잡았다고 얘기합니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우리 마음이 다 몸이 있는 땅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몸이 만나는 상황이 내 마음에 첫 번째 현실로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명히 하늘에 계시지마는, 마음이 그 하늘을 현실로 느끼기 이전에 언제나 육체가 만나는 이 세상을 더 앞선 현실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공중의 권세를 잡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고 있다가, 하늘의 빛이 완전히 깜깜한 상태 아닙니까? 하늘의 빛이 막혀버렸어요.
우리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늘의 빛이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셨다는 것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것이에요, 그리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공중에 터널을 뚫었습니다.
땅에 내려오셨지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깜깜하던 하늘과 막혀 있던 이 공중이라고 하는 암흑의 세상에 빛의 터널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님께서 만드신 부활과 승천을 통해 만들어지 이 공간에서는 하늘과 공중이 통해 있고, 그 공중과 땅이 십자가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가 만드신 공간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이 바로, 마음을 십자가에서 연합하게 되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만들어 놓은 하늘과 공중 사이가 완전히 터져 가지고, 하늘빛이 내려오고 있는 그 공간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십자가 너머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고백함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세상 바깥으로, 십자가 너머의 세상으로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주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 안에서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여곡절이 심하고, 구름 낀 날이 많은 이 세상,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마치 비행기가 구름 위를 뚫고 올라갔을 때,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의 태양이 그대로 다 비치고 있는 상황과 같은 상황이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는 거니까.
내가 죽었다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죽음에 연합하는 거예요, ‘나는 죽은 자다’
마음이 그곳에 들어가 있을 때, 항상 기뻐한다는 말이 가능해 진다는 겁니다.
왜?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초대교인들처럼 카타콤에서 살 수도 있고, 또 나와서 살 수도 있고, 육체의 거처는 변화무쌍하게 반복 돼서 이사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내 마음의 거처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바깥으로 나가서 하늘의 빛이 비쳐지고 있는 곳에 머물고 있으니까, 항상 기쁠 수가 있다는 거예요, 하늘의 빛을 쐬면서.
변화산을 꼭 기억하세요.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된 빛의 모습을 보시면서,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여기가 좋다고 말합니다.
그게 기쁨 아니겠습니까? 황홀경의 기쁨이죠, 감탄조의 기쁨일 거예요, 감탄.
정신이 나가버리는 기쁨입니다, 그게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어떤 내용의 삶이 주어집니까?
재림이 가까이 왔으니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건 무슨 말씀일까요?
재림이 가깝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목회도 해보고, 또 성도님들과 신앙의 동료가 돼서 함께 생활도 해 봅니다마는,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 이유가 뭡니까?
언제나 급한 일은 육체가 만나는 현실이에요.
내 사업이 급하고, 돈 문제가 급하고, 건강이 급하고, 자식문제가 급하고 그냥 이 세상 일이 다 급한 겁니다.
나라로 치면, 일본과의 관계가 급한 일이고, 소치에서 메달을 몇 개 땄는가가 마음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내 첫 번째 현실이 아닌 거예요.
여전히 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는 공중 중에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은 빛의 터널 안에 마음이 들어간 게 아니라, 그 마귀가 권세 잡고 있는 암흑 속에 있으면서, 마음이 이 땅을 향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림을 기다리지 않아요.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첫 번째 사랑의 대상, 좋아함의 대상이 되고 첫 번째 현실이 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 얘기했잖아요? 소망에는 유보가 있을 수 없다고.
일 년 뒤에 만나도록 타임 스케줄이 정해져 있는 애인이라도, 보고 싶으면 지금 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좋아하니까.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이 마음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진짜 예수님이 좋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재림을 기다리게 됩니다.
일 년 뒤에 만나게 될 애인이지만 헤어지자마자 또 보고 싶은 것은, 일 년 뒤에 만날 걸 알면서도 마음이 좋아하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는 게 언제인지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내일 오실 수도 있는데, 예수님이 재림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와 대면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왜 좋아하지 않게 됩니까? 현실로 느껴지지가 않는 거예요.
돈 문제가 더 앞선 현실로 느껴지고, 가족문제가 더 앞선 현실이고, 회사의 승진문제가 앞선 현실로 느껴지니까, 미뤄지는 겁니다.
하늘이 있고 천국이 있고 아버지가 계시고 주님이 승천해 계신다는 게 사실이지만, 내 현실은 아닌 거예요.
피부에 닿는 현실은 아닌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재림이 안 기다려집니다.
근데, 재림이 기다려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
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왜 재림이 기다려집니까?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부활과 승천의 공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언제나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전망하는 창문이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통해서 자식문제를 바라볼 때 어떻게 됩니까?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걸 알고, 자식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자식의 문제는 내가 마음을 써야 되는 현실이 아니라 사실이 되어 버립니다.
돈 문제가 급합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이 마지막 이사 처소인, 그 부활과 승천하시면서 만드신 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을 때, 돈 문제를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십자가는 내가 손과 발이 못이 박히고, 머리를 돈 문제로 쓸래야 쓸 수가 없는 가시면류관이 씌어 있고, 돈을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내 배에 창이 꽂혀져 있고, 그리고 돈 문제를 갖다 댈 수도 없을 만큼 내 온 살갗이 다 벗겨져 있는 주님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 문제가 내 마음이 휩쓸려 들어가는 현실이 아닌 내 마음과는 분리되는 사실로 남게 됩니다.
이럴 때 마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에 의해 충만해지고, 만족해지고, 감사해지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제가 어저께 말씀드린 우표 수집하던 그 경우와 같이 돼버립니다.
열광적으로 우표를 수집할 때가 있었는데, 그만 우표앨범에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두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그걸 다 줘버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게 관용이라는 거예요.
바로 그 마지막 이사 처소에 마음이 들어가 있으면, 주님이 현실이고 하나님 아버지가 현실이고, 성령님께서 우리가 그걸 느끼게 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하늘에 다 가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바라 볼 때,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지켜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에서 내게 손해를 끼치던 자들에게, 스테반 집사님처럼 용서할 수도 있게 되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주게도 되고, 관용이 일어나는 거예요, 관용이.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우표앨범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니까, 그걸 내가 가져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으니까.
재림이라고 하는 얘기는 하늘이 현실이라는 얘기에요, 하늘이 현실, 천국이 현실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의미를 보면.
바로 그 마지막 이사 처소로 들어가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하늘이 현실이 되고 땅은 사실이 됨으로써, 그냥 그 사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그래서 유무상통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해지는 거예요.
용서가 가능해지는 거고, 원수가 없어지는 겁니다.
적어도 내 육체와 연관된 상황에서 원수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지마는, 또 율법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라든지, 또 반대로 율법이 곁들여져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자와는 반대로, 우리가 십자가에서 자유를 얻었으니까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없다는 반 도덕주의자들, 이 사람들이 다 적이지요, 이 사람들이 원수이지.
내 돈을 훔쳐가서가 아니고, 나를 때린 게 원수가 아니고, 나를 박해하는 게 원수가 아닙니다.
그런 원수들은 사랑해야 될 원수이지요, 대적해야 될 원수가 아니라.
바뀌어 버립니다, 관용이 생긴다는 거예요, 관용이.
참! 여러분 희한한 일이에요. 뭐가 희한하냐?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게 희한한 거예요.
‘재림이 가까우니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우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마지막 처소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마음이 마지막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마지막 기도에 대한 얘기를 지금 해주고 계시잖아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게 뭐에요, 염려가 뭐죠?
앞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함,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걱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마음을 쓰는 거예요, 마음을 쓰는 거.
안심이 안 돼서 마음이 불안해져 가지고 자꾸 마음을 쓰는 겁니다.
근데, 그 마지막 처소로 이사를 해 버리면 염려를 하지 않게 돼요, 마음을 쓰지 않게 돼요.
왜냐하면, 마지막 처소에서 세상 일이 잘 안된다고 생각되는 그 일들을 바라볼 때,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게 되니까 그 일에 대해서 마음을 쓸 수가 없어요, 십자가가 먼저 보이니까.
그래서 염려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염려가 되는데 무조건 염려를 안 하려고 하면 안 되고, 십자가를 먼저 보는 거예요.
십자가에 대해서 죽고, 들어간 상태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일을 보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내 마음이 그 일에 휩쓸려 들어갈 필요가 없이 사실로 남습니다.
사실로 남게 될 때,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손이 닿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어떻게 나옵니까?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내가 지금 십자가를 통해 보고 있는 이 사실들, 돈 문제도 사실일 수 있고, 자식문제도 사실일 수 있고, 회사문제도 사실일 수 있고, 그러나 내 마음은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아서, 염려와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 속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손이 닿아서 이루어지고 있는 걸 보면서, 주의 뜻이 이루어져서 주님께 기쁨이 되는 방식으로만 이 일들이 전개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 기도를 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듯이 그냥 감사가 나오게 돼요, 이 세상의 일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렇게 복지의 삶이 이루어져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말씀은, 그러므로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마음이 그 마지막 처소 십자가 너머 부활과 승천을 통해 만들어 놓으신 그 공간 안에서 지켜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래서 예수 안에 우리 마음이 여전히 남게 해 주신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 복지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 삽시다.
뭐 어디로 이사를 해도 상관이 없다고 하잖아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내 생애의 마지막 이사 처인 십자가 너머에로 우리 마음을 두심으로써, 우리의 삶이 기쁨과 감사가 끊이지 않는 젖과 꿀의 복지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육체의 처소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옮겨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내 생애의 마지막 이사 처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심으로, 육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든지 복지를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