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민낯
< 안톤 체호프 단편집을 읽고 >
2017.11.29.수
차 상 희
11월말의 차가운 기운은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봄볕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햇살이 내 마음까지 밝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환하게 비추는 햇살아래 병풍처럼 펼쳐진 산들의 그림자가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에 내려앉아 있는 듯한 풍경을 바라보며 좀 더 주고 덜 주고의 계산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과 좋아하는 시나몬향이 나는 달콤한 라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을 분명 내가 그리워할 거라는 걸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함께 나누는 차 한 잔에 그동안 각자가 지내온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보니 어느새 점심을 먹어야할 때가 되었고 오늘의 메뉴는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야채가 듬뿍 들어가면서 고기도 있는 샤브샤브로 정한다. 따뜻한 국물이 몸에 들어가고 곧이어 몸이 뜨거워지고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한다. 지난주는 분명 가을은 끝이 났고 이제는 겨울의 시작인 것 같은 갑작스런 칼바람에 고이 모셔두었던 히트텍 내의를 꺼내 입기까지 했었는데 오늘은 겨울 코트가 부담스럽게 느껴 질만큼 포근해서 식사하는 도중에 해와 바람의 내기에서 해가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한 것처럼 나 역시 봄 햇살같이 포근한 해에게 나의 코트를 순순히 벗게 하고 말았다.
분명 부담스럽지 않게 먹기로 정한 메뉴였는데 샤브샤브의 고기와 야채를 건져먹고 그 국물에 칼국수 거기다 마지막 코스로 볶음밥까지 먹고 났더니 부담스러운 식사가 되고 말았다. 좀 걸을 요량으로 코트를 벗고 가벼운 옷차림에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아직도 내리쬐는 햇살을 기분 좋게 맞으며 대형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 것 저 것 장을 보고 나오니 아까 그 햇살은 잔뜩 흐린 하늘에게 자리를 뺏기고 말았는지 곧 비가 떨어질 것같이 잔뜩 찌푸린 흐린 하늘이 차지를 하고 있다. 마트를 가기 전과 후의 하늘이 너무나 달라서 아까 봄날 같은 햇살이 비췄던 것이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나의 착각이었는지 잠시 헷갈린다. 이렇게 순식간에 변해버린 하늘이 조금은 야속하게 여겨지는 날이다.
평온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샘내기라도 하듯이 느닷없이 누군가 그 평온함의 바다에 돌멩이를 집어던지듯 평온함이 깨지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오늘 오후 다급하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께서 휠체어에서 넘어지셔서 머리를 바닥에 찧으셨는데 응급 처치 후에 근처의 병원으로 이송중이라는 것이다.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는 외삼촌과 이모 그리고 엄마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돌고 돌아 나에게 전화연결이 되었던 것이다. 가벼운 타박상 정도일거라고 예상하고 달려간 병원에서 내가 마주한 현실은 뇌출혈 상태이고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돌아가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호자역할을 대신해서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실 앞에서 나는 내가 제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가 내린 결정에 누군가 나중에 나에게 책임을 묻거나 나를 탓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에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겹쳤다. 책임을 내가 져야한다는 그 무게감이 나를 짓눌렸고 나는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 주었으면 하고 이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이었다.하지만 일분일초를 다투는 위급한상황이라는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외할머니께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 우선은 생각하기로 하고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한다. 의료진이 수술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수술도중에 잘못 되실 수도 있고 수술 후의 예후도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던 의료진의 말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지금 외할머니의 살아계신 모습을 보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번 쏟아지면 멈춰지지 않을 것만 같아 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아본다. 그리고 살며시 다가가 할머니의 손을 마지막인 것처럼 잡아본다. 아직은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그 손의 감촉을 나는 내가 아마도 아주 많이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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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을 함께 보낸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
단편들에 나오는 인물들의 다양한 민낯들을 마주하는 일이 처음에는 거북하고 불편하게 여겨졌다. 특히 내 기억에 남는 단편 ‘베짱이’에서 여주인공 올가는 자기만 생각하는 제멋대로인 여자이다. 헌신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의 소중함을 모른 체 겉으로 보기에 멋있어 보이는 유명인이나 예술가들에게 빠져서 산다. 그런 중에 한 화가와 불장난 같은 불륜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은 그 화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여러 번 남편에게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번번이 그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자신이 찾아 헤매던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는 바로 자신의 곁에 머물러있던 남편이라는 사실을 남편의 죽음 앞에서 뒤늦게 깨닫게 된다. 나 역시 내가 스스로 빛나지 못하면서 돋보이는 사람 곁에서 내가 꼭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선호하고 있었다. 올가에게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보지만 내게 소중한 존재들을 소홀히 대했던 나의 모습이 그녀에게서 보였기에 내게 불편함으로 다가왔으리라. 그런 한편으로 그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속물적이고 이기적이고 과식적인 면들을 보면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음 속 에는 저런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온한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에서 사물, 풍경, 인물들의 묘사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도 나의 일상을 그의 단편처럼 그렇게 담담히 써내려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