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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높은한질(Ⅰ)
우리동네는 행정구역상 운동부락에 속했으나 본 동네와는 꽤 덜어져 있어서 ‘한동네’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거리상으로는 당시 “강패”로 유명했던 생목이라는 동네나 우리가 앞산이라
불렀던 산 넘어 ‘우명’이라는 동네와 더 가까왔었다.
어쨌든 순천에서 광양으로 가는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10여 가구를 개념상 한동네
식구로 알고 살았다.주위에서도 운동이나 생목으로 부르는 것보다 “높은한질”로 불렀으니
관념상으로는 분명 독립된 동네였다.한 ‘높은’이라는 수식어는 오르막 길이라는 뜻일 것이고.
‘한 질’중 질은 길이라는 의미의 전라도 사투리므로 ‘한 질’은 큰 길 즉 신작로를 뜻하는 것이다.
60년대 우리네 살림살이야 6.25 전쟁 끝나고 겨우 10여년이 지나면서 4.19로 자유당
대통령이 물러나고 어지러운 시대를 거쳐
안정을 다지는 일정기간을 거쳐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이 태동시키던 때였다.한마디로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을 수 없던 시기였다.
이런 때 비록 10여 가구밖에 안되었지만 가구마다 내가 아는 범위로 스케치를 해 보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적어 본다.
광양으로 가는 신작로로 가끔 차들이 지나가는데 대부분 미국등에서 쓰다 버린 중고차들을 수리해 운영하는 것이었다.때문에 매연과 소음이 심하였고 속도 또한 느렸다.순천으로 들어가는 생목 쪽은 약간 오르막 길이라 악세레타를 밟아주는데 부우웅~~ 하다가 클러치를 밟고 기아를 바꾸는 순간
코를 심하게 골다가 잠시 멈춰 옆에서 자는 사람을 긴장시키듯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정적이
한동안 흐른다.
버스는 주로 '동방여객'이었고 가끔은
'경전여객'이 다녔다.
나중에 동신여객이라는 색깔이 약간 다른 버스가 투입 됐는데 항상 사람들이 터져
나올듯 만원이었다.당시에는 트럭에도
버스에도 ‘조수’라 불리는 남자들이 타고
다니면서 요금도 받고 버스 내 질서도
잡는등 운전사를 보좌해 줬다.조수들의
꿈은 운전사였다.차 상태에 비해 능력에
부치는 승객을 실었으니 속도는 느리고
매연은 많고 소음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려가는 버스 앞에는 망덕.진상,진월,하동이라는 빨간 글씨의 팻말이 꼿혀 있었고 올라가는
버스에는 벌교,고흥,녹동,황전,주암,구례 등의 팻말이 꼿혀 있었으나 ‘매우 먼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다.버스를 탄다는 것은 지금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는
일이었기에 남의 일이었다.
해촌 뜰이라 부르는 들판 끝에는 여수로
가는 기찻길이 있었고 가끔 기차가
지나갔다.
뒷동산에서 보면 칙칙폭폭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가는 기차가 지금 생각해도 꽤나
낭만적으로 보였는데 그런 기차를 보면
왠지 가슴이 뭉게구름처럼 두둥실 떠
올랐다.저 기차를 타고 한없이 다른 곳으로
가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학교에
다니는 율산이나 연향동 아이들은
저 기차를 항상 가까이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고학년이 돼서는 대못을 기차 레일 위에 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납작해 진 그 대못을
손잡이용 나무에 밖아 양 면을 숫돌에 갈아서 칼을 만들기도 했다.
그 때 기차는 육로로 다니는 차들 만큼이나 힘없는 고물차였던 것같다.
지금 송치재라 부르는 괴목 가기전에 긴 터널이 있다.그 때는 소련재라 했고 소련재 굴이라 불렀다.아버님 말씀에는 그곳은 산적들이 많았을 정도로 산이 험하고 깊었던 곳이란다.
그 소련재 터널이 오르막 길인데 기차가 한 번에 못올라 가서 빠꾸(백) 했다가 다시 시도하여
넘어가곤 했으니 기차의 마력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었겠는가?
생목 본동네가 시작되는 곳은 당산나무가
몇 그루 있는 공터와 음산한 제각이 있었고
당산나무 양쪽에 전빵이 하나씩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가까운 쪽에는 ‘욕보 함씨’라
불리던 할머니가 가게를 봤다.표준말로 풀면
‘욕쟁이 할머니’다.
그 할머니는 앞산 주인이었는데 그 앞산에서
전빵(가게)
나무를 해 가는 사람을 보면 온갖 욕설로 외쳐서 그 나뭇군을 쫓아냈다.
당산나무 시내 족에는 우리 담임이셨던
이 두 곳은 우리가 애용하던 지금의 구멍가게다.당시는 이런 길가의 전빵 하나면 온 식구가
먹고 살았었다.
가로등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터라 밤이면 깜깜 했는데 이곳 당산나무 공터는 밤이면 생목 본동네
사는 몇몇 간픈(개구지고 고약한) 청년들과 고약하기로 소문난 소ㅇ룡이라 기억되는 우리 형님
또래 깡패의 놀이터자 일터가 되었다.당시에는 그곳을 경계로 시내 쪽은 도시사람이었고
그곳으로부터 우리 동네 쪽으로는 촌놈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그래서인지
안쪽에 사는 사람들은 밤에 이곳을 지나치다 얻어 맞기도 했고 돈도 뺏기고 하여 무서운 곳으로
알려져 “생목”하면 “깡패”부터 떠올렸다.밤에 이곳을 지나고 싶지 않아도 차가 없으니 걸어서
지나가야 했고 통과 의례로 맞거나 뺏겼다.
안 쪽 동네 청년들이 하루 날 잡아서 합세해 생목 깡패들을 제압해도 됐을텐데 왜 그리 당하고만
살았는지~~사실 깡패는 몇 명 안됐다.내가 기억하는 이름인 조0조 형제와 소0룡을 중심으로
똘만이 몇명에 불과했는데 왜 그렇게 생목 강패를 두려워 했는지 모르겠다.깡패는 말 그대로 깡이다. 싸움 실력과 관계없이 독기와 깡 그리고 냉정한 성격이 뒷받침이 돼야 하는데 안쪽동네 청년들은
힘으로 제압은 가능했으나 깡과 배짱이 없었고 또 매일 여럿이서 생목고개를 넘을 수 없었기에
언젠가는 혼자되어 넘다가 걸리면 더 맞을 것 같으니 감히 한 판 붙을 생각을 못했을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그 깡패들이 두 번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한 번은 순천깡패 ‘칠성파’ 조직원을
잘못 건드려 칠성파원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안죽을 만큼 패놓고 갔고 또 한 번은 인근 군부대
휴가병을 건드렸다가 트럭 3대분 병력이 동네를 뒤져 그 깡패들은 산속으로 도망가 몇일을
못내려 온 적이 있었다.지금 “사랑과 야망”촬영 세트가 있는 곳에 당시에 향토사단인 3917부대가
신설됐었고 부대장은 대령이었으며 운동에서 신대 들어가는 길 옆에 사택이 지어졌었다.
여하튼 그 이후에 생목 깡패는 흐지부지 없어졌고 소ㅇ룡이라는 사람은 못쓰게 돼버렸다는
후문을 들었다.
동네는 달랐지만 생목과 가까왔던 우리동네 사람들에게는 해꼬지를 안했다.몇가구 안됐지만
처녀들도 있었고 형들도 있었지만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초등학교도 생목까지는 조곡동에
있는 중앙초등학교를 다녔고 생목 안쪽인 우리부터 조례초등학교를 다녀 이질감이 많았다.
같은 또래들 끼리도 괜히 적대시 하면서 말도 안부쳤었다.국가의 산업발달 수준에 국민의식 수준도 비례하는 것 같다.그 때는 어른이나 애들이나 왜들 그리 어리석었는지 모른다.
좋은 말로 순박하다 표현하나 분명 어리석었던 점이 더 많았다.
앞산이 가리고 있어 길을 중심으로 뒷산 쪽으로 집들이 있었다.햇볕을 많이 받기 위해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유일하게 앞 산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생목부락에 속해 있어 우리와 친교가 없었으나 항상 응달진듯한 집에는 석주라는 청년이 살았었는데 항상 괭이나 삽이 손에 들린 채 많은 일을 했고 걸을 때는 땅만 쳐다보며 다녀서 “돈 주우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우리끼리 별명을 붙여 줬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무척 잘했는데 어느 순간 넋이 나가서 저렇게 됐다며 머리가 너무 좋아
돌아버렸다고들 했다.
길과 앞 산 사이에는 논이었고 생목
쪽으로는 자그마한 둠벙(작은 호수로서
주로 지하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 주위를
막아 물을 가둔 곳)이 있었고 조금 더
내려오면 공동 우물과 기와공장이 있었다.앞 산이 끝나는 지점의 좀 넓은 곳에
방앗간이 있었고 더 넓은 곳에 빨간
벽돌건물의 변전소가 있었는데
지금 변전소 전신이었지만 규모는 현재의
1/10 정도나 됐을 것이다.
둠벙에는 거머리도 많았지만 우렁이가
아주 많아서 용감한 애들은 거머리를
감수하고 우렁을 잡기도 했다.
또 기와공장 아래 논은 논둑 높이가 꽤 높았는데 일부 구간이 수렁이었고 그곳에는 한겨울에도
얼지않은 물기가 있었다.빠지면 죽는다고 어린 애들은 못가게 부모들이 교육을 시켰던 그곳에는
미꾸라지가 무척 많았다.눈내리는 겨울에도 가끔 삽과 바께스를 가지고 온 어른들이 그곳을 파서
겨울을 나느라 비몽사몽 상태의 미꾸라지들을 잡아가곤 했다.누런 황금빛을 띠는 오리지날
토종 미꾸라지였다.크기도 꽤나 컷었다.
기와공장에는 진흙을 실은 말구루마들이 출입을 많이 했고 초가로 된 길다란 공장 건물 내에는
커다란 나무 메(망치)로 진흙을 떡치듯 치는 사람도 있었고 발로 짓이셔서 나무 틀을 활용하여
기와를 만들어 건물 내부에 깔아놓고 말렸다.
응달에서 꼬득꼬득 말린 기와에 잿물 같은 검은
물을 발라 가끔 가마에 넣고 불을 땠다.
기와를 굽기 며칠 전부터 솔가지 나무를 실은 소구루마들이 곳곳에서 많은 나무를 싣고 온다.
기와를 굽는 날이면 시꺼먼 연기와 함께 고약한
냄새가 났고 며칠 지나면 검은 색의 기와를 실은
기와공장
말구루마(말이 끄는 수레)들이 분주히 들락거렸다.
지금은 건축자재의 발달로 지붕재료가 다양해 졌지만 그 당시에는 초가 아니면 기와집이었기에
기와 소요량이 많았다.흔치않게 양철 지붕은 있었다.
본격적인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던 때에는 스레트 지붕이
대세를 이루었고 스레트가 대량 공급되면서부터
기와의 수요는 감소했다.
지금은 기와조차 PVC로 만들어 버리니 전통기와는
고궁 보수용이나 옛모습 그대로 짓기를 원하는 애호가들의
소수 기와집에만 필요하게 되어 대부분의 공장들은 사라졌다.
매년 초가지붕을 교체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고 새로운 짚이 소요되니 스레트로
교체하면 짚은 가마니를 짜거나 양송이
재배용 퇴비로 사용할 수 있으면서 노동력도
다른 곳으로 활용할 수 있어 일거 양득이상의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그래서 많은
초가가 시공이 간편하고 값도 저렴한 스레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고속도로 주변 마을은
페인트 칠까지 하게 하여 멀리서 보면 꽤 잘살고 낭만도 있어 보이게 했다.하지만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다는 결점이 있었다.
그 때는 스레트 재료에 발암물질인 암면이 다량
함유돼 있다는 위험한 사실을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저 알록달록한 집들이 달리 보였고 이런 밝은 환경들은 알게 모르게 국민들의 의식을
본인들도 모르게 관습과 관례와 관념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새마을운동이
타오르는 밑거름을 만들었던 것 같다.
앞산은 나지막한 산이었는데 해가 들 때만 햇볕이 들어와 나무가 잘 자라지 않았다.
특히 가구마다 땔감을 손수 산에서 조달해야 했던 시기인데 오후가 되면 역광으로 눈이 부셔서
일부러 산을 살펴보기 전에는 산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그래서 불법(?) 나뭇꾼들의
사랑을 받게되어 황폐해 진그곳의 나무들은 햇볕부족과 영양부족으로 쉽게 자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네 앞 낮은 산자락에는 낮고 넓은 바위가 있어서 우리들은 그곳에서 소꿉장난도 하고 전쟁놀이도 하면서 놀았다.고등학교에 다니던 형들은 청춘을 발산할 곳이 많지 않았던 때라 해가 넘어갈 때쯤에는 앞산 꼭대기 밀밭에 앉아 몇 시간씩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한 때 난 손수 활을 만들어 화살 끝에다 못을 묶어 새를 잡는답시고 동네 애들과 앞산을 헤매다 포기하고 끼리끼리 장난을 치다가
그만 한 살 아래인 동네 녀석 얼굴에 명중을 시켰다.눈 아래 볼에 꽂혔는데 눈을 맞췄더라면
큰 일낼 뻔 했다.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그와중에도 그 애 엄마에게 혼 날까봐 일러받치지 않도록
꼬셔서 무사했던 추억이 떠오른다.걔 이름도
지금은 서울 어느 하늘아래서 살고 있을 것같다.
그 때는 뱀도 참 많았는데 물리지 않고 잘 큰 애들을 보면 대견하기까지 하다.
사실 난 최근 몇 년전까지 독사를 본 적이 없다..많은 뱀을 보면서 컷지만 논에 많은 물뱀,독 없는
무자수,밀뱀 기껏해야 목 부분이 알록달록한 꽃뱀,신경통에 좋다며 술을 많이 담가서 먹는
능구렁이 정도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장마때문에 비가 계속 내리던 끝에 해가 잠시 났었는데 순천실고로 들어가는
도로 아래 경주네 아카시아 울타리에 커다란 먹구렁이 한 마리가 꽤나 높은 곳에서 나무를 감고
있었다.우리 어린 애들이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운동부락에 사시는
아저씨가 우리집으로 뛰어들어와 지게 받침대인 바지게 작대기와 사내키(새끼 줄)를 몇 발 가지고
가더니 나무 위의 구렁이를 바지게 작대기로 댕겨 길바닥에 떨어지게 했다.새끼줄에 묶인 구렁이를 자전거에 달고 갔고 우리들은 좋은 구경 났다 싶어 따라 갔는데 운동 동네를 흐르는 큰 도랑에서
껍질을 벗겼다.
껍질이 홀라당 벗겨진 핑크빛 구렁이는 아직 살아 있었고 아저씨가 장난삼아 물에 슬쩍 던져놓자
쏜살같이 물위를 헤엄쳐 건너편 돌담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예기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아저씨는
반쯤 들어간 구렁이 꼬리를 잡아 빼서 바로 토막을 냈다.껍질이 있었다면 그 구렁이는 빼내지
못했을 것이다.당시엔 단백질 섭취가 쉽지 않았던 때라 그 구렁이는 용기있는 인간의 단백질
보충용으로 희생이 된 것이다.
고기 맛 보기가 쉽지 않았던 그 때 난 비위가 약해 어쩌다 끓여주는 고깃국을 먹지 못했다.
못먹는게 사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미덕이었는지도 모른다.우리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때는 장에 따라가 얻어먹는 국밥이거나 집에서 기르던 개가 쥐약을 먹고 죽었을 때,또는 이웃집이나 동네에서 병든 소나 돼지를 잡았을 때나 죽었을 때 얻어온 고기였다.잔치를 위해 돼지나 소를 잡을 경우에는 도살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잡아주는 대가로 주로 머리부분과 내장을 가져간다.
닭 간이나 똥집을 왕소금에 찍어 꼭꼭 씹으면서 담배 하나 물고 방앗간 뒤 한길 가 도랑물에서
잡은 닭을 손질하던 이웃집 아저씨 모습이 생각 난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우리집에서 기르던 백구가 갑자기 온 몸을 부르르 떨더니 죽었다.그 개는 곧 고기로 변했는데
돼지고기도 잘 못먹던 내가 개고기를 못먹는 것은 당연하고 어머니도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하지만 아버지는 고기를 좋아하시는 편이어서 그 개고기를 삶아서 잘게 썰어
찹쌀가루를 묻혀 다시 말렸다가 두고두고 드시는 것을 봤다.어쩌다가 쥐약 먹은 개를 주인이
묻어주면 그 날 저녁에 누군가 파서 가지고 갔다.먹기 위해서다.그만큼 고기가 귀했다.
아니 돈이 귀했다.
그 때는 고기를 구워 먹는 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작은 양으로 여러 식구가 나눠 먹어야 했기에
무소건 국이었다.돼지 비게가 동그란 기름방울들과 함께 둥둥 떠다니던 국물이 지금도 그려진다.
고기를 맘놓고 구워 먹을 수 있는 시기는 80년대 중반부터나 될 것이다.83년 제대 후 직장에서
돈을 취급하여 형편이 좀 나은 회계계 식구들을 따라 점심 식사를 하러 가면 8명이서 삼겹살
3인분 정도 시켜서 김치와 함께 섞어서 두루치기를 해서 먹으면서 아주 행복해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