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4일 조선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에서 만든 「호남권역 고문서 자료집성 1.」『보성 죽산안씨 고문서(寶城竹山安氏古文書)』라는 책을 소개해 올립니다.
보성 죽산안씨 고문서(寶城竹山安氏古文書)
발간사
‘한국학 자료센터 구축사업’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으로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한국학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여 인터넷 서비스와 자료집 발간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입니다. 호남권역 한국학 자료센터는 2008년 12월에 시작되었으며,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가 주관하고 조선대학교와 목포대학교, 제주대학교가 공동으로 전라도와 제주도에 미공개된 고문서·고전적 자료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연구 자료로 가공하여 공개함으로써 활용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레 1차년도 사업에 대한 노력의 결과로 「호남권역 고문서 자료집성 1.」로서 『보성 죽산안씨 고문서』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보성지역의 죽산안씨는 보성읍 우산리를 중심으로 큰 마을을 형성할 정도로 세력이 컸던 집안입니다. 본 자료집은 17세기 중반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의 후손들이 소장한 고문서 가운데 명문과 호구단자, 간찰을 선별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이 죽산안씨의 고문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약 100년간 보성과 그 주변지역의 경제 상황, 향촌 유학자들의 일상생활과 학문활동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사업을 통해 호남지역의 역사적 특성과 지역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고, 아울러 호남의 옛 생활 기록 문화를 역사적, 사회적 시각에서 쉽게 정리하여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교육과 문화산업 방면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하여 지역사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번에 간행하는 『보성의 죽산안씨 고문서』는 조선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에서 조사한 문서들 중에서 은봉종택과 죽곡정사의 명문·호구단자와 송매정, 하백원의 간찰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자료를 대여하고 조사를 허락해주신 죽산안씨 문중에 감사인사를 드리며, 조선대학교의 김경숙 교수님과 안동교 전임연구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한 권의 자료집이 지역사회연구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촉매로 작용하길 간절히 바라며, 끝으로 이 자료집의 편찬에 힘써주신 모든 분들에게 큰 감사드립니다.
2009년 8월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한국학자료센터장 한문종
해제
안동교(조선대 한국학자료센터 전임연구원)
1. 보성 죽산안씨의 가계
이 자료집은 보성의 죽산안씨인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후예들이 ‘소장’하거나 ‘작성’한 고문서 중에서 명문, 호구단자, 간찰 221건을 선별해 수록한 것이다. 주요 소장처는 은봉종택(隱峰宗宅), 죽곡정사(竹谷精舍), 송매정(松梅亭), 하백원 가(河百源家)이다.
보성의 죽산안씨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을 지낸 안원형(安元衡, 1318~?, 죽성군(竹城君), 문혜공(文惠公))을 시조로 삼는데, 안원형은 순흥안씨 안향(安珦)의 증손자로 태어나 개성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외가(광산김씨)가 있던 광주 평장동(현재는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의 4대손 안여주(安汝舟)가 장흥에 정착하여 안구(安矩), 안민(安民), 안도(安道) 삼형제를 낳았고, 안민(?~1467)이 비로소 보성(현재 보성읍 우산리 일대)으로 들어와 보성선씨와 혼인하여 보성파(寶城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안민은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참군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순절한 인물이다. 손자 안수륜(安秀崙)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록을 지냈고, 그의 아들 안축(安舳, 1500~1572)도 문과에 급제하여 나주목사를 지냈는데 김인후, 임억령과 더불어 ‘호남삼고(湖南三高)’라 불렸다.
보성 죽산안씨의 위상을 높인 안방준(1573~1654)은 안축의 손자로, 보성군 오야리(현재 보성읍 우산리 2구 귀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안방준은 17세기 중반에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일찍이 박광전, 박종정,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에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기축기사』『임진기사』『진주서사』『기묘유적』『혼정편록』『항의신편』등 수많은 역사저술을 편찬하여 선비의 절의정신을 고취했다. 만년에는 화순 쌍봉동(현재 화순군 이양면 매정리)에 은봉정사(隱峰精舍)를 건립하여 강학활동과 문인교육에 매진했다. 사후에 그를 추모하여 호남유림들은 대계서원(大溪書院)을 세웠고, 순조는 문강공(文康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방준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긴 하지만, 보성은 물론이고 서울과 황해도 지역까지 전장(田庄)과 노비를 둘 만큼 상당한 재력가였다. 더구나 부인 경주정씨 집안도 순천지역에서는 소봉(素封)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본가나 처가의 재력이 안방준의 의병, 저술, 강학활동에 충분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방준은 부인 경주정씨와 혼인하여 5남 3녀를 낳았는데, 이들은 안후지(安厚之, 1590~1664), 안신지(安愼之, 1592~1671), 안심지(安審之, 1600~1655), 안익지(安益之, 1608~1687), 안일지(安逸之, 1613~1643)이고, 사위는 정창서, 양일남, 조정유이다. 안후지의 후손들은 보성읍 우산리에 있는 안방준의 종택과 사당을 중심으로 큰 마을을 형성해 살았고, 안신지의 후손들은 보성군 복내면 지역에, 안심지의 자손들은 화순군 동복면 지역에, 안익지의 후손들은 화순군 이양면 지역에, 안일지의 자손들은 보성군 문전면(현재 손천시 송광면)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다음은 갑술년(1994)에 간행된 『죽산안씨족보』에 근거하여 보성 죽산안씨의 가계도를 작성한 것이다.
2. 소장처의 자료개관과 인물들
1) 은봉종택(隱峰宗宅)
은봉종택은 현재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3구에 위치해 있다. 안방준의 장남 안후지(安厚之, 1590~1664)는 경기도 파주지역의 창녕성씨(昌寧成氏, 안방준의 스승인 성혼의 손녀)와 혼인하여 안전(安峑, 1614~1686), 안음(安崟1622~1685) 등을 낳았다. 안후지의 장남 안전(安峑, 1614~1686)은 안두상(安斗相, 1636~1723) - 안세현(安世賢, 1660~1716) - 안창노(安昌老, 1682~1752) - 안처악(安處岳, 1725~1750) - 안명대(安命大, 1750~1795) - 안권(安權, 1773~1853) - 안영환(安永煥, 1812~1882) - 안규삼(安圭三) - 안종묵(安鍾黙) - 안옥순(安玉淳) - 안병문(安秉文)으로 이어져 왔다. 종손 중에서도 안두상은 안방준이 사후에 남인세력의 배척을 당해 관작이 삭탈되고 서원이 훼철되자, 상경하여 오랜 기간 머무르면서 관작과 서원의 복구를 실현했으며, 안영환은 나주 도천리의 풍산홍씨와 혼인하여 몰락한 종택을 재건하거나 안방준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큰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지금은 안병문의 손자인 안재호(安在祜)씨가 종택과 고문서를 관리하고 있다.
소장 자료에는 안방준~안두상 대에 남겨진 간찰첩본, 교지 등이 있고, 안세현~안권 대에는 종택이 몰락한 만큼 자료가 드문 편이며, 안영환~안병문 대에는 종택이 재건되고 종손들도 활발하게 사회활동과 문중활동을 병행하여 간찰과 각종 고문서들이 대거 양산되었다. 은봉종택에는 고문서뿐만 아니라 약500여 권의 고서가 보관되어 왔으나, 불행하게도 2006년 12월에 절도범이 대부분 탈취해 가버렸다 근래에 수백 건에 달하는 고문서를 조사하여 정리, 연구 중에 있다. 고문서의 내용을 개관해 보면, 『제현간독(諸賢簡牘)』『선유왕복(先儒往復)』등 5종의 간찰첩본과 100여 건의 낱장 간찰, 『대계서원진신장의안(大溪書院搢紳掌議案)』『대계서원유안(大溪書院儒案)』 등 4종의 대계서원 관련자료, 교지류(敎旨類), 품목(稟目), 서목(書目), 완문(完文), 소지(所志), 단자(單子), 상서(上書), 의송(議送), 명문(明文), 호구단자(戶口單子), 기타 치부류, 혼서류, 점서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죽곡정사(竹谷精舍)
죽곡정사는 보성군 복내면 진봉리에 위치해 있는데, 한말의 도학자 안규용(安圭容, 1873~1959)이 설립한 서당이다. 안규용은 안방준의 차남인 안신지의 9대손으로 부친은 안풍환(安豊煥),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29세 되던 해에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 나아가 도학이념을 계승했고, 경술국치의 소식을 전해들은 뒤 적상산에 올라 『국조선원』과 『왕조실록』을 보고 종일토록 통곡했다. 안규용은 1920년 겨울에 죽곡정사를 설립하고 「죽곡정사강안(竹谷精舍講案)」과 「강규(講規)」, 「약속(約束)」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해 2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또 『향례합편(饗禮合編)』『주문지결(朱門旨訣)』『동몽수지(童蒙須知)』『이자학칙(李子學則)』등 4종의 서적을 목판으로 간행하여 예법의 중요성과 올바른 학문방법을 강론했다. 문집으로 『회봉유고(晦峰遺稿)』를 남겼다.
안규용의 학문적 명성이 퍼지면서 그의 직계, 방계 선조들이 남긴 고문서가 모이고, 안풍환 - 안규용 부자가 경제, 학문, 문중, 유림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작성한 고문서가 더해져, 죽곡정사에는 약 6,000건에 달하는 고문서가 온전히 소장되어 있다. 고문서의 내용은 안규용의 선조들이 당대 명사들과 교유한 『간독(簡牘)』1종과 안규용이 스승, 친구, 제자들과 주고받은 간찰 4,000여 건, 그 외에 시문류(詩文類), 일기류(日記類), 강안류(講案類), 소지(所志), 단자(單子), 상서(上書), 명문(明文), 호구단자(戶口單子), 도조기(賭租記), 용하기(用下記), 혼서류, 점서류, 한약경험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송매정(松梅亭)
송매정은 현재 순천시 송광면 우봉리(옛날엔 보성군 문전면 우산리)에 위치해 있다. 안방준의 다섯째 아들 안일지의 현손 안창훈(安昌勳, 1748~1828)이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1817년에 건립했으나, 여순(麗順)사건 때 소실되어 1954년 중건한 정자이다. 안방준은 광해군 6년(1614년)에 낙향하여 우산전사(牛山田舍)에서 강학할 때 동쪽에 단을 쌓아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나무 여덟 그루를 심었는데, 후손 안창훈이 광해군의 혼조(昏朝)에 영합하지 않은 선조의 높은 절의와 기상을 흠모하여 이를 기념하기위해 지은 정자인 것이다. 또 안창훈은 부인 진원박씨와 검소한 마음으로 몸소 농사를 지어 생활이 조금 넉넉해지자,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을 확대하여 향촌사회의 예법을 강조하고 향민(鄕民)의 부역(賦役)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 인물이다.
안창훈의 큰아들 안수록(安壽祿, 1776~1857)은 「송매정상량문(松梅亭上樑文)」을 통해 정자의 건립이유를 “곧은 절개를 지켜 유유히 살아가면서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길이 전하라는 뜻”이었음을 밝혔다. 또 이 정자를 일명 초당(草堂)이라고 부르면서 수천 권의 책을 비치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손님을 영접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안수록은 기호학파 송환기(宋煥箕)의 제자로 하백원(河百源)과 동문이며, 문집으로 『오봉유고(五峰遺稿)』를 남겼다. 송매정의 문헌은 여순사건으로 거의 분실되었고, 현재는 약간의 고서와 고문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문서로는 『통가구의(通家舊誼)』『규남수간(圭南手柬)』등 간찰첩본 4종과 『오봉공일기(五峰公日記)』『왕고서소일기(王考西笑日記)』2종, 간찰 50여건, 혼서류 등이 소장되어 있다.
4) 하백원 가(河百源家)
하백원 가는 현재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 있는데, 근래 들어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하백원(1781~1884)이 생존했을 때 서재에 수졸헌(守拙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수졸헌은 그의 선조 때부터 전래된 서재이긴 하지만, 수천 권의 고서와 다량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어 자연스레 그 집은 ‘만권댁(萬卷宅)’으로 불렸다. 하백원은 본관이 진주이고, 직계 선조로 저명한 인물은 하윤구(河潤九, 1570~1646), 하성구(河聖九, 1654~1706), 하영청(河永淸, 1697~1771) 등을 꼽을 수 있다. 12~3세에 사서(四書)를 모두 읽고 뛰어난 문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하백원은 약관의 나이에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 들어가 ‘세상에 드문 영재(英才)’라는 칭찬을 들었다. 이후 『자승차도해설(自升車圖解說)』『자승도해(自升圖解)』를 저술하여 농정수리사(農丁水利史)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고, 우리나라의 지도 발전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동국전도(東國全圖)」「팔도분도(八道分圖)」를 완성했다. 또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를 제작하여 천문학에 관한 식견을 드러냈고, 알레니(Giulio Aleni)의 「만국전도(萬國全圖)」를 모사하여 선진 문물을 동경하기도 했다. 하백원은 조선조 후기에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실학자이며, 국가를 경영할 풍부한 식견과 박학성(博學性)을 지닌 유학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 몰두했던 수졸헌은 6.25 때 불타버려 소장된 고서도 거의 소실되었고, 지금은 몇 종류의 고문서만 남아있는 형편이다. 고문서도 하영청~하백원 대에 집적된 것이 대부분이다. 고문서의 내용을 개관해 보면, 낱장 간찰 800여 건이 주류를 이루고, 그 외에 간찰첩본 1종과 교지(敎旨), 시권(詩卷), 소지(所志), 등장(等狀), 첩문(帖文), 품목(稟目), 호구단자(戶口單子), 시문류, 일기류 등이 포함되어 있다.
3. 고문서의 내용과 성격
이 자료집은 은봉종택의 명문 30건과 호구단자 20건, 죽곡정사의 명문 120건, 송매정의 간찰 18건, 하백원 가의 간찰 33건 등 도합 221건의 고문서를 수록하고 있다. 은봉종택과 죽곡정사의 고문서는 보성의 죽산안씨들이 대대로 소장해온 자료이고, 송매정의 고문서는 하백원이 동문 안수록에게 보낸 간찰을 안수록의 후손들이 「규남수간(圭南手柬)」이라는 첩본으로 만들어 보관해온 것이며, 하백원 가의 고문서는 안수록, 안수영 등 죽산안씨들이 하백원에게 보내 간찰만 발췌한 것이다.
먼저 은봉종택의 명문은 1689년에 작성된 풍천임씨의 발급문서로부터 1874년에 작성된 안규삼의 토지매매문서까지 모두 30건이다. ‘[001] 별급문서’는 안익상(안익상(安翼相: 안방준의 증손자)의 처 풍천임씨가 며느리 삭녕최씨에게 특별히 분재(分材)한 별급문서인데,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두 아들을 길러왔던 임씨는 큰 아들 안세련(安世璉)이 장성하여 용모가 아름답고 행실이 단정한 최씨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자, 마음이 흡족하여 큰며느리 최씨에게 노비 2명을 특별히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본문 p.18). '[015] 가옥매매문서‘는 1847년에 죽산안씨 문중에서 가옥과 텃밭 및 대밭, 삼밭, 솔밭 등을 80냥에 매입하여 종손 안권(安權)에게 헌납한 문서인데, 당시에 몰락한 종택을 부호(扶護)하고자 문중 차원에서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본문 p.32). 이밖에 대부분의 명문들은 보성읍 주변지역에서 작성된 매매문서로서 조선조 후기에 몰락했던 은봉종택의 경제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한편 은봉종택의 호구단자는 종손 안권, 안영환, 안종묵과 그 주변인물의 호구 내 가족상황과 노비 숫자를 파악할 수 있는 문서이다. 이들 문서를 통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약 100년간 종택의 인구변동 추이를 이해 할 수 있고, 더불어 종택 소유의 노비가 황해도 지역에도 분포되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