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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02 16:05
그녀 방의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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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방의 블루<br><br><br><br><br>신상조<br><br><br> 나는 TV를 껐다. 적막이 사방에서 은밀한 복병처럼 몰려왔다. <br> 간장 꽃게장의 선전이든, 밥 먹는 장면이 한 시간에 서너 번씩 나오는 드라마든, 숀 마이클이 등장하는 프로레슬링이든 내겐 다만 주위의 앙상한 침묵을 가릴 수 있는 묵직한 이불일 뿐이었다. 고슴도치처럼 나는 TV에서 쏟아지는 소리를 덮어쓴 채 밤낮을 보냈다. <br> 거의 열흘 가까이, 정확하게 말하면 남편과 아이가 집을 떠난 날부터 나는 거의 24시간 내내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생활하고 있었다. 전원을 끄면 고요해지길 기다렸다는 듯 무섭게 들고일어나는 소리들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사나운 개떼들이 마구 짖어대는 것과도 같이 끔찍한 소음들은 기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것들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향해 끊임없는 질문을 해대는 것 같기도 한 그 소리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불안스럽게 집안을 서성댔다. 그러다가도 마치 옆에 있는 누군가와 큰 소리로 다투기라도 한 양 가슴이 터질듯할 때면 견디지 못하고 베란다로 나가 차가운 바람을 쐬곤 했다. <br> 미처 챙겨주지 못했던지 베란다에 있는 빨래 건조대에는 딸아이와 남편의 옷가지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개켜서 부치지 못할 소포인양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다. <br> 깊은 밤 쪼그리고 앉아 장독들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면 아파트 울타리를 따라 늘어선 외등들 사이로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차갑고도 축축한 겨울바람을 견디며 서 있었다. 가끔 나목들 사이에서나 건물들의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도둑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교미를 거부하며 발톱을 세운 날카로운 암고양이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br> 남편이 짐을 옮기던 날, 나는 종일 거리를 헤매다 집에 돌아왔다. 잘 있으란 그의 전화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의 목소리가 몹시 듣고 싶었다. <br> 늘 신발이 몇 켤레씩 놓여져 있던 현관이 휑하니 비어있을 뿐, 실내는 내가 아침에 나서기 전에 본 풍경 그대로였다. <br> 이미 짐작되는 애인의 변심을 확인하기 두려워 애써 만남을 미루고만 있는 남자처럼, 나는 한참동안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마치 확인의 의식같이, 나는 차례차례 아이와 남편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내가 해산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남편은 밤낮이 바뀐 아이와, 총각 때부터의 오랜 습관을 핑계로 현관 입구에 있는 방을 서재 겸 잠자리로 썼었다.<br> “애가 쓰던 물건은 모두 가져가겠어. 빨리 적응하려면 아무래도 잠자리나마 익숙한 분위기가 좋을 거니까.”<br> 남편은 이혼 이야길 꺼내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대로 아이의 방은 가구까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유달리 깔끔했던 남편의 성격대로, 방에는 종이조각 한 장 남아있질 않았다.<br> 그러나 그의 물건은 옷과 신발, 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거실 한 구석에 놓인 검고 단단한 실내 자전거와 그가 늦은 시간까지 사용하곤 하던 낡은 컴퓨터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아이를 제외하고는 나와 살았던 세월에 대해 자그마한 흔적조차 지니고 가지 않겠다는 남편의 단호한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br> <br> 신혼 때, 집들이를 마친 남편이 그 친구들을 데리고 기어이 술집으로 이차를 나갔었다. 새벽에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엉망으로 취해 들어온 그가 침대에 쓰러지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br> “남자는 사랑 반, 그리움 반으로 사는 거야.”<br> 술이 얼룩진 옷과 양말을 벗겨주면서, 그런 순간 남편에게 깊은 과거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란 많지 않다.<br> “어디, 여시 같은 이혼녀한테 댈까….” <br> 나를 시뻐하는 빛이 역력한 손위 시누이를, 누가 들을세라, 시어머니가 지르잡듯 단속했지만, 우연히 듣게 된 그 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냉랭한 남편으로 인해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서까지 잔뜩 주눅이 든 내 마음을 한층 어둡게 만들었다.<br> 그러고 보면 선을 보는 자리에서 남편은 관심을 갖고, 한번도 나를 정면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 시선은 허둥거렸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자신의 남빛 넥타이를 무심히 만지는 그의 긴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테이블 아래로 내 손을 슬며시 내리기까지 했었다. 마디가 굵고, 뭉뚝한 손은 우리 집안의 내림이었다. <br> 자신이 입고 나온 희고 빳빳한 와이셔츠마냥 그는 내게 지나치게 깍듯했을 뿐인데. <br> 그날, 나는 왜 남편과 결혼하겠단 결심을 했을까? 예감처럼, 그가 나처럼 작고 무뚝뚝한 여자를, 스물아홉의 평범한 유치원선생을 만나, 영원히 사랑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으면서…. <br> 기미(幾微)들은 거창하지 않다. 비를 머금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난 먼 하늘처럼, 어느새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벽처럼, 조짐들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다 가진 부부관계 후에 등을 보이며 돌아누운 남편의 단단한 어깨에서, 한번도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은 채 묵묵히 수저질만 하는 식탁머리에서. <br> 종종 전화를 걸어보면 언제부턴가 남편 주위의 공기는 지나치게 고요했었다. 마치 숨죽인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처럼. <br> 모른 체 해야만 알량한 자존심이나마 지켜진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딸아이 앞에서 만큼은 한 옥타브 높인 목소리로 애써 명랑하게 남편과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난 그때 무엇을 확인했던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무섭고도 진부한 죄?<br> ‘그 여자는 어떤 여자야? 웃는 모습이 예뻐? 아마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도 뜨겁고 적극적이겠지?’<br> 내 상상은 늘 두렵고 진부했지만, 난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풍문으로만 듣던 삶의 비루함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외면하는 일 말고 내가 거기에 맞설 수 있는 복수가 또 무엇이던가.<br> 남편이 다시 만나고 있는 여자가 이혼녀라는 것 외에 내가 그녀에 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사소하고 단편적인 것이었다. <br> 결혼을 한 달 앞둔 어느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식장을 예약하고, 함께 근처 식당에서 남편과 밥을 먹고 나서는데 밥집 앞에 세워져있는 차가 낯이 익은 듯했다. 빨간 크린베리 색깔이 유독 눈에 띄어서였을까. 예식장을 가는 길 내내 뒤에서 따라오던 차임에 틀림없었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와 내 눈이 잠깐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황급히 남편이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 나를 태웠다. <br> “바쁜 일이 있어서 데려다 줄 수 없어. 미안해.”<br> 의아하게 돌아보는 내 눈에 여자의 차 쪽으로 걸어가는 남편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br> 질투란 블라인드가 드리워진 창문 저 편을 노려보는 충혈 된 눈이다. 난 한때 페티시스트처럼,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남편이 비참하게나마 장애인이라도 되어서 그의 흰 손을 내게 맡기길 원했다. 손을 줄지언정, 결코 나와 눈길을 나주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br> 질투에 빠진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신의 대한 모멸감 외에는 없다. 뜨겁고, 헐벗고…, 가난한 욕망.<br> 일상, 건드리면 툭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은 무언가가 내 속에서 때도 없이 급작스레 부풀어 오르곤 했다. 그러면 갑자기 생각난 듯, 두부나 대파를 사기 위해 혹은 설탕 한 봉지를 산다는 핑계로 난 매번 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러다 아파트 주변의 노점을 돌며 급하지도 않은 감자나 양파 등을 샀고, 먼 슈퍼에 들러 다용도실 어딘가에 아직 넉넉하게 남아있을 휴지 같은 것들을 샀다. <br> 끓다만 찌개와, 늦은 저녁을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아이를 생각하며 나는 종종 아파트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우리들이 살고 있던 201동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아홉 층, 오른쪽으로부터 세 칸을 세서 집의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br> ‘저곳은 대체 어딘가.’<br> 내가 널어둔 빨래가 희끗희끗 눈에 들어오는 그 창문 안에는, 그러나 영원히 내가 편히 기댈 방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다. 가슴이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 목구멍까지 꽉 차오른 것 같기도 한 어둠은 집까지의 거리보다 아득했다.<br> <br> “이렇게 시어터진 게 말이 돼, 아가씨?”<br> 남자는 카운터 위에다 김치를 내동댕이치듯 꺼내놓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늦은 저녁시간, 상가 지하에 있는 식품코너에서 물건을 고르던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카운터 쪽으로 돌렸다. 남자 치고도 큰 뼈대에, 그러나 군살이 붙어있지 않은 단단한 몸집이었다. 다소 굽은 어깨와 사소한 일에도 버럭, 소리칠 것 같은 퉁명스런 말투만 아니었다면 첫인상이 그다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였다.<br> 그가 집에서 처음 꺼내먹을 때 이미 포장용지를 버렸는지 판매용으로 짐작되는 김치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있었다. <br> “손님, 날짜를 확인하셨어야지요. 여기 보세요. 이렇게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제조 날짜와 그에 따른 숙성정도를 표시해놓았잖아요.”<br> 카운터의 아가씨는 진열된 김치들 중에서 한 봉지를 가져와 남자에게 보이면서 웃음을 잃지 않은 채 해명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가 사가지고 간 김치는 찌개용으로나 적당한 김치이며, 숙성정도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수였다.<br> “아, 난…, 난 판매하는 김치는 모두 갓 담근 것으로만 생각했지요.”<br> “남자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어요. 미리 설명해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손님”<br> 얼굴이 벌겋게 된 남자가 더듬거린 것과 주위 사람들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br> ‘어머, 뭐야? 남자가 김치나 사러 다니고.’ <br> 아마도 그 안에 있던 우리 모두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의 허름한 처지를 상상하며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다. <br> 나는 그가 뒷머리를 쓸며 나간 조금 후에야 그 슈퍼를 나왔다. 남편이 모처럼 일찍 퇴근한 뒤였으므로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졌다. <br> 시장은 고만고만한 아파트들이 들어선 곳을 등 뒤로 한 채, 단독주택들이 밀집한 동네를 버스길 건너편에 끼고 있었다. 내가 나온 상가 주위는 버스길을 따라 늘어선 노점상들, 그리고 잡다한 상점들을 찾는 손님들과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나온 주부들로 오후 서너 시를 넘어서면 인도를 걷기가 불편할 만큼 붐볐다. 나는 그런 소란스러움이 싫어서 언제나 아이가 유치원을 다녀오고도 한참이 지나, 해거름이 되어야 장을 보러 나서곤 했다. <br> 주위 어디서 장거리를 샀는지 남자는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비닐봉지를 들고 서너 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br> 꽃집 앞에 늘어놓은 화초들을 구경하느라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으므로 나도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이삼천 원이면 어디서나 살 수 있는 흔한 난들이었다. 그가 또 옷가게 앞에 세워둔 행거에서 운동복들을 구경했으므로 나 또한 거기 수북이 쌓아둔 철지난 옷들을 뒤적거렸다. 남자는 흘낏, 옆 눈으로 나를 일별했지만 무심한 눈길이었다. 꾹 다문 입매가 무엇엔가 잔뜩 성이 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얼굴이었다.<br> 시장을 한바퀴 도는 동안, 나와 서너 번 더 눈이 마주친 다음에야 남자는 내게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눈치였다. 그리고 그가 내게 주목하는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br> “일자릴 구하고 있어요.”<br> 그는, 무슨 말인가, 싶은지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br> “아까 슈퍼에서 뵀어요. 혼자 사시는 것 같아서….”<br> 인도 한 가운데 어정쩡하니 서서 나는 재빨리 입술을 핥았다. <br> “혹시 일할 사람을 구하시지는 않나 싶어서요.”<br> “난 파출일 같은 거 쓸 만큼 돈이 없소.”<br> “돈은 주시지 않아도 돼요.”<br>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퉁명스럽게 돌아서는 남자를 붙들다시피 하면서 내가 재빨리 말을 뱉었다.<br> “만약, 만약 혼자 사시는 게 맞는다면 가끔 그 집을 하루쯤 제게 빌려주시기만 하면 돼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br> 남자는 내가 정신이 이상한 여자는 아닌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면서 살피는 것 같았다.<br> “처음 보는 사람을 잡고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애인하고 지낼 곳이 없소? 모텔이라도 필요한 거요?”<br>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나만큼이나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거칠고, 컸다.<br><br> 시간은 느리고, 질척거리며,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깜빡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컴컴한 뻘 속에서 겨우 고개만 내민 사람처럼 외롭고 적막했다. 그동안 친정 엄마가 두 번 전화를 걸어왔었고, 이동통신 회사를 바꾸길 권장하거나 투자만 하면 확실한 투기지역을 소개해주겠다는 전화 같은 것들이 몇 번인가 왔었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말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부분틀니라도 하라고 몇 달 전에 내가 큰맘 먹고 보낸 돈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남동생의 학원비로 이미 바닥이 났을 것이다.<br> 상한 잇몸 때문에 이를 두 개나 뺀 뒤로 엄마는 나나 동생 앞에서도 웃을 때면 입을 가렸다. 작은 키에 비해 지나치게 살집이 좋은 가슴과 허리, 그러나 반대로 기형적으로 왜소한 팔 다리와 구부정한 어깨. 나는 마흔만 넘어서도 내가 엄마와 같이 초라한 외모로 늙어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br> 친정엄마는 아이가 시어머니한테 갔다는 내 말을 두 번 다 의심하지 않았다. 아직은,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br> 언젠가 입덧이 심한 나를 위해 시골에서 엄마가 가지고 온 것은 신문지에 둘둘 말아온 열무였었다. 벌레가 갉아먹어 구멍이 숭숭 뚫린 열무는 손바닥만한 텃밭에서 엄마가 기른 거였다. 열무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거기다 비빈 찬밥을 허겁지겁 먹은 뒤에야 나는 메슥거림이 멈춘 것만 같아 한결 기운을 차렸었다. <br> “어디 숨을 죽이지 않고야 부드러워지는 게 있던?”<br> 엄마는 열무에 먼저 굵은 소금을 치면서 내게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었다. 기미가 잔뜩 낀 딸의 얼굴을 보면서, 내게 죽어질 게 더 무엇이 있을 것 같아 엄마는 그런 소릴 했을까. <br> 열흘 동안,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아이에 대한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가 사시는 동네에 좋은 피아노 학원이 있을지, 엄마와 떨어진 자식의 처지에 대한 염려로는 터무니없이 사치스러운, 그런 생각도 들었다. <br> 바이엘을 끝낸 아이는 이즈음 막 체르니를 치고 있던 중이었다. <br> 나를 옛 버지니아 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곳은 목화와 옥수수와 감자가 자라나는 곳이지요. 그곳은 봄이 되면 새들이 감미롭게 지저귀는 곳이랍니다. 그곳은 이 늙은 흑인의 마음이 간절히 가고 싶어 하는 곳이지요. <br> 최근 들어서 아이가 반복해서 연습하던 곡은 블랜드의 가곡이었다. ‘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주인의 매질이 있을 지라도 노예는 고향 버지니아로 돌아가고 싶다고 노래했다. 뼈아픈 과거보다 현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그 노예에겐 더욱 더 고통스러웠던가.<br> 짐을 옮기고 난 후, 아이는 한번도 내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네 엄마는 외국으로 몇 년간 나가있게 되었다고 남편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무어라고 애에게 나에 대한 나쁜 반감을 심어놓았는지도 모른다. <br> “남자가 이혼하잔다고 여편네까지….”<br> 시어머니는 집안을 콩가루로 만들어버린 부덕한 어미, 라고 아이에게 낱낱이 내 흠을 잡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이 아이를 앞에 두고, 그렇게 나를 천하에 몹쓸 년으로 몰아붙였으면 한다. 무력한 엄마에 대한 연민은 아이를 도시의 시궁쥐처럼 자칫 초라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차라리 나에게 품은 미움으로 자신을 평생 독하게 벼리는 게 낫다. <br> ‘강해져라.’<br> 아이에게인지 자신에게인지 모르게 나는 주문을 건다. 악문 입술에서 쓴 침이 돈다. <br><br> 평온한 나날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은 권태를 느낀다. 반대로 괴로움과 슬픔의 연속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는 게 낫다는 느낌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쯤 되면 고통에 찌든 이들은 이 세상이 ‘사랑이나 희망의 힘이 아니라, 실패한 절망의 힘으로 발전한다.’는 식의 경구가 호사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br> 남편한테 매를 맞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도, 그래서 특별히 피신처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가정주부가 가끔 머무를 곳을 찾는다는 이야기에 남자는 전자의, 가벼운 일탈을 원하는 여자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br> 그 집의 현관에는 신발장에 들어가 있어야 할 신발들이 모두 바깥에 나와 있는지 등산화를 비롯한, 모두 그이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이 네 켤레나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거실에 놓인 검정색 마호가니 좌탁 위에는 담뱃재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가 얹혀있었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탁에서보다는 거기서 음식 먹기를 남자는 즐기는 듯, 탁자에는 음식국물 떨어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소파 위에나 아래, 거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양말짝이나 옷가지들은 세탁을 하기 위해 함부로 벗어놓은 것인지 말리기 위해 굴리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집안은 엉망이었다. <br> 남자의 집에 간 첫날, 난 성실한 파출부처럼 맨 먼저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부터 청소했다. 국물만 남은 반찬통은 씻어버리고, 상해서 냄새가 나는 음식들을 모두 버려버렸다. 다시 덥혀먹으려고 넣어둔 게 분명한 찌개냄비에는 퍼렇고 미끌미끌한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냉동실에 들어있어야 할 식품들이 냉장고에서 썩고 있었고, 야채실에 있어야 할 파나 양파가 냉동실에서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그냥 버려야할 쓰레기와 재활용할 것들이 마구 뒤섞여 버려진, 밟개의 스프링이 고장 난 쓰레기통 옆에는 빈 맥주병과 찌그러진 캔들이 봉지에 담기지도 않은 채 뒹굴고 있었다. 한마디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가 난감한 부엌이었다.<br> 2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두 개나 가득 채울 만큼 허접한 쓰레기들을 버리고 나서야 겨우 돌아서서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은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하다못해 일회용 인스턴트커피조차 하나 없었다. <br> 냉장고 안에서 말라가고 있던 귤과 찾지 못한 커피 그리고 빈 맥주병들로 미루어볼 때 그는 커피와 과일을 즐기지 않고, 하이트맥주와 얼큰한 찌개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리정돈에 매우 서툴거나, 혼자 사는 일에 채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br> “모레 다시 올게요. 거리를 사다놓으시면 간단한 밑반찬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br> 난 남자에게 메모를 몇 마디 남겨놓고는 집을 나와, 열쇠를 그의 우편함에 넣어둔 뒤 그 아파트를 나섰다.<br> 두 번째 날엔 내게 필요한 커피와 크림을 사가지고 갔다. 평일에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까지, 가고 오는 시간을 빼고 겨우 두 시간 정도 빠듯한 여유가 있었다. <br> 보수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이상한 고용인에게 무엇을 드러내놓고 시키는 게 미안했든지 남자는 아무런 반찬거리도 사다놓지 않았었다. 냉장고 안에는 이틀 전 내가 말끔하게 청소해둔 그대로, 판매용 마늘장아찌와 김치, 물만 붓고 끓이면 즉석에서 조리되는 인스턴트된장 그리고 몇 병의 맥주만이 말갛게 냉기를 쐬고 있었다. <br> 개수대에는 라면을 끓여먹은 것으로 보이는 냄비와 양념이 말라붙은 접시가 들어있었다. 함께 놓인 컵까지 씻고 돌아서서 흐트러져있는 빨랫감들을 세탁기에 넣었다. 사용하지 않은 것과 구분이 되지 않게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수건과 양말 등도 함께 집어넣은 뒤 곧바로 청소기를 돌렸다. 남자 혼자서 지내는 집은 그만큼 어질러놓은 것도 단순해서 의외로 방과 거실 정리는 간단하게 끝이 났지만, 바닥은 걸레를 몇 번이나 빨아서 다시 닦아야 될 만큼 끈끈하고 더러웠다. <br> 안방에는 놀랄 만큼 요란한 로코코풍의 장롱과 화장대가 있었다. 그것은 그 남자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의 가구이기도 했다. 무뚝뚝한 남자와, 장식이 화려한 가구를 좋아하는 여자와의 삐걱대던 삶이 손에 잡힐 듯 드러나는 것 같았다. <br> 집을 줄여서 이사를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남자의 말마따나, 30평 남짓한 그의 아파트는 안방과 거실을 제외하고는 물건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은 느낌이었다. 으레 거실 벽면에 하나쯤은 걸려 있기 마련인 가족사진조차 건넛방의 장식장 옆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분명한 그들이 사진 속에서 함께 미소 짓고 있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빼박은 키가 큼직한 사내아이가 자기 엄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환하게 웃고 서있었다. <br> “여기를 보세요. 살짝, 고개를 조금만 더….”<br> 그들을 찍던 사진사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긴 다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뻗은 채, 남자와 나란히 새빨간 우단을 씌운 사진관의자에 앉은 여자는 우아하도록 긴 목과 약간 치켜든 고개 탓인지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br> “여기가 꿈을 찍어주는 사진관인가요?”<br> 아이에게 언젠가 읽어 주었던「꿈을 찍는 사진관」이란 동화도 생각이 났다. 아이 생각을 하니 문득 불안해졌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br> ‘엄마는 혼자 숨어서 생각할 곳이 필요해, 네가 좋아하는 숨바꼭질처럼.’<br> 피곤했으므로 잠시 침대에 누워보았다. 이불에서는 남자 특유의 냄새가 났다. 불쾌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잊어버린, 어릴 적에 맡았던 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감각, 그 중에서도 후각의 기억보다 정확한 것은 없다. 냄새들에 대한 추억들이 슬며시 일어났다가 스러졌다. 시렁가래엔 메주가 달려있고, 이불이 따뜻한 아랫목을 늘 차지하고 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해서 자칫 까무룩, 잠이 들 것만 같았다.<br><br> 한 주 건너 한번씩 들르곤 하던 시댁에는 언제나 햇볕에 바싹 마른 청결한 나뭇잎의 냄새가 났다. 유독 지저분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남편의 성격은 그런 정갈한 모친의 영향이었다. <br> 혼자 사는 시어머니는 생선구이나 청국장 같은 음식들은 먹고 난 후면 냄새가 지독하다는 이유로 즐기지 않았다. 흔히 노인들은 자신의 입으로 씹어서 부드럽게 만든 음식을 손자나 손녀한테 먹인다고 젊은 새댁들이 질색을 한다지만, 시어머니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br> 늘 말갛게 끓여낸 무국이나 살짝 데친 후 새파랗게 무쳐낸 시금치 등을 곁들여 시어머니와 남편은 소식(小食)을 했다. 껍질을 벗긴 생강에다 물을 붓고 끓인 뒤, 그 물에다 씨를 빼고 여러 조각으로 자른 배를 함께 넣고 끓여서 차갑게 식힌 배숙은 시어머니가 가장 즐기는 후식이기도 했다. 생강 맛을 맵게 우려내지 못해서, 껍질을 벗긴 배에 통후추를 서너 개 박는 것을 깜빡해서, 유리그릇에 담아내올 때 잣을 띄우는 걸 잊어서, 그녀는 한동안 내가 만든 화채에 건성으로 입만 대고는 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콜라를 찾는 아이의 투정은 내가 자식을 반듯하게 키울 줄 모른다는 사소한 표시였다. 그러나 남편 앞에서만큼은 나에 대해 언짢은 속내를 시어머니가 드러내놓고 하는 법은 결코 없었다. 적어도, 아들이 원해서 결혼시킨 며느리는 아닌 것이다.<br> 서둘러 내가 저녁 설거지를 끝내면 나와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나올 때까지 남편은 아이와 주고받는 말 외에는 거의 모친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 <br> 왜 항상 이래야만 하나, 생각하면서도 서로를 향해 웃어주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앞만 보고 선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처럼,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의 고집 센 침묵은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br>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br> 집 앞에 우리 모녀를 내려놓고 나면 남편은 언제나 행선지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다시 차를 돌려 나갔다. <br> “빨리 와 아빠”<br> 남편의 흰색 소나타가 아파트 입구를 멀리 벗어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멋모르는 아이는 손을 흔들었다. <br> 아마 그때마다 난 마음을 다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아이의 손을 놓고 나도, 어디론가 발길을 돌려, 오래 전 왔던 그 길을 되짚어 가고 싶단 생각을….<br> 그즈음, 부부관계가 막바지로 치닫는 느낌은 나도, 남편도 느끼는 터였다. 가끔 새벽이면 잠긴 내 방의 문고리를 살며시 당겼다가 놓는 기척을 느끼곤 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남편이 곁에 오는 걸 참지 못했고, 그런 나를 남편 또한 모른 척했다. 자그마한 불씨 하나만 있어도 불이 붙도록 잘 준비된 마른 도화선처럼, 우리들 사이란 이미 어떤 말을 꺼낸다는 것은 돌아설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행위였다. 어쩌다 남편이 집에 있는 일요일, 내가 남자의 집으로 건너갔던 것도 부딪혀야만 될 상황을 어떻게든 피해보고 싶은 내 알량한 속셈은 아니었을까.<br>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br> 대충 남자의 집을 치우고 나면, 나는 그의 책들 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꺼내와 읽었다. 너무 일찍 죽어버린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도 있었고, 남자의 아들이 남겨놓고 간 듯한 청소년용 문고판으로 나온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기도 했다. 소설과 인생을 구별하지 못했던 그 비극적인 여인의 이야길 읽을 때면 집에 두고 온 아이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이 세상의 비극은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부모들이 너무 많다는 게 아닐까. 친정엄마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남편 없이 키운 딸이 이혼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br> 피터 브뤼겔의 <사냥꾼의 귀환>이란 복사본이 들어있는 화첩은 그의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보던 것이었다. 그림의 가운데는 점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천진스럽게 스케이트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잎이 떨어진 시커먼 나목들 위의 까마귀들과, 이제 막 마을 입구로 접어드는 것으로 보이는 눈 위의 사냥꾼들을 보면서 나는 평화로움보다는 묘한 적막을 느꼈다. 겨울사냥을 다녀온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그 모습에는 남자가, 때론 남편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모두가 어둡고, 피곤해보이기만 했다. <br> 그러나 대부분은 잠을 잤다. 병이 회복된 끝에 몰려오는 환자의 나른한 잠처럼, 그 남자의 집에서는 끝도 없이 잠이 몰려왔다. 남편도 아이도 잊어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책을 읽거나,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잤다. <br> 청소와 간단한 밑반찬을 만들어주는 대가로 남자는 주말이면 집을 비워주었다. 일요일이면 그의 등산용 신발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가까운 산에라도 다녀오는 것 같았다. <br> “밑반찬 솜씨가 좋더군요, 감사합니다.” <br> 딱 한 번 그가 고맙다는 메모를 남긴 적이 있지만, 그 외에는 뭐가 먹고 싶다거나,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거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집에 가져갈 장을 미리 보면서 남자의 것도 따로 샀고, 영수증을 남겨놓으면 그걸 본 남자가 식탁 위에 돈을 얹어놓는 순서였다. <br> 11월 하순의 흐린 오후였다.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가 설핏, 한기에 깨어보니 잿빛으로 찌푸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부슬부슬 비라도 내릴 낌새였다. 산에라도 간 남자가 그대로 밖에 있기에는 춥고, 썩 좋지 않은 날씨였다. 시계바늘이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돌아올 지도 모를 남자를 위해서 서둘러 그 집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시계 옆에 있던, 주제넘게도 내가 못을 박아 걸어둔 그들의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과 함께 뉴질랜드로 날아간 여자가 사진 속에서 빤히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br> 그녀도 브뤼겔의 그림에서 혹시 자기 남편의 모습을 읽었던 걸까? 어느 날 갑자기, 집안 구석구석을 날마다 쓸고 닦던 손에 맥이 풀리면서 그렇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걸까? <br> 남자의 집을 나서려는데 거실에 놓인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혹시 집에 전화가 오더라도 받지 말 것을 남자는 내게 당부했었다. 누굴까?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까지 전화벨 소리는 끈질기게 따라왔다. 새삼스럽게 낯선 집이란 느낌이 몰려왔다. <br> 아파트를 들어서자말자 뒤에서 후두둑 비 듣는 소리가 났다. 집 출입문 밖에는 남편과 아이가 시켜먹고 내놓은 자장면 그릇이 포개져 있었다. 한나절 집을 비운 셈 치고는 빈약하게도, 내 손에는 고작 아이의 속옷 한 벌과 두부 한 모가 들려있었다. 그것들을 내려다보는 남편의 눈길이 우울한 듯, 싸늘했다.<br><br> ‘당신과 살아가는 삶이 끔찍했어. 너무 뻔하고 통속적이었지. 매일 매일이 넘기기가 지루한 책장처럼 곤욕스러웠어.’<br> 남편에게 나는 마지막까지 가슴속에 담아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br> “내 인생이, 다시 말해서 내겐 비밀이 필요했던 거야.”<br> 이토록 비장한 남편의 변명이라도 듣게 될까봐 나는 두려웠다. 비밀처럼, 끝내 내겐 미움이라는 그늘진 힘이 필요했다.<br><br> TV에서는 아일랜드 무용수가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사랑에 빠진 여자의 독무를 추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시커멓게 브라운관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적막이 사방에서 은밀한 복병처럼 몰려왔다. 연극이든, 가상의 환이 명멸하는 영상이든, 조용한 어둠이 없다면 아무것도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br> 양동이로 퍼붓던 빗줄기가 소리 없이 내리는 가느다란 비로 바뀌듯이, 내 안에서 들끓던 의식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사랑을 하거나,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만 버린다면 내가 지금까지 수태 보아온 사람들만큼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br>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아이의 안부를 확인해야겠다, 고 일어서는데 휘뚝거릴 듯 현기증이 났다. 모처럼 허기가 몰려온다. 그러고 보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남자의 집에 들르지 않은 지가 벌써 한달 가까이 된 것 같다. 내 가방 어딘가에는 아직 그 집의 열쇠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새 찜찜해서 남자가 자물쇠를 갈아버린 것은 아닐까. <br>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걸 알리는 것도, 생활대책을 세우는 것도 당분간은 미루기로 한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또 우리가 쓸쓸하게 늙어갈 것을 그 남자와 함께 기념해도 좋겠다. 아니, 세월은 그의 가족과 남편과 내 딸아이를 지나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만 빨리 다가올지도 모른다. 몇 년 후, 마치 수 십 년의 세월을 헤쳐 온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나 남자는 문득, 그들 눈에 띄게 될지도 모른다. <br> 우선은 남자에게,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를 물어봐야겠다. 야채를 다지고, 생선을 굽고…. 그동안 집을 빌려 쓴 대가로 입맛에 맞는 요리 하나쯤 앞에 놓고 열쇠를 돌려준다 한들, 그게 그리 나쁘진 않겠지. 어쩌면 나는 자꾸만 한숨을 쉬며, 조금 취할지도 모르겠다.<br>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나는 문을 나선다. 가여운 내 사랑, 빈집에 갇힌다.* (200자×80매)<br><br><br>*기형도의 시 ‘빈집’을 빌림.<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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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임새조회 수 218 댓글 0
그녀 방의 블루라... 도입부가 좋군...밤잠 안자고 내공을 쌓더니만 문체가 심상찮군....문체에서 절제된 적막감이 묻어나... 그래, 흥분하지 말고 흠흠...남편이란 자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구만...쯔쯧 ...드디어 한 남자가 나오는군... 주인공이 이 남자와 어떻게 엮어질지... 자못 흥미롭군... 그런데 뭐야, 남자와 주인공의 만남... 설득력이 부족하잖아... 작위적인 만남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설정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상상을 한번 해보면... 지하마트에 같은 시간에 자주 눈에 띄었다....멍한 눈길을 서너번 주고받았다...아니면 시장구경하는 코스가 매일 똑같았다... 둘이 서성거리다가 눈길에서 외로운 영혼을 알아차렸다... 아이구, 내 상상력의 한계... 상투적인 상상...그만두자....아무튼 주인공의 입에서< 일자릴 구하고 있어요>라는 말이 나올수 있도록 하는 설득력이 필요하다구....그래, 그래 아직은 괜찮아 ...<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에서 아버지가 아니라 남편이 아닐런지... 남편의 성격, 시어머니의 성격 잘 드러나 있군... 남자의 집안풍경도 괜찮고...남자의 성격이
확 드러나진 않지만...남자의 인물형상이 좀 더 표현되었으면...< 아파트를 들어서자마자 뒤에서 후두둑 ~ 싸늘했다>가 없었으면... 갑자기 남자의 아파트에 있다가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가 나오니 남자의 집인지 주인공의 집인지 헷갈리는구만.....이게 뭐야...에이...벌써 끝났어?... 주인공의 절실함에 비해 결말부분이 싱겁게 끝나는군....초반의 기대감이 커서일까...뭔가 쓰다 만 느낌...그러나 문체에서 힘을 느낄 수 있었으니... 다음 작품이 기대 되네... 음, 김기덕의 영화<빈집>이 생각난다.... 착한 여자님, 수고하셨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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