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나루터 하면 먼저
덕양산에 위치한 행주산성부터 살펴봐야할것 같다.
행주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124.9m)에 위치하며
문화재 보호구역이 108,098평에 이르고 있다.
행주산성은 1963년1월12일 사적 제56호로
행주대첩비는 1978년 10월 10일
유형문화재 7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행주산성입구 대첩문
행주산성은 자유로와
김포공항이 인접되어 수도권주민들의 이용이
주말이나 휴일이면
5천 - 1만여명이상으로 이용이 더욱 많아지는 곳이다.
행주산성은 해발 124.9m의
덕양산 정상을 동쪽 끝으로 하여 70-100m
높이의 능선을 따라 쌓여진 테뫼식 산성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권율장군동상
행주산성의 평면은 방형에 가까운
동서로 약간 긴 형태로 총 길이는 1km가량이다.
행주산성의 주위는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은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는 자연적인 방어호(湖)역할을 하고있다.
권율장군을 모신 충장사
동남쪽과 남쪽은
매우 급한 자연 경사면을 이루어 접근이 어렵다.
덕양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평야지대에 홀로 솟은 독산 이어서
한강이남 지역은 물론 북쪽 고양일대가 한눈에
관찰되어 천연적인 요새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3월 14일엔 행주대첩제
□ 행주대첩기념관 전시물
○ 행주대첩도
권율장군은 1593년 2월 휘하의 정병 2,3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성수복을 목표로 북상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이중의 목책을 설치하고
주위에 참호를 팠으며 각종 총통,
화차, 수차석포 등의 병기를 다수배차 하였다.
같은 해 2월 12일(양력3월14일)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로 사기가 오른
왜군 3만 여명이 3진으로 나누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은 민, 관, 군이 일치 단결하여
총통, 활, 화차등을 쏘아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왜군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의 맹공격을 가해왔으나 승병,
부녀자들까지 가담한 조선군의 결사항전으로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 하였다.
권율장군은
이 행주대첩으로 도원수에 승임되고 조선군의
사기를 올려 한성수복의 확신을 갖게 하였으며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석전의
공을 세워 “행주치마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작가 문학진 화백
덕양산중턱에 덕양정
○ 이치대첩도
임진년(1592) 7월
호남으로 쳐들어 오던 왜군 1만여명을
전라도 이치(대둔산)에서 물리친 승전 기록화.
육전의 삼대대첩으로 일컬어지고 있음.
임진왜란 발발후
육전에서 첫 번째로 승리한 싸움이다.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수호하고 인력과
군량미 전쟁물자를 동원 할수 있게되어
임진왜란을
극복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전투임.
이 전투에서의 승전으로 권율장군은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치른 날과 같은 날이다.
작가 서울미대 김태 교수
○ 독산성 싸움도
세마대 전투로 잘알져 있는
독산성은 오산시 지곳동에 위치한다.
1592년 12월
권율장군이 왜군에 포위를 당하자
4대문을 봉쇄하고 싸울 기색이 없자
왜군은 식수, 식량이 근절되기를 기다렸다.
권율장군은 식수부족의 생사위기 중
묘안을 내어 산(서장대)위에 말을 세우고
흰쌀을 뿌려 목욕시키는 장면을 연출하자
말들이 환호성을 부르짖고
이에 속은 왜군은 통탄하고 퇴각하였다.
이어 권율장군은 후부를
습격 왜적을 격퇴시켰다는 승전 기록화이다.
작가 정형모 화백
행주대첩비
○ 대첩비문 탁본
1602년에 세운 원래의 대첩비가
풍수에 심하게 마멸되어 헌종의 명으로 1842년
행주나루터에 기공사라는 권율장군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1845년(헌종11년)에 비를 다시 세웠으나
6. 25전란으로 기공사가 불에 타버리고
그 자리에 남아있던
비석을 1970년 행주산성을 정화하면서 옮겨와
현재 충장사 앞에 있는 것을 탁본한 것이다.
내용은 원래 대첩비의 전면 부분과
후면 음기부분 그리고 추기로 구성되어 있다.
추기는 조인영이 지은 글을 이유원이 썼다.
덕양산 정상에 행주산성 대첩비
○ 대첩비문 병풍
이 병풍은 1602년
산성정상에 세운 행주대첩 비문을 병풍에 담았다.
1979년 신 경희 서
○ 변이중 선생 문집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망암(望菴).
5권 2책의 시집문으로
시(詩) 소(疏) 서(書)와 교서(敎書) 헌패(憲牌)
연보(年譜) 묘지명(墓地名)등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에 대처하여
국가의 요새지와 전략지를 모두 열거하여
왜적을 이길 수 있는 방책을 기록한 병학(兵學)
자료와 상소문 총통화전도설(總筒火箭圖設)등
무기의 원리를 설명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변이중 선생은
300량의 화차를 제조 권율장군에게
제공하여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외 총통,신기전등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있다.
이하생략
고양 행주산성 역사 공원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고양 행주산성 역사 공원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가 눈에 들어 온다.
알림판에 의하면
행주산성 앞의 한 강을
조선시대에는 행호(杏湖)라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을 행호라 한 것은
행주산성 인근으로 창릉천이 들어오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물살이 약해
마치 호수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41년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그린그림이"행호관어도"이다.
이 그림은 당시의 행주나루 인근에서
작은 배를 이용하여 고기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옛부터 행주는 웅어로 유명하였는데
이 그림에서
어부들은 웅어잡이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행호관어도" 그림에서는 행주나루 뒤편의
덕양산, 고봉산, 견달산, 심학( 악)산 등도 보인다.
행호관어도는
정선의 33점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하나이다.
경교 명승첩은 겸재 정선이 이병연과 정선이
약속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에 의해 양수리 근교에서
행주산성에 이르는
서울 주변의 풍경을 그린 대표적인 진경산수화첩이다.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으며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41년에,
하첩은 이보다 10여 년 뒤에 그린 그림들이다.
상첩은 양천팔경을 비롯,
한강과 남한강변의 19폭의 그림이 들어있다.
하권은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그로부터 받아두었던 시찰을
화제로 한 서울 주변의 14폭의 그림들이 들어있다.
春晩河腹羹,
夏初葦魚膾,
桃花作漲來,
網逸杏湖外.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 오면,
행주 앞강에는 그물 치기 바쁘다
행호관어도의 이병연의 제시이다.
고양사람들은 한강을 행호라고 불렀다.
한강물이 행주산성의
덕양산 앞에 이르러 강폭이 넓어져
강이 마치 호수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덕양산 자락에는 경치가 좋아
서울 세도가들의 별서들이 즐비했다.
또한 행호(杏湖)는
서해의 조수와 한강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많은 어류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행주 별서 지대
아래에서 어부들의 고기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음력 4월 말이면
행주나루는 온통 웅어잡이 배로 가득했다.
이병연의 시가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1741년 어느 맑은 초여름 겸재는 소악루에 올랐다.
멀리 덕양산 자락
행주나루에 웅어 잡이가 한창이었다.
우측에 북악산,
삼각산, 견달산을, 좌측에는 고봉산을 앉혔다.
멀리 파주 교하의
심학산, 개성의 송악산까지 처리했다.
한강 중간 중간에 모래섬들도 그려넣었다.
2,3명이 탄 14척의 돛대 없는
웅어잡이 배를 그렸고 한강 넘어
행주나루엔
초가집, 기와집, 산위에는 정자도 앉혔다.
소나무, 기암절벽, 버드나무,
행주산성, 덕양산 기슭도 배치해놓았다.
고양땅의 산수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행어관어도는
이병연의 제시와 함게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웅어는 고양지역의 진상품으로
맛이 뛰어나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물고기였다.
조선말기에는 아예
행주에 위어소를 두어 왕가에 진상하였다고 한다.
웅어는 갈대 속에서 많이 자라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葦魚, 갈대고기)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우여’, ‘우어’, ‘웅에’라도도 부른다.
이제는 초여름 행주나루를 가득 메웠던,
지난날의 웅어잡이 고깃배들은 사라졌다.
행호를 바라보며
붓을 잡았던 겸재의 그림만이 남아
옛 한강의 웅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고양시는 덕양구 행주외동
한강변에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를
토대로 300여년 전의 행주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으로
행호관어도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이렇게 예술은
지난날의 향수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하지 않았는가.
행주 나루터
행주산성에 올라가 보면
시원스레 탁 트인 사방의 시야에 깜짝 놀란다.
서울근교에도
이런 곳이 숨어있었다며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덕양산 정상 행주대첩비가 있는 곳,
정상 밑 덕양정 정자에 서서
한강을 바라다본 주변 풍경은 자유로워
한강을 가로지르는 방화대교, 가양대교,
성산대교, 여의도 63 빌딩과 쌍둥이빌딩
그리고 국제금융센터와
오른편으로는 관악산 정상이 얼굴을 내밀었다.
덕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그 주변 풍경은 압권이다.
강매동 들판 뒤로 펼쳐진 암봉산악은
왼쪽부터 백운대, 노적봉, 나한봉,
문수봉 그리고 보현봉이 모두 조망권이다.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병풍처럼 굽이굽이
한강이 산수화처럼 눈을 휘둥글게 만든다.
그 옛날 개성
보부상들이 한양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삼각산의 세 봉우리에 압도당하여
큰 절을 했다는 옛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황홀한 경치에 놀라서가 아닐게다.
가까운 강 건너 김포와 발아래 한강,
고양시 주변 일대 평야는
산 정상에서 사면팔방으로 둘러볼 수 있었고,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모습은 더더욱 멋지다.
동쪽의 여의도 63빌딩부터 서쪽의
일산대교까지 다리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보인다.
북한산,
남산, 관악산, 개화산(서울 강서), 심학산,
계양산(인천 계양), 고봉산(경기 고양) 등
뭇산들이 서울을
성벽처럼 감싼 모습은 눈앞에 펼쳐지는데,
이렇게 산에 둘러싸인
서울 모습을 온전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덕양산 정상에서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북한산을 오른 사람들은 많지만
북한산의 온전한 모습을 한눈에 확인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니,
역시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을 올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행주산성에 있는 행주대첩비에 올라 보면
하늘이 넓은 줄 알게 되리라. 넓은 평야, 한강,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산 위에서 보는 맑은날
하늘은 애국가 3절에서처럼 공활하게 보일 게다.
해발 124.8m 덕양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행주산성.
산성 정상에서는 남쪽 한강변과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행주치마의 유래가 깃든
호국격전지 행주산성은 덕양산의 능선을 따라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으로
임진왜란 때 거둔 행주대첩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3만여 왜군을 맞아
권율장군의 지휘하에 관군, 의병, 승병,
여성들까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승리로 이끈 역사적 장소,
당시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무기대신
돌을 날라 행주치마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다.
행주산성 입구인 대첩문을
들어서면 충장공 권율 장군의 동상과
그 뒤로 행주대첩을
생동감있게 표현한 부조가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행주산성은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도
아름답지만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한강과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덕양정과 진강정은
이러한 멋진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정자이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대첩기념관 쪽으로 가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행주산성 토성길이다.
정상에 오르면
1963년에 재건된 행주대첩비가 우뚝 솟아 있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행주대첩 당시 사용된
특별한 무기인 화차(신기진, 총통기)가
전시된 대첩 기념관과 충장사, 충훈정,
충의정도 행주산성을 걷다보면 만나게 된다.
매년 1월 1일 신년 해맞이 축제와
3월 14일엔 행주대첩제, 5월 행주문화제가 열린다.
행주산겅 역사공원내
한강과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표지
한강은 한반도 중심으로
진출하기 위한 유일한 물길이었다.
그리고 서울지역 주민의 생명수다.
행주나루와 산성(山城)은
그 역사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오른다.
한강이란 큰 강은 항시 한반도 역사의 초점이었다.
덕양산은 주변 평야가 훤히 조망되었다.
그래서 강 건너 개화산(서울 강서구)과 더불어
한강을 통해 진입하는 적을 방비하는 전초기지였다.
산성은 마을을 낳고 마을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사람들이 길을 트고,
그 길로 문물이 오갔다.
행주나루는 바로 그 한강의 길목에 있다.
강을 오갈 수 있는 나룻배는 유일 교통수단이었다.
강 건너편에서
‘사공’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노를 저어 건너가 나룻배로 강을 건네주었다.
그때는 강폭이
지금의 절반정도여서 부르면 다 들렸다 한다.
군청에선 뱃삯을
5원만 받으라 했는데 배 만드느라
진빚 갚느라 곱절로 받았었다는 이야기다.
뱃놀이 손님이 오면
산성 아래 절벽까지도 갔다 오기도 했다고 한다.
배타는 손님 중에는 부평장,
일산장을 옮겨 다니는 장꾼도 많았고,
강 건너 친정 다녀가던 새댁도
고객이었다며 소도 많이 태워 건네주었다 한다.
행주나루 역사가
명을 다한 것은 1978년 행주대교
개통과 동시에 나룻배와 함께 사라졌다.
나루의 정확한 위치는 행주대교 북단
교각에서 상류쪽으로 400m쯤 떨어진
행주가든 식당아래 강변의 돌방구였다 한다.
당시 나루는 백사장이었는데
지금은 수중보 설치로 인한
수면 상승과 개흙 축적으로 사라졌다.
행주가든
주차장 입구의 ‘행주나루터’ 표식만이
나루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물이 되었다.
나루는 사라졌지만 빼어난 풍광은 그대로다.
행주산성앞
한강에는 아직도 고기잡이 어부가 있다.
행주어촌계에서는
매일 그물과 통발을 던지고 있지만
요즘은 참게잡이가 시원치 않다고 한다.
그래도 철마다 웅어와 황복,
장어도 잡지만 예전만 못하고,
게다가 경인 아라뱃길 내면서
준설하느라 고기잡이는 더 어려워 졌다한다.
행주나루,
행주산성과 더불어
이곳 행주의 역사를 간직한 곳은
설립 107주년을 맞은 행주성당(의정부교구)은
행주외동의
언덕 중턱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울대교구와 의정부 교구에서 명동,
약현성당(서울)에 이어 오래기로 세 번째라 한다.
행주산성을 찾았다면
한강이 내다뵈는
강변식당에서 장어구이 한번 맛보는
식도락은 참새방앗간 아닐까란 이야기도 회자된다.
행주대교 북단
강변에 들어선 ‘소애촌’ 식당가가 있다.
‘샛말’이라 불리는 이곳 장어식당촌
역사는 벌써 60년을 훌쩍 넘겼다는데….
초창기엔 행주나루
어부가 직접 잡은 장어를 취급했는데
지금은
수질악화와 수중보 설치로 서해장어가
이곳까지 오르지 못한 지난 30년 새
사정은 변했으나 장어는 외지장어를
쓰면서 식당은 계속 늘어난다니 다행한 일이다.
강서구 가양동
한강 남쪽 지역 한강변 옛 나루터 중
서울 안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했던
공암나루터는 강화도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이조년, 이억년 형제의 우애를 얘기하는
투금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행주산성사료,의학신문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