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정치인.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
출생1482년(성종 13년) 9월 22일(음력 8월 10일), 경기도 용인현(現 경기도 용인시)사망1520년 1월 10일(향년 37세)(음력 1519년, 중종 14년 12월 20일), 전라도 능성현(現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중종 때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훈구파를 억제하기 위해 현량과 실시, 위훈 삭제 등 급진적 개혁 정치를 단행했다.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충의각
위치:평택시 이충동 산37-1
지정:평택시 향토유적 제5호
충의각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 정암 조광조(1482~1519)와 병자호란 때 삼학사의 한 사람인 추담 오달제(1609~1637)의 유허비를 모신 비각이다. 조광조는 조선 중 때 사림파의 대표적인 정치가이다. 그는 한휜당 김굉필에게서 배웠고 1515년(중종10) 안당의 천거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같은 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대사간, 부제학 등의 관직을 지내며 중종의 신임을 얻어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던 중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오달제는 1634년(인조12)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관직에 진출한 뒤 주루 삼사에서 활약하다가 병자호란 때 홍익한, 윤집 등과 척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로 압송 된 뒤 처형되었다.
조광조와 오달재의 유허비는 1800년(순조 원년) 진위유림들이 세웠다.본래는 반지산 아래에 오달제의 유허가 있어 비를 건립허려는데 근처에 조광조의 유허도 있으니 함께 건립하자는 의견에 따라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이충지구택지개발에 따라 2006년 비각의 위치를 30미터 가량 서쪽으로 옮겨 공원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