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요수필 회원
엄마의 밥상
이 태 희
엄마의 밥상은 기다림이다.
길게 울리는 벨 소리에 나른한 오후햇살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전화기 액정에 선명하게 찍힌 아들의 담임이라는 글자가 칼끝처럼 날이 선다. 아들의 행동들이 살이 붙어 징계의 수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란다. 아들의 돌발행동이라며 변명을 하고 편을 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담임선생님에게 연락이 오는 일들은 엄마인 나도 분노조절이 되지 않는다.
제 편이 되어주지 않는 엄마에게 단단히 화가 나있다. 다 차려놓은 식탁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휑하고 학교로 가버린다. 주인 없는 의자가 엉거주춤 서있고 식탁의 음식은 섬처럼 둥둥 떠 있다. 썰렁한 식탁 풍경에 밥맛을 잃은 나도 숟가락을 놓았다. 명치를 짓누르는 게 괜히 서럽다. 입안은 모래를 씹고 있는 듯 서걱거리고 목이 멘다. 부엌과 거실을 서성거려도 답답하기만 하다. 집을 나와 무작정 걷는다. 봄 햇살을 마음껏 받은 신록의 진한향이 답답한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이팝나무 가로수엔 갓 지은 고슬고슬한 하얀 밥이 고봉으로 담겨져 눈앞에서 춤을 춘다.
세월호 참사로 실종된 자식을 여태 찾지 못해 가슴이 숯덩이가 된 부모들이 팽목항 부둣가에 ‘밥상’을 차렸다. 상위에는 아이들 좋아하던 피자와 치킨, 콜라도 올랐다. 시신이 바뀌어 주인 없는 빈소를 지키던 한 엄마는 “애가 소식 없는 게 내가 차린 음식이 아니어선 가 싶어서…….” 라며 영정앞 음식을 치우고 직접 차렸다. 다른 엄마는 “우리 아들 배고프지?”하며 숟가락에 밥을 수북이 담아 바다에 뿌렸다. 엄마들이 차린 밥상의 숟가락은 언제나 밥사발에 꽂혀 있지 않고 옆에 놓여있다. 아이들이 곧 나타나 “나 배고파” 할 것만 같아서이다.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며 생사의 길목에서 환청처럼 지켜준건 가족이고 엄마일 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던 날 아침 얼큰한 콩나물국에 따뜻한 밥이라도 말아 먹여 보내었을 것을. 저 좋아하는 감자튀김도 실컷 먹게 해줄 것을…….” 팽목항앞에서 밥상을 차린 엄마의 넋두리가 바람결에 독백처럼 일어나 귓전에 윙윙거린다. 고봉으로 담겨졌던 쌀밥이 밥알처럼 부서져 눈앞에서 흩어진다.
엄마는 교복 입은 오빠에게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오빠의 귀가를 기다리며 밥주발의 밥이 식을까봐 수건으로 싸고 보자기에 싼 다음, 방 아랫목 가장자리에 두꺼운 이불로 덮어두었다. 오빠가 집에 돌아올 때 까지 대문밖 달빛아래 서성거리던 엄마는 멀리서도 등대처럼 반짝거렸다.
어린 시절 엄마가 없는 집에 돌아와 두리반 상에 차려놓은 식은 밥을 혼자 먹는 게 싫었다. 외로움의 싸늘한 냉기에 상보를 다시 덮고 혹시나 하며 함께 먹을 엄마를 기다렸다. 배고픔보다 더 슬픈 게 어둠속에서 혼자 견디는 외로움이다.
지금 아들은 크고 넓은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외로운 항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들의 세상은 험하고 늘 크고 작은 파도가 치고 거친것이겠지. 어느 날 덩치가 커져버린 아들이 낯설어져 버린 것이다. 약삭빠르고 이기적이어야 잘 살아가는 세상을 향하여 힘들다고 불빛을 보내도 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치우지 않고 나와 버린 외로움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식탁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식탁에 앉을 아들의 빈자리가 멀리서도 반짝거린다. 나는 몇 번이나 데운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려놓고 대문 밖을 서성거릴것이다.
늦가을에
이 태 희
가을이 깊어간다. 오랫동안 간직한 추억처럼 그곳이 그립다.
분천역에서 태백의 철암역까지 운행하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보았다던 지인의 자랑이 부러웠다. 남편으로부터 어렵게 백두대간 협곡열차표를 구했다는 연락을 받자 딸아이가 어렸을 적 가보았던 강원도 철암의 까만 도시가 떠올려진다.
우리는 분천역에서 출발하는 협곡열차를 타고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에 있는 승부역에 내려 다시 분천역으로 향하는 트레킹을 계획했다.
선로에 호랑이 정기를 상징하는 ‘백두대간 협곡 열차’가 들어선다. 좁은 협곡을 지나 계곡과 바위 절벽들 사이로 달리는 열차에 올랐다.
역 인근에 작은 마을이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 사실상 역 이용객은 전무했는데 1999년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오지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어 신호장에서 보통 역으로 다시 승격된 역이다. 좁은 골짜기와 양옆으로 가파르게 산세가 솟아있다. 의연함을 잃지 않고 버티어 온 산세를 보며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은 영암선(영주~철암)은 검은 황금이라 불리던 석탄 산업의 쇠퇴로 폐광촌으로 가는 길이었다.
1960년대 승부역에서 근무하던 역무원이 지었다는 시가 우리를 맞아준다.
“승부역은 하늘 세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딸이 어렸을 적 어린이집이 방학이면,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게 삼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에 사는 언니였다.
낯가림이 심했던 아이가 딱정벌레처럼 가슴팍에 붙어 울고 불면 어쩌나 하며 안절부절 했는데, 품에서 내려놓자 내 걱정을 단박에 없애주었다. 신기하게도 이모 품에 안겨 어서 돌아가라며 우리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마구 흔들어 주었다.
신혼의 나는 늘 종종걸음이었다.
준비도 없이 덜컥 엄마가 되어 언제나 허기가 졌다. 바쁘게 종종걸음 쳐도 하루는 순식간에 가버리고 늘 제자리였다. 바쁘게 걷다 뛰며 쪼개어도 채울 수 없는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졌다. 늘 불안하고 초조 했다. ‘멀티’라는 단어가 좋았다. 불안하고 초조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시도가 내 몸에 잘 맞아 떨어졌다. 한 번에 한가지 일을 하는 게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면서 몸은 ‘빠름빠름’을 외쳤다. 가스레인지위에 몇 가지의 음식이 동시에 조리되고 있을 때 희열을 느낀다.
T.V에서 ‘빠름빠름’하며 멋진 광고가 흘러나온다. 하루만 지나도 구형의 가전제품이 되어 버리는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면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처럼 느껴진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빠르게 변화하니 나도 빠르게 적응하게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산과 산사이의 좁고 험한 골짜기 사이로 향하던 협곡열차에서 내려섰다. 이제 우리가 가는 길은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 될 수도 있다. 열차에서 내린사람은 남편과 나뿐이었다. 날씨탓에 모두 철암까지 열차여행을 계획한 모양이다. 누구의 끼어듬도 없으니 내가 갈수 있는 만큼 속도를 내면 된다.
비가 내린 뒤 길섶은 빗방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시냇물로 흘렀다. 바위틈에 사이에도 계절의 뒤안길에 선 여인네 같은 야생초의 긴 목이 축 늘어진 체 무리지어 있다.
천천히 걷다 걸음을 멈춰 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절 앞에서 의연하게 제몫을 하고 인내해왔을 야생초 하나가 앙증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만난 듯 나를 반긴다. 조용하고 다소곳한 친구처럼 다가왔다. ‘빠름’에 길들여진 나는 움찔했다. 형용할 수 없는 평온에 압도 당한 체 자리에 한참을 서있다. 고요 속에 야생초 무리들이 가만 가만히 내손을 잡는다. 온몸에 조롱조롱 매달리고 씽긋 웃어준다. 가득히 차오르는 행복감이 가슴 깊숙이 자리 잡는다.
나는 무수히 많은 행복을 찾아 늘 바쁘게 걸었고 조바심이 났었다. 제자리에서 한걸음만 뒤로 물러서도 마음의 평온이 내안의 행복인 것을.
멀리 열차 안에서 누군가 나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나도 멀어지는 열차에 손을 흔든다. 그리고 난 늦가을 속으로 아주 느리게 걸어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