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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엎지른 물 담기의 조상 아벨>의 줄거리: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이미 쏘아 놓은 화살은 되돌릴 수 없으며 한 번 떨어진 꽃은 다시 가지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는 초기 부터 지금까지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고 이미 쏘아 놓은 화살을 되 돌리며 떨어진 꽃을 제가지에 붙히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불가능한 가능성이 바로 아벨로부터 시작 됩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고 아벨은 엎지른 물 다시 담기의 조상입니다.
엎지른 물 담기의 조상 아벨
(창4:1~15)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엎지른 물 담기의 조상, 아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말하고, 또 ‘인류의 조상 아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엎지른 물 담기의 조상 아벨’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게도 조상이라고 하는 말이 붙을 수 있는 분들은 전부 ‘아’자로 시작하네요. 아담, 아벨, 아브라함.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게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네잎클로버를 찾는 일처럼 아주 희귀하게 일어나도록 되어 진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일상이 되면 될수록 좋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있으면 좋고, 그럴 수도 있게 하나님께서 다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엎질러진 물이라고 하는 속담에 담긴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글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런 남편을 대신해서 아내가 집안의 생계를 돌보면서 근근이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마당에 곡식을 잔뜩 널어놓고 말리다가 끼니거리가 마땅치 않으니까 들판에 피를 훑으러 나갔습니다. 벼들 사이에서 자라는 피로 피죽을 끓여먹으려고.
그래서 아내가 나가면서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을 좀 돌봐달라고 했는데, 마침 아내가 나간 사이에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근데 남편은 글공부에 너무 열중하다보니 그만 밖에서 비가 오고, 아내가 부탁한 곡식들을 정리하고 치우는 일을 깜빡 잊어버렸어요.
아내가 돌아와서 보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남편과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아내가 나간 뒤에 남편은 과거에 급제를 하게 되었고, 우연히 아내와 남편이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 아내는 여전히 피를 훑으며 피죽을 끓여먹고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출세한 남편을 보자 이 아내가 다시 함께 살고 싶어서 통사정을 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한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아내에게 바가지에 물을 떠오라고 하고 땅에 쏟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쏟아진 물을 다시 담아보라고 합니다. 다시 담을 수가 없지요.
남편이 하는 말, ‘물을 한번 쏟으면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관계도 다시 살 수 없다’고 아내와의 재결합을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엎질러진 물이 비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부관계가 엎질러졌어요, 그리고 아내의 마음에서 남편을 엎질러버렸습니다.
엎질러진 물이 된 그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자, 여러분!
선악과 열매를 따먹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인생의 삶의 판은 엎질러진 물판이 되었어요.
내 마음이라는 바가지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엎질러져버렸어요.
선악과를 따먹으니까 이제 내 주체성이 샘솟듯 솟아올라오니까, 하나님의 주체성이 엎질러져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체성이 엎질러지면서 에덴의 삶이 엎질러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사그라지지 않는 영원성을 그 속성으로 하는 기쁨이 엎질러져버렸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그라지지 않는 기쁨이 있는 가운데 자녀와의 관계, 부부의 관계, 직장생활, 이런 것들을 다 해나가도록 돼있었던 거예요.
기쁘면서 돈 벌고, 기쁘면서 사기도 당하고, 기쁘면서 실패도 하는 것이고…
근데 사실은 그렇게 영속한 기쁨이 있으면 실패가 없고 사기도 없지요.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데리고 다니신 게 사기를 당하신 겁니까? 알고 데리고 다니셨는데?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 신실한 믿음 가운데 핍박을 받은 게 배반당해서 그런 겁니까?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 실패도 실패가 아닌 거예요.
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열매가 맺혀지는 삶을 산 겁니다.
엎질러져버렸어요.
이렇게 하나님의 주체성이 엎질러지니까 혼돈과 공허와 깊음의 바다가 우리 삶을 뒤덮어버렸습니다.
혼돈과 공허가 하나님의 주체성을 마음의 바가지 안에 담고 있는 동안만 억제되는 거예요.
마치 출애굽 때 양편으로 홍해의 물이 벽처럼 서있었던 것처럼, 바로 그 장면이지요.
그러다 애굽 군대가 들어오면서 양쪽의 벽처럼 서있던 홍해 물이 다시 덮여버리잖아요.
하나님의 주체성,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이 이루고 싶어 하시는 소원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있을 때는 혼돈과 공허가 홍해 물이 갈라진 것처럼 양쪽으로 서 있다가, 하나님의 주체성이 엎질러지면서 나타나는 게 바로 벽처럼 서있었던 혼돈과 공허가 나를 덮어버립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이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해 아무런 답이 없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답을 찾아서 해결한다고 하는데, 결과는 자꾸 공허함만 주어집니다, 손에 잡히는 게 없게 되지요. 그리고 마음은 자꾸 우울함과 근심에 빠져버립니다, 바다에 빠지듯이.
이게 바로 엎질러진 물이에요.
자, 그래서 사람은 이제 두 종류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이렇게 엎질러진 물의 상태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유전 죄, 원죄에요.
이 엎질러진 물의 상태, 마음이라는 그릇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엎질러진 상태로 내가 태어나는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냐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주어져 있는 현실인데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면 뭐 합니까?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났는데, 내가 불을 낸 게 아니에요.
내가 불 내지 않았다고 누구 잘못이냐를 따지고 있겠습니까?
불이 났으면 불을 꺼야 될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에요, 유전 죄로 하나님의 주체성이 엎질러지면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엎질러지고 영원한 기쁨도 엎질러져버렸습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그랬느냐, 누구의 잘못 때문이냐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엎질러진 물의 상태를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 이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는 것을 일평생의 유일한 과제로 삼고 사는 사람이 있고, 엎질러진 물의 상태를 쿨 하게 인정해버리고 그것을 시작점으로 수용해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 담는 일을 일평생의 과제로 삼는 사람들의 조상이 바로 아벨이라는 거예요.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지만 아담이 엎질러진 물의 형편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이 엎질러진 물의 형편을 유산으로 받은 사람들 중에서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기로 작정하는 것을 일평생의 과제로 삼는 자들의 조상이 아벨이고, 그 현실을 그대로 수용해서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사는 자의 조상이 가인이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들, 엎질러진 물을 담으려 하고 엎질러진 물의 상태를 출발점으로 인정하고 사는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가 제사에요, 제사.
제사를 둘이 똑같이 드리는데, 이 제사를 통해서 두 부류의 인생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판은 똑같아요, 에덴이 주어진 게 아니라 엎질러진 물의 상태가 주어졌습니다.
에덴이 엎질러졌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마음에서 엎질러진 상태를 똑같이 유산으로 받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데,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들이셨습니다.
근데 본문상으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였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기름으로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 그러니까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좋아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뭐 육식을 더 선호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랬느냐?
우린 본문만 갖고는 모르겠어요.
근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함께 거하셨던 성령님께서 하나님이 왜 그랬는지 알고 계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알고 계시던 당신의 지식을 성령님께서 뒤늦게 히브리서의 기자에게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므로 의로운 자라 하심을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성령님께서 히브리서 기자한테 답을 가르쳐주신 거예요, 우린 몰라도.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가인은 믿음이 없이 드렸고 아벨은 믿음을 갖고 드렸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믿음이 뭔가를 봤더니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그렇지요, 믿음으로 드렸으니까 기쁘게 받으셨다는 거예요.
근데 그 믿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나란히 놓고 상응시키면서 이해를 하자면, 제사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데, 믿음이 뭔가 봤더니 그가 계신 것을 믿고 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그가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게 무슨 얘기일까요?
가인도 하나님께 나가서 제사를 드릴 때는 그가 계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린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 걸 믿지 않고 제사를 드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의 순서를 따라 마음의 의식이 진행된다는 얘깁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 탈 때, 오랜 시간 기다려야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공항 대합실에 앉아 있습니다, 옆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어요.
한 시간 두 시간을 같이 앉아있어도 단 한 마디도 안 합니다.
거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를 때가 있어요.
분명히 그 사람의 존재가 옆에 있잖아요, 계시잖아요.
계신데도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이건 계심을 믿는 게 아닌 거예요.
계심을 믿는다는 건 있음을 믿는다는 건데, 그것은 내 마음에 지금 현재 첫 번째 의식되고 있는 존재, 그 존재를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아내도 있고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직장동료도 있고 내 재산도 있고 내 집도 있고, 많은 게 있어요.
근데 그때그때마다 계심을 믿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자동차에 대해서만 얘기할 때는 자동차의 계심에 집중하는 거예요.
마음에 첫 번째 현실인 상태가 계심을 믿는 거예요.
자식에게 막 집중하고 있어요, 자식에 대해 골몰할 때 누가 말 시키면 ‘잠깐만, 나 이 문제 좀 해결해놓고 봐요’ 이게 바로 계심을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하나님께 나갔지만 하나님 계심을 믿지 않았던 거예요.
하나님 계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첫 번째 의식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벨은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이 첫 번째 의식되는 존재였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 나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첫 번째 의식되는 존재가 아니냐?
우린 다 그렇게 가인처럼 신앙생활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첫 번째 현실이십니까? 아니잖아요.
첫 번째 현실이 뭡니까?
여러분의 사업 아닙니까?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건강문제 아닙니까?
또, 어떤 사람은 ‘오늘 이 예배 끝나고 나면 백화점에 가서 멋진 파카를 하나 사야지!’ 그러면서 어느 브랜드가 좋을까 기도하는 중에도 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첫 번째 현실이고, 그게 바로 계심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내 마음에 들 수 있는 아웃도어 파카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 계심을 믿는 일이 간단한 게 아닌 거예요.
첫 번째 현실이 돼야 됩니다.
근데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와서,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사업이 첫 번째 현실이에요.
왜 이런 지경이 됐습니까?
왜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안 된 겁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까 눈 뜨고 이 세상을 둘러보니 내게 끌어당겨서 좋을만한 것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지어졌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따라 살아가면 되는데, 내가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 내 눈에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먼저 마음에 자리를 차지해서 첫 번째 현실이 돼버린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끌어당겨서 그것과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면 행복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이 생긴 거예요.
그것들을 들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겁니다.
즉, 내 주체성이 살아있는 동안에 내 주체성 안에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내 마음이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와 제사를 드리니까, 이 제사는 뇌물의 제사가 돼버립니다.
심청전에서 몽운사의 화주스님이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드리라고 하잖아요.
부처님께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는 게 바로 부처님께 드리는 뇌물이지요.
또 인당수에 심청을 바칩니다, 이건 또 뭡니까? 인당수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용왕에게 드리는 뇌물입니다. 파도가 없어서 고기 잘 잡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이런 게 돼버리는 거예요.
먼저 내가 내 주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때는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심이, 내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 아니에요.
이미 내 마음에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를 구분해서, 나쁜 것이 마음에 걸리면 ‘저놈을 없애주세요’ 하며 나빠도 첫 번째 현실이 되고, 좋은 것이 있으면 ‘이걸 이루어주세요’ 하고 첫 번째 현실로 붙잡고 하나님께 나와서 드리는 제사는 뇌물이 돼버리고, 이 뇌물은 결국 나의 주체성에 의해서 선택한 것들을 내가 확보하는 일에 도움을 주시옵소서! 말만 공손한 거지 내용상으로는 ‘하나님, 내 머슴이 되어주세요’ 하는 것과 같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안 받으시지요.
그러면 아벨의 제사는 어떤 제사였습니까?
머리로 하나님이 유일한 주체가 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게 존재의 순서를 따라서 의식이 따라가는 거예요.
내가 이런 삶을 살게 됐는데, 내 삶이 있기 전에 누가 먼저 계셨느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 그러므로 내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보다는 나중이다.
존재의 순서가 있잖아요.
내 사업 문제가 먼저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계셨습니까. 하나님이에요.
내 자식 문제가 먼저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계셨습니까.
내 집 문제가 먼저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계셨습니까.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어떤 문제가 이 땅에 있더라도 첫 번째 현실은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걸 아벨은 머리로 인정을 한 겁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잘 안 돼요, 유전 죄가 있어서 선악과 먹은 효과가 나타나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게 제사에요.
이 제사의 의미가 뭡니까?
히브리 제사의 의미는 제사물이 드려질 때 그 제사물이 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제사물이 나라고 생각하니까 그 제사물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유전 죄를 받아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주체성을 거부하는 체질을 갖고 자꾸 이 세상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서 내 마음에 붙잡으려고 하면서 살았단 말이에요.
이걸 머리가 보는 거예요. 그리고 머리가 이건 아니다, 라고 판단을 하는 겁니다.
잘못됐음을 느끼고 인정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선 내가 이 땅에서 내 주체성을 발휘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끌어당기고 이루어봐야 결과적으로 공허할 것이라고 머리로 믿는 겁니다, 마음은 자꾸 세상 것을 잡아당기지만…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행위가 제사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제사는,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엎어버린 뒤에 자기의 주체성을 통해서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얻고 그것이 없으면 근심하고 하면서 살았던 삶이 잘못되었던 삶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렇게 산 나를 양과 일치시켜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니라, 죄악 된 나를 죽이는 것이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엎어버리고 마음이 자꾸 나의 주체성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잡으려 쫓아가고,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도 그걸 위해서 찾으려고 하고, 하는 이런 기질 자체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는 걸 머리가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제사를 드릴 때, 주체성을 스스로 발휘하고 있는 나는 양이 죽듯이 죽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곡식을 드릴 때는 못하느냐?
곡식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에요.
원래 곡식이 있으면 갈아서 드립니다. 곡식을 그대로 드리는 법이 없어요.
간다는 것이 바로 똑같은 의미에요.
이렇게 갈려 죽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듯이 우리의 심령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회복된다는 얘기고, 엎질러진 에덴이 회복된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은 엎질러진 물의 상태에서 그냥 출발해버립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면 내 주체성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때 얼른 제사를 드려야 되잖아요.
이처럼 주체성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나는 제단에 올려진 양처럼 죽어 없어져야 된다, 이걸 머리로 깨달아야 돼요.
자꾸 내 주체성이 살아나면 이 세상의 현실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대상들이 먼저 눈에 들어와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는데, 저걸 어떻게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의식돼야 되는데, 다른 것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런 ‘나’는 죽어야 된다는 걸 인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죽이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벨 유형의 제사지요.
그리고 아벨을 시조로 하는 인간의 부류가 이제 어떻게 아벨의 제사를 반복하며 살아갑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렇게 나의 주체성이 발휘되고 있는 그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나다, 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소원하면서 기도함으로써 제사를 드리고, 이렇게 말씀을 나누며 제사를 드리면서 하루를 시작하게 될 때, 엎질러진 물이 다시 담긴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의 주체성이 담기고, 엎질러진 에덴이 담기고, 엎질러진 생명나무의 열매 사그라지지 않는 기쁨이 담기고…
그렇게 담길 때 태초에 창조가 일어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창조 행위를 계속해나가는 그런 삶이 주어진다는 거죠.
우리 필생의 과제는 내 주체성이 발휘되고 있는 가운데 무엇을 이루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있었던 이 엎질러진 물의 상태를 날마다 극복해서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느냐? 이것만 과제로 삼으면 된다는 겁니다.
나머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표현됨에 관한 일이죠.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일은 뭡니까?
‘엎질러진 물 다시 담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의식에서 첫 번째 존재가 돼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선악을 판단하면서 끌어당기고 있는 이 세상의 대상들이 다 죽어야 된다.
그것을 위해 이런 ‘나’가 죽는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 제사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요거 우리 평생 하는 일입니다.
나머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주체성의 표현이 되어야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가인을 따라 엎질러진 물의 상태를 천연의 상태, 생래적인 당연한 상태로 인정하지 말고, 아벨을 따라 이 주어진 상태를 극복하여, 엎질러진 물 담기를 평생 매일 아침 해야 될 과제로 알고 사는 생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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