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판 '쉰들러' 안종삼 총경
'은심동정호(恩深洞庭湖), 덕고방장산(德高方丈山)'('호산(湖山)' 선생의 은혜는 동정호 같이 깊고, 덕은 방장산처럼 높네)
시구의 끝자를 딴 '호산'은 한국전쟁 당시 전남 구례지역에서 경찰서장을 두 번 역임한 고(故) 안종삼 서장(1903~1977.전남 보성군 웅치면)을 일컫는다.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빨치산이 마을을 점령할 정도로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지리산 기슭에서 군민들이 발령받아 떠나는 서장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아호(雅號)를 선물한 보기 드문 경우다.
'10월21일 경찰의 날'을 앞두고 안 서장의 공적을 엿볼 수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의 진실규명 결정서가 공개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8월말 구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전달된 이 결정서에는 이념갈등을 넘어 인간의 생명을 중시한 안 서장의 인본주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결정서에 따르면 인민군이 전라도까지 발을 들여놓은 1950년 7월24일 안 서장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좌익활동으로 구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 480여명을 석방했다.
부임한지 1년을 갓 넘긴 안 서장은 이들을 처형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역 유지들의 간청을 듣고 이틀 동안 장고를 거듭한 끝에 용단을 내렸다.
"여러분, 난 지금 목숨과 맞바꿔야할 중대한 결의를 한 순간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이 조치로 내가 반역으로 몰려 죽을지 모르지만…, 혹시 죽으면 나의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사람이 돼주십시오. 선량한 대한민국 백성으로 말입니다"
결정서에 첨부된 '광복 30년사(1975년 전남일보 발행)' 363~364호에는 안 서장의 당시 연설장면을 이같이 소개하고 있다.
당시 구례경찰이 파악한 불순분자만 5000여명으로, 뚜렷하게 좌익활동이 인정된 800여명 중 극렬분자 480여명을 다시 선별해 유치장에 가둬놓고 있었기에 이들을 살린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부하 경찰관들마저도 "너희들을 내보내면 우리 식구가 죽을지 알지만 할 수 없이 보낸다"고 불안해 할 정도였다.
그러나 목숨을 건 안 서장의 용단이 옳았음을 확인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세가 뒤집혀 세달 만에 구례로 돌아왔을 때 피비린내로 진동할 것 같았던 마을이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공사상이 강한 파출소장들이 일부 보도연맹원들을 직접 사살하기도 했지만, 희생자는 타 지역에 비해 극히 적었으며,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도 경찰가족을 포함한 보복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다.
안 서장은 1951년 1월 '다시 돌아오겠다'는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전을 마다하고 두 번째 구례서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인민군 잔당을 소탕하고 치안을 빠르게 확보한 공로로 경찰총수와 내무부장관으로부터 다수의 포상을 받기도 했다.
군민들은 그해 4월 총경으로 진급한 안 서장이 남원 지리산지구경찰전투사령부로 발령이 나자 그의 공덕을 담은 10폭짜리 병풍과 시구를 선물했다. 이 같은 내용은 구례군지에 수록돼 전해오고 있다.
경찰에서 퇴직한 뒤에도 구례에 터를 잡고 살게 된 안 서장은 군민들의 지지로 제2대 전남도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과거사위 박현정 조사관은 "면담한 구례지역 참고인 대부분은 보도연맹원 처형보다는 안 서장에 의해 석방된 사실을 강조했다"며 "전남지역 12곳에서 보도연맹 사건을 조사했지만, 경찰의 미담사례를 접한 곳은 구례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안 서장의 셋째아들 안승순씨(전 곡성군수)는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공적이 구전을 통해서만 알려졌는데 이번에 정부 공식문서에 기록돼 가족은 물론 마을 주민들도 고무돼 있다"며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비석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편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이 조직한 반공단체로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 배격을 강령으로 삼았다. 창설 이후 가입자 수가 30만명에 달했으며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반 강제적으로 가입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부와 경찰은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檢束)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광주=뉴시스】안현주 기자 = 10월21일 '경찰의 날'을 앞두고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480여명의 목숨을 구한 고(故) 안종삼(安鍾三.1903~1977년) 전 전남 구례경찰서장의 공적이 담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은 안 서장(앞줄 가운데)이 퇴직 후 제2대 전남도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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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죽산안씨 / 제학공파 / 장흥 좌랑공 종중 / 첨지공 문중(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와 장흥군 부산면 효자리) / 죽산22세 호산(湖山) 안종삼(安鍾三, 1903~1977) 어른이십니다
11세 극례 조상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