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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메시지 2017년 12월 17일 주일(설교안)
시리즈 주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질문들
질문5. 죄는 무엇이고 죄에서 구원 받음은 무슨 말인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1)
설교 개요
12월 17일: 죄는 무엇이고 죄에서 구원 받음은 무슨 말인가?
1. 마 1:21을 소개하면서 죄의 정의를 규명함
2. 죄의 결과를 밝힘으로 구원의 의미를 다시 정의함
12월 24일: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3.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소개함.
4. 십자가에 대한 오해를 밝힘
5. 결국 죄 용서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고 감사와 확신 가운데서 성탄을 맞이할 것을 촉구함
출생 전에 예고된 이름
성탄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구절 중 하나는 아마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 21절일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면서 이름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아들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도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요(창 16:11),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 이삭도 하나님이 지어주셨습니다(창 17:19). 세례 요한의 아버지에게도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알려주었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장차 한 큰 민족을 이룰 조상들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조상이요, 이삭은 이스라엘인들의 조상입니다. 세례 요한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고 세상에 소개하는 특별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새롭고 특별한 시작을 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미리 알려주는 탄생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그들의 삶이 특별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특별함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속에 그 이름 예수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예수라는 말은 결국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마태는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면 “구원”입니다. 중앙아메리카의 두 나라는 자기 나라의 이름을 “구원자”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엘살바도르(El Salvador, The Savior, 구원자)와 산살바도르(San Salvador, Holy Savior, 거룩한 구원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결국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예슈아’ 또는 ‘여호수아’라고 부릅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도 있고, 구원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라는 이름이 구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의 풀이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죄의 어원적 의미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라면 어떤 문제에서 구원하십니까?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죄가 무엇이기에 죄에서 구원하십니까? 우리는 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죄(罪)를 한자로 풀이하면 잘못된 일(非)을 하여 벌을 받아 그물(网, 罒)처럼 나무로 짜인 곳에 갇히는 일을 가리킵니다. 한자로 볼 때 죄는 잘못된 일을 하여 그 결과로 갇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죄라는 말 속에 그릇된 일과 벌까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합니다. 이 말의 근본을 들여다 보면 ‘부분, 몫, 경계’을 가리키는 ‘메로스’(meros)라는 말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마르티아는 부정(不正)의 접두어인 ‘아’와 ‘메로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는 ‘부분이 아니다, 몫이 아니다, 경계를 벗어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세족식 장면에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식사를 하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받아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한 사람씩 발을 씻어주시는데 제자들은 황당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의 발을 예수님께 맡길 수 없다고 우깁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상관이 없다는 말이 바로 나와 같은 몫을 차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나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도 없고, 나와 더불어 그 나라를 물려받을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나간 탕자의 이야기를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 15:12)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분깃이라는 말이 바로 메로스(meros)입니다. 그러므로 죄라는 말은 (1)어떤 사람에게 할당된 분깃이나 몫이 아닌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정해진 경계를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2)그 사람에게 할당을 해주고 서로 같은 뜻과 재산 또는 나라를 공유하던 관계성이 끊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며, 그에게 할당된 부분에 만족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만물을 관리하는 대리인이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 되려는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서로 같은 꿈, 소망, 나라를 공유하던 관계를 맺자고 하던 약속을 버리고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언약을 깨트려버린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리라는 언약을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서 떠나 우상에게로 자기들의 마음과 정성을 바쳤는지를 여러 차례 소개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 까닭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육신의 생각을 좇아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육신의 생각도 사망”(롬 8:6)입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육신의 생각 가운데 사는 사람이며 그 둘은 모두 같은 결말 곧 사망으로 마칩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바울 사도의 글에 많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과 반대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부분에 만족하지 않으며, 결국 하나님이 그를 위해 준비하신 것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인생이 겪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사망입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결국 사망에서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사망의 증상들1. 중독
죄에 빠진 사람이 겪는 문제가 사망입니다. 그런 사람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자신을 입증할 것을 찾고 거기에서 만족을 누리고자 합니다.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트로피(trophy)와 스펙(spec, specification, 구직자 사이에서 학력, 학점, 자격증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나를 말해주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트로피를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손쉽게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또는 불만족을 해소해보려고 이것 저것을 먹어보기도 하고 해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빠지는 것이 바로 중독입니다. 중독은 탐심에서 비롯되며 탐심은 자기 만족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만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빠지게 되는 최후의 덫이 바로 중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골 3:5).
중독은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출발은 개인의 탐심에서 비롯하며 그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 만족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서 분명하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와 인정, 그리고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중독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더 이상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또는 비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중독은 개인의 삶을 망치고 가정도 파괴하며 나라를 무너지게 하기도 합니다. 알코올 중독이 그렇습니다. 도박 중독이 그렇습니다. 마약으로 중국은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마약으로 평생에 쌓은 수고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정부는 그렇게 강력하게 도박에 대해서, 마약에 대해서 엄한 형벌로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힘으로 과연 사람의 마음에 있는 그 탐심을 막을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부가 있다면 그 정부는 구원자 정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를 구원자라로 정한 두 살바도르도 치안이 매우 나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라고 합니다. 정부가 중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독은 술이나 마약 또는 화투나 카드 그리고 카지노 슬롯머신을 없앤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독의 원인은 만족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잃어버린 사람의 일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사랑 받는 자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빈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빈 집에 우환이 들고 도적이 침입하는 것처럼 생명과 사랑, 은혜로 충만하지 않는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도적 같은 중독입니다.
우리들은 중독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탐심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욕구불만과 탐심에서 벗어나 만족을 알고 자족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망의 증상들2. 어그러진 인간관계
죄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는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결국 죄의 삶이라는 말이며, 그 결과는 정체성의 상실, 탐심에 빠짐, 나아가 우상숭배와 중독에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다른 양상은 갈등과 증오, 폭력과 전쟁입니다. 즉, 인간관계의 어그러짐이 죄가 가져오는 두 번째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관계의 죽음입니다. 관계의 죽음은 오해와 갈등으로 시작하여 원한과 증오 그리고 마침내는 살인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말도 ‘사람 사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관계 사이에 있으며 사람의 불행도 관계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관계 속에서 사람은 성장하고 관계 속에서 사람은 상처도 입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잘 세워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 받은 사람들은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삭개오는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가 극도로 나빴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에서 깨어진 관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관계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죄도 용서하셨고, 남이 모르는 은밀한 병을 치료하신 후에는 그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고 선언하심으로 그 사람이 사람 사이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조건 없이 용서하심으로 사람을 고치셨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용서하고 용서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주위에는 깨어진 관계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고침을 받아 사람들을 섬기면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즉, 그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어그러진 인간관계를 회복하신다는 말입니다.
한달 전 11월 29일에 강원도 철원군 산 기슭에서 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신은 분당에 사는 A여인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여인을 죽인 사람은 중랑구에 사는 다른 여인입니다. 그 두 사람은 모란시장에서 만나 10년 동안 언니동생하면서 살았는데 결국 살인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다 외롭고 쓸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어 위로하면서 살고자 시작된 만남이 그런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아예 관계를 시작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관계들로 인하여 고민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사망의 증상들3. 허무와 목적 없는 삶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을 떠난 삶이 만나는 어려움은 첫째는 정체성이요 둘째는 어그러진 관계요, 그리고 셋째는 허무와 목적 상실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정체성을 묻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누구인가? 이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삶의 목적에 대한 물음입니다.
인간은 목적과 이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면 그 일을 하면서 힘들어도 인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간은 쉽게 지치고 창의적은 생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최근에 읽고 있는 에머슨의 ‘자기 신뢰’의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람은 온 마음으로 일에 몰두하고 최선을 다할 때 활기를 얻고 즐거워진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그렇지 못할 때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하는 해산(解産)이다. 마음에 없는 일을 하게 되면 재능이 그를 버리고, 뮤즈(muse)도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창조도, 희망도 사라진다.
살아갈 이유를 상실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인생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인생이 허무한 까닭은 자신이 하는 일에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 일이 다 헛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를 때 인간은 허무해집니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고, 나의 존재 가치를 찾기 위해 목적을 정해놓고 성취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전문 운동선수가 은퇴하면 방황하기 쉽습니다.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약해지고 현직에서 물러나면 누구나 내가 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자신이 가진 것이 없고 삶에 대한 무게 때문에 내가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분명한 목적을 정하고 그 일에 온 열정을 쏟을 수 있을 때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없어져도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사는가 보다 얼마나 참된 가치를 위해 사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와 가정을 위해 그렇게 수고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처럼 수고한 자신을 몰라주고 다 성장한 자녀들이 아버지를 서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드라마에는 이런 아버지가 “나 이 집의 가장 졸업이다! 이제 각자 알아서 살자!”라고 그의 허탈한 마음을 고백한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지금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일이 영원할까 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참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전등은 밝아서 여기 저기를 비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앞길을 비춰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낮에는 손전등 없이도 온전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잠시 평안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얼마 동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가치인 진리를 붙든 사람은 든든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7)
하나님의 뜻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진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되, 허무와 목적 없는 삶에서 구원하셔서 참 가치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시고 보람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구원의 세 번째 의미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자요,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모두 사망의 증상들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죄로 인하여 발생한 그 사망의 증상들이 치료 받아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를 그림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아야 합니다. 모든 민족과 나라에 화해와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온 인류가 참 가치를 향해 서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창조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요, 그 구원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러 우리 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그 구원의 맛을 보고 기뻐하면서 주님과 함께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의 맛을 볼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더욱 잘 감당하기 위해 배우고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다음 주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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