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백합화
마태복음 6:16-끝 아가서 6:2 또 2:2
이명직(李明稙) 목사
白合花有兩種, 一在主之手, 一在荊棘之中, 主言白合花比世人之生活方法, 違神規則, 彷徨于虛榮之中, 是異邦之人, 祈禱之精神亦爲物資而祈, 且以財代神. 舊約之白合花, 所爲吾信者而言矣. 在野之白合花, 異乎彼, 富豪家園中之物也. 吾等往野則可見大自然之高爽. 都市有三層五層之建物, 自動車往來, 馬車往來, 然野則不然, 有大自然之美, 一切虛榮不入. 市內有各聲, 在野則寂而無聞, 水聲鳥聲有自然音樂, 在野則無所求而在市則有所求. 吾與某友過某時計店, 友見物而不行, 在野則不然, 無所見無所聞, 主曰在野之百合, 吾信者卽在野之白合花, 無誘惑而但讚美也. 野且何爲, 卽神之國也. 在市則不能見神, 又不能認識神性, 而在野則能使吾認識神性, 物色紛紜埋阻神性, 而暗黑已耳. 某友言太陽大於地球百倍, 而以下民掩眼則不能見之, 在市之高等學者, 不能入天國, 而在野之勞動者, 能入天國矣. 在野之白合花發展如明, 吾不能知之, 吾等之在世, 能見能食, 皆以爲吾之力, 而위솔네先生曰, 吾於草木能見神云, 若知花之發展則不能不敬神, 花之天職何也? 天地之萬物皆有天職, 空鳥野花皆有天職, 人皆有天職, 自有相生相剋之理, 而花之天理何也? 發香發色, 令人彷步而玩之, 彼公園之花, 欲令人觀玩, 而彼在野之花, 自發自閤, 是皆天職也. 余家有小兒, 使着新衣則必往隣家何也? 欲誇美也. 世之喜怒在人要名要譽也. 在野之花則不然, 天然而已. 彼世人路柳墻花, 要名而已. 主曰救人左手爲之右手不知也. 바리새在市祈禱, 此廣告而已. 救人吹角亦路柳墻花而已也. 人或寄附, 廣告則爲之, 不告則不爲. 主曰不勞云, 在野之花, 不怨天不怨地. 某女性歎曰, 我何爲女子乎? 在世之人修飾自己, 信者不然, 喜樂不在衣食, 此在主手之花也, 其地則在棘之花也. 花爲棘裂則香氣尤發, 信者爲世所迫則信仰尤堅. 弱信不能傳道何也? 畏世故也. 此孤兒無勞苦之功, 惟依主已耳.
백합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손에 있고, 하나는 가시넝쿨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은 백합화를 세상 사람의 생활방법에 비유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고 허영 가운데 헤매어 이방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정신도 역시 물질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재물로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백합화는 우리 신자를 위하여 말한 것입니다.
들에 백합화는 부호가(富豪家)의 동산 가운데 있는 물건입니다. 우리가 들에 나가면 대자연의 상쾌함을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는 삼층이나 오층의 건물이 있고 자동차가 왕래하지만 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있고, 일체의 허영이 없습니다. 시가지에는 여러 소리들이 있지만 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물소리와 새소리 등 자연의 음악이 있습니다. 들에서는 구할 것이 없으나 시가지에서는 구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친구와 어떤 시계점포를 지나는데 그 친구는 물건을 보느라 가지 않았습니다. 들에 있으면 그렇지 않아서 볼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들의 있는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는데 우리 신자는 바로 들에 있는 백합화입니다. 들에서는 또 무엇을 합니까?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시가지에서는 하나님을 뵙기도 어렵고, 또 신비한 성품도 알 수 없으나, 들에서는 능히 우리로 하여금 신비로운 성품을 인식하게 됩니다. 물질의 색깔이 어지러우면 신비로운 성품이 묻혀버려서 암흑뿐입니다.
어느 친구가 ‘태양이 지구의 백배는 크다’고 하였습니다. 고등학문을 배운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나 들에 있는 노동자는 천국에 들어가기에 쉬울 수도 있습니다. 들에 피는 백합화는 환하게 발전하지만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나의 힘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 선생은 ‘나는 초목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꽃의 발전을 안다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꽃의 천직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만물이 다 천직이 있습니다. 공중의 새, 들의 꽃들이 다 천직이 있습니다. 사람도 다 천직이 있으며 상생상극의 이치가 있습니다. 꽃의 천리(天理)는 무엇입니까? 향기와 빛을 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구경하게 합니다. 저 공원에 핀 꽃을 사람들은 보고 즐기지만 저 들에 핀 꽃들은 저절로 피었다가 시들어 갑니다. 이것이 다 천직입니다.
나의 집에 어린 애가 있는데 새 옷을 입히면 반드시 이웃집에 갑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세상 사람의 기쁘고 성냄은 이름을 내려고 하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들에 핀 꽃은 그렇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일 뿐입니다. 길가의 버들이나 담장의 꽃처럼 명예를 구합니다. 주께서 ‘구제할 때 왼 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시장에서 기도하는 것은 광고일 뿐입니다. 사람을 구제하는 음악을 틀어놓듯 하는 것은 길가의 버들이나 담장의 꽃처럼 명예를 구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혹 기부금을 내는데 널리 알리는 광고를 하면 내고, 광고를 안 하면 내지 않습니다.
주께서 ‘수고롭게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들에 핀 꽃은 하늘도 땅도 탓하지 않습니다. 어느 여성이 한탄하기를 ‘내가 왜 여자가 되었는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꾸미려고 합니다.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것은 입고 먹는데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있는 꽃에 있습니다. 그 환경은 가시넝쿨 속의 꽃입니다. 꽃이 가시에 찢기면 향기가 더 발생합니다. 믿는 자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면 신앙이 더욱 견고해 집니다. 약한 신앙으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고아는 노고의 공도 없이 오직 주님만 의지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