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各自負擔)
갈리디아서 6:5
체부동교회(體府 1929.10.20)
吾等熟讀聖書, 深有所注意者有二, 一 個人主義, 二 合同主義也. 個人合而爲社會, 故個人不可忘社會, 社會不可忘個人也. 故主欲專力社會改革而先自個人始, 使人人革新. 取看이고데모重生問題, 사마리아犯淫之女悔改, 皆其証也. 吾等不先改革自己, 欲先改革社會, 其成功之難如緣木求魚矣. 子思曰其本亂而末治者否, 豈非眞理乎? 主訓人之時, 勿貶人, 勿量人, 勿視人目芒, 克己負架而從我, 此皆自修之工夫矣. 不聞繆躬之事乎? 家內有紛爭, 躬乃閉門自檛, 諸婦皆自服, 全家和平, 今吾敎會有如繆躬者乎? 果有則敎會興旺矣. 然反是而互相反目則主不能在其敎會矣. 馬山及大邱有敎會爭奪之戰, 可謂寒心矣. 前日所謂頑固敎育是指何而言也? 不置重於個人主義而但置重於個人利益也. 拔一毛而利天下不爲, 某探掊克他人, 剝取他人之利益, 稍得利權則社會欽慕又崇拜, 故甚至凌轢下級之人, 個人主義於何處覓得乎? 甚矣個人主義之蹂躪也! 吾敎會則不然, 個人各有職務, 有對自己之職務, 有對他人之職務, 自己之衣食出自自己可也, 自己之知識出自自己可也, 自己之權利及義務, 亦出自自己可也. 自己不能行自己之事, 非但愧恨也, 乃失敗也. 亦不能生存於世. 如南門之內車行馬走, 有一人阧立其中則必顚乃已也. 故保羅曰 各自負自己之擔. 其次社會意識也, 主曰天國近, 神愛世人遣獨生子, 其意何等博愛, 視萬國如一家, 萬民皆神大愛中陶出者也. 無階級而皆平等也. 保羅學主謙遜, 見人有過先反之於己, 我果受神試之重也. 一切去自己之憾情, 而以神之思對人, 以神之思見人過, 而能導之以正道矣. 保羅嘗曰神之思生肉之思死也. 以死的思想對人則發其死的行動矣, 然以生之思想對人則發其生的行動也. 如此對社會則社會果無事矣. 其如此工夫云者果何爲也? 欲使自己免試驗也. 自己犯過生於誤測, 視人飮酒以爲無罪, 故己亦飮酒以明視人之眼反視自己可也. 仙佛皆用內視法, 吾等亦以內視庶至無愧然後可矣. 對社會之擔負能堪當, 受苦互相擔當云者.主曰受苦重負者來我云, 此受苦者何? 以罪過爲受, 且以物資爲受苦, 此等互相當擔當可也. 見人有過續爲深責, 而不引之正導則徒增其負使之更重也. 或甲乙相持心受苦痛者, 使之和協則實有福, 故主曰 擎福矣, 是輕人罪過之負, 物資亦然, 社會經濟如水之流, 一減一加一縮一伸各有負擔, 故以維持社會也. 今新聞道西校長其財重橫領故有罪判決矣. 빌二章四五節. 吾等欲成就基督之心, 以謙遜爲主也. 主爲我親子而盡忠, 吾亦爲社會而盡忠可也. 主道以忠誠爲主矣.
우리는 <성서>를 읽는데 깊이 주의할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주의(個人主義)이고 둘째는 합동주의(合同主義)입니다.
개인이 합쳐져 사회가 되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를 잊어서 안 되며, 사회도 개인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회개혁을 전력하려고 할 때 먼저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마다 혁신(革新)하도록 하였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다시 살아나는 중생(衆生) 문제를 가르쳤고, 사마리아에서 간음한 여자를 회개시킨 것이 모두 그 증거입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자기 개혁을 하지 않고 사회개혁을 먼저 하려고 하면 그것이 성공하기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이 어렵습니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그 근본이 흐트러지면 그 끝부분이 잘 정리되지 못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어찌 진리가 아닙니까? 주님은 ‘남을 깎아내리지 말고, 남을 헤아리지 말 것이며,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게 모두 스스로 수양하는 공부입니다
자기의 몸을 벌주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습니까? 어떤 사람이 집안에 분쟁이 있자 문을 닫고 회초리로 자기를 채찍질하자, 며느리들이 스스로 항복하여 온 집안이 화평해졌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이와 같이 자신을 벌 줄 자가 있습니까? 과연 있다면 교회가 번창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서로 반목하면 주님께서는 그 곳에 계실 수 없습니다. 마산(馬山)과 대구(大邱)에서 교회를 쟁탈하는 싸움이 일어났다고 하니, 가히 한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날 완고하다고 하는 교육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개인주의에 치중하지 않고 다만 개인 이익에 치중하였던 것입니다. 천하에 이롭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머리털 하나를 뽑는 조그만 희생도 하지 않으면서, 남을 괴롭히고 남의 이익을 빼앗아서 조금이라도 이권을 얻게 되면 사회에서는 그를 흠모하고 숭배합니다. 심지어 아랫사람을 짓밟아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개인주의를 어디 가서 찾아냅니까? 개인주의가 유린되는 것이 이렇게 심합니다.
교회에는 개인이 각각 해야 할 직무가 있습니다. 곧 자기를 상대하는 직무도 있고, 남을상대하는 직무도 있습니다. 자기의 지식도 자기한테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의 권리와 의무도 역시 자기 스스로 이행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일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끄럽고 한스러운 일이며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남대문 앞에서 수레가 구르고 말이 달리는데 어떤 사람이 그 중간에 우뚝 서 있으면 치여서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짐은 자기가 지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사회의식입니다.
주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그 얼마나 크고 넓은 사랑입니까? 만국을 한 집안과 같이 보았으므로, 만백성은 하나님의 큰 사랑에 의해 생겨난 자 들이므로 계급의 차이도 없이 모두 다 평등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겸손을 배워 남의 허물을 보면 먼저 자신을 반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서운한 감정은 일체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남을 상대하며, 하나님의 생각으로 남의 과실을 보았기 때문에 능히 바른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바울이 일찍이 ‘하나님의 생각은 삶이요,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죽음의 사상으로 사람을 상대하면 죽음의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는 사상을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면 삶의 행동을 발견됩니다. 바울이 이와 같은 공부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시험을 이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과실을 범하는 것은 잘못 헤아리는 데서 나옵니다. 남이 술 마시는 것을 보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도 술을 마시게 됩니다. 남을 보던 눈으로 자기를 돌이켜 보기 때문입니다. 선교(仙敎) 불교는 다 내시 법(內視法)을 씁니다. 우리도 역시 안을 들여다보는 내시 법을 씁니다. 속을 들여다보고 부끄러움이 거의 없어야 합니다.
사회에 대한 부담을 감당하고, 고통도 서로 담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 힘을 합하여 수고를 담당하는 것이 옳습니다.
남에게 과실이 있으면 깊숙이 파고들어 나무라고 그를 이끌어서 바르게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간혹,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서로 버티어 마음에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화해하고 협력하도록 하여야 실로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복이 있도다.’고 하셨는데, 이는 인생이 걸머지고 있는 죄를 가볍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회의 경제는 물이 흐르는 것 같아서 줄어졌다가 더해지기도 하고, 움츠렸다가도 펴지면서 각자가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에 도서(道西) 교장(校長)이 재물을 횡령(橫領)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빌립보 2:4-5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고자 한다면,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사회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의 도는 충성을 주로 삼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