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신앙을 어떻게 지킬까?
마태복음 7:27-끝, 또 10:37-39
이시웅(李時雄) 씨
7월 1일 (주일오전)
信仰有何價値? 信仰生活最有價値, 生活甚複雜, 多種苦痛, 多種悲慘, 皆吾人之苦境也. 然信仰最完全最慰安也. 然則信仰果何以模得也? 更有方法, 繼續其平生, 如吾人之身體健康矣. 欲遠病有方法也, 呼吸淸新之空氣, 種種運動可也. 然則信仰有方法, 皆心之作用也. 信之道果何也? 或以禮拜爲信, 或以祈禱爲信, 甚非也. 先立基於心上, 欽慕吾主之價血而信可也. 或以方便爲信也, 吾故人中有一人, 未有出世之路而信, 上京入學聖經院欲學, 而不能故不信也. 或爲工夫而信, 或爲敎師而信, 或愈病而信, 或不愈則不信, 或見人而信. 吾鄕有一人有能力, 此人入堂時多人入堂, 後此人不信多人皆不入, 或長老一人講道則多人信, 此人不講則不信, 此皆僞信. 或隨時勢而信, 世誹敎則不信, 世迎敎則信. 世人曰信則信, 世人曰不好則不信, 時代變遷不關敎會之變遷也. 吾等之信仰果何也? 信仰爲目的可也. 世排之不關, 世許之亦不關, 信仰最貴重故也. 卽時勢不之近可也. 其次耶蘇最尊貴可也, 吾人中有一人禮拜者欲結婚, 而婚家曰 彼信故不婚也, 郎者曰 若然則吾不信, 約婚尤貴信仰故不信. 主曰重愛妻子者不可於吾也. 爲喪事而信, 爲商業而信, 皆不可也. 其次拘束的生活可也, 信則在心不在行, 進堂亦一規則也, 規則拘束, 此等拘束最好於吾信仰, 通學者日日爲之甚拘束也. 若不登校則不能成功, 一未登校則心始羞愧. 吾信者亦然, 祈禱拘束, 禮拜拘束也. 放學時不能讀書者, 未有拘束故也. 若未有拘束, 則信仰葛藤. 敎役者一生信仰者, 其事業拘束其生活也. 信者有冷者何故? 信者則從信者可也, 而從他未信者而生活, 則化爲未信者也. 保護我身者信者也, 與信者結婚皆在此故也. 主曰負架從我者合我云, 主全體在十架, 十架是代表예수也. 信仰與不義戰故常常苦痛也. 終死時恐怖易生, 至終忍耐者得救, 拘束的生活, 卽信仰之當行也. 吾故人或先生中, 多信而落者何? 皆隨時代而變者也. 若完全其信, 則有數種先立基於心上,最後有如何困難可不動也, 可謂信仰目的也.
신앙에는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신앙은 생활에 있어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활은 매우 복잡하여 여러 종류의 고통과 여러 종류의 비참이 모두 우리 인간의 고통의 경지를 만듭니다. 그러나 신앙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좋은 위안을 줍니다.
그러면, 신앙은 과연 어떻게 찾아서 얻을까요? 방법이 하나 있으니, 평생을 한결같이 계속하게 되면 마치 우리 인간이 신체가 건강하게 되는 것과 같이 됩니다. 병을 멀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맑고 새로운 공기를 호흡하고 자주 운동을 하면 됩니다. 그런즉 신앙에 방법이 있는 것은 모두 마음의 작용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예배로 믿음을 삼고, 어떤 이는 기도로 믿음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마음속에 기반을 세우고, 우리 주님의 피의 값을 흠모하며 믿어야 됩니다.
어떤 이는 생활의 방편을 위하여 믿기도 합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어떤 이는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없어서 믿었는데 서울에 올라와 성경원(聖經院)에 입학하여 학문을 하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게 되자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공부를 위하여 믿기도 하고, 어떤 이는 교사(敎師)가 되기 위하여 믿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병을 나으려고 믿다가, 병이 낫지 않으면 믿지 않기도 하고, 어떤 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믿기도 합니다.
우리 고향에 능력이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당에 들어갈 때는 많은 사람이 따라 들어갔다가 뒷날 이 사람이 믿지 않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두 교회당에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장로 한 사람은 그가 설교를 하면 많은 사람이 믿는데 이 사람이 강설을 하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이는 모두 거짓 믿음입니다. 어떤 이는 시세(時勢)를 따라 믿습니다. 세상에서 종교를 배척하면 믿지 않다가, 세상에서 종교를 환영하면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 믿고, 세상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시대의 변천은 교회의 변천과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연 무엇입니까? 신앙이 목적이 되어야 됩니다. 세상이 배척해도 관계하지 않고 세상에서 허락해도 관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가장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세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예수를 가장 존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우리 중에 예배를 하는 자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결혼 상대의 집에서 ‘저 사람은 교를 믿기 때문에 혼인할 수 없다’고 하자, 신랑 될 사람이 ‘그렇다면 내가 믿지 않겠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약혼이 신앙보다 더욱 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하기를 ‘처자식만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내게는 불가하다’라고 했습니다. 상사(喪事)를 위하여 믿고, 상업을 위해서 믿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 다음은 구속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앙은 마음에 있고 행동에 있지 않으나 교회당에 나가는 것도 역시 하나의 규칙인데 규칙은 구속과 같습니다. 이러한 구속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학교에 통학(通學)하는 자는 날마다 통학하기 위하여 심한 구속을 당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구속을 당하기 싫어서 등교를 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이라도 등교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신자도 그러합니다. 기도도 구속이고, 예배도 구속입니다. 방학할 때 독서하지 않는 것은 구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속이 없다면 신앙도 갈등을 겪을 것입니다. 교역자(敎役者)는 일생 동안 신앙을 하는 사람이니 그 사업이 그 생활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이 식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자는 신자를 따라야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따라 생활하면 믿지 않는 자가 됩니다. 내 몸을 보호하여 믿게 하는 자는 신자입니다. 신자와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기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라야 내게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예수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불의(不義)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마침내, 죽음에 임할 때에는 두려움이 생기기 쉬우므로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구속적이 생활은 바로 신앙을 하는데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나 나보다 먼저 난 사람 중에 신앙을 믿다가 낙오된 자가 많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시대를 따라 변천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 신앙을 완전하게 하였다면 먼저 그 마음속에 두어 가지 종류의 기반을 확립했어야 합니다. 그러면 최후에 어떠한 곤란이 와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신앙의 목적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38-48
강매(姜邁) 선생
7월 1일 (주일저녁)
此聖句主說明于門徒之前, 主如新釋于摩西律法, 前務形式而今則務眞理. 此聖句中左頰外施十里之說, 而皆主假托說也. 假如此言則所謂自己云者, 何可保自己? 今競爭生存之時, 此言甚不當云, 此言亦有理, 然亦有誤解, 若不明知此言, 則有誤解矣. 請看今世之人, 常勝者有常敗, 取看反面則有不然, 失敗時有常勝之理. 目當目齒當齒, 此卽世之理也. 然眞理强者之前溫柔則必勝, 暴者之前柔順則必勝. 平壤外城有黃進士, 人格崇高家勢稍饒, 出入則必乘馬, 平壤江上有長林, 進士昏至長林之中, 則有强盜之聲, 曰汝留在, 黃恭色留馬, 盜曰給馬, 黃乃給馬, 黃還至家思之, 黃更思曰, 馬暴必以鞭制馬也, 故反走呼盜而給鞭, 曰此馬甚暴, 馬中路橫逸故給鞭云, 黃至家夕食而坐, 夜久有人聲出見, 則乃長林之盜也. 盜曰我奪馬而後, 又垂死而又給鞭, 吾千金乃恩, 我乃强盜不齒人數, 故悔改來也. 黃曰此馬尠給之矣 走賣馬而食後勿行此之事云. 盜實悔改爲善人也. 久後數十年, 又有叩門者, 出見之則乃前日悔改反馬之人也. 負各種之物而來矣. 此人乃悔改之人也. 負土産之物而來, 其後年年如是, 後又率子而來見也. 主言此者與黃之事合也. 柔能勝强古亦有陳寔之事, 樑上有君子, 黃進士與陳寔之事乃眞也, 非僞也. 若僞則非但不能成功也, 愛讐可僞則不能感化, 若眞情愛之則彼乃感服. 主於世人不發惡, 至釘十架之時, 卽順從溫柔, 彼得發刀時主責之, 懸架之時爲世人祈禱, 故終則勝利, 在天爲萬有之主也. 孟子曰彼以暴我以仁, 仁乃無敵, 此乃得天下之術也. 或曰披丈夫我丈夫, 吾何畏彼也? 是誠丈夫也. 然非勝利之道也. 目當目齒當齒, 此乃處世之術, 而主乃超越世人, 言此眞理, 使人學勝利之道矣. 此世雖惡, 此世雖强, 若行此眞理則必勝利也. 或曰必欺人後乃得利云, 此甚非也. 正眞乃勝之道也, 吾信者當行此勿疑可也.
이 <성경> 구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명한 말씀입니다. 주께서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 것은, 전에는 형식에 힘썼으나 오늘 날은 진리에 힘쓰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 중에 ‘왼쪽 뺨도 내어 놓으라’고 한 것 외에 ‘십리를 더 가도록 하라’고 한 말은 모두 주께서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대로 행한다면 소위 자기라고 이른 자가 어떻게 자기를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같이 생존경쟁이 치열한 때에 이 말은 매우 부당한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론도 역시 일리가 있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오해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의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기기를 힘쓰는 자는 실패하게 됩니다. 반대의 측면을 가지고 본다면 그렇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실패를 할 때에 늘 이기는 이치가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오늘 날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있어서, 강한 자 앞에서 온화하고 부드러우면 반드시 이기게 되고, 포악자 앞에서 유순(柔順)하면 이기게 됩니다.
평양의 시내 밖에 황 진사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인격이 고상하고 집안 형편이 조금 넉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외출할 때는 반드시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평양강가에 깊은 숲지대가 있는데, 황 진사가 저물녘에 그 숲을 지나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거기 서 있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황 진사가 공손한 태도로 말을 세우자, 강도가 말을 달라고 했습니다. 황 진사는 말을 도적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문득 ‘자신의 말은 매우 사나워서 자기가 갖고 있는 채찍을 써야 말을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숲속으로 달려가서 도둑을 불러내 그 채찍을 주면서 이르기를 ‘이 말은 매우 사나워서 길을 잘 가다가도 가는 길을 벗어나 달리기 때문에 이 채찍을 써야한다’고 하였습니다.
황진사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앉아 있는데 밤이 깊어 사람소리가 나므로 밖에 나가 보니 바로 숲속의 도둑이었습니다. 도둑이 말하기를 ‘내가 말을 빼앗은 뒤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다시 와서 내게 채찍을 주었으니 나에게는 천금 같은 은혜를 입었다고 하며, 사람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나는 강도짓을 했으나 너무 감동되어 회개하러 왔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황진사가 ‘이 말이 비록 별 것 아니지만, 그대에게 거저 주니 이 말을 팔아 생활에 보태 쓰고 앞으로는 이런 일은 하지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강도는 그 후 회개하여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뒤에 또 황진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서 나가보니 바로 전일에 회개하여 말을 돌려주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각종 토산품인 물건들을 지고 와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물건을 가지고 왔으며 뒤에는 그의 아들까지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앞에 하신 말씀이 황진사의 이야기에 부합됩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옛날에 진식(陳寔)이라는 사람이 밤에 들어온 도둑을 지적하여 ‘양상군자(樑上君子)- 대들보 위에 군자’라고 하였습니다. 황진사와 진식의 태도는 진실이고 거짓되지 않습니다. 만일 거짓이었다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거짓으로 사랑한다면 감화를 줄 수 없습니다. 만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가 감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순종하고 온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칼을 뽑으려고 할 때에도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에, 마침내 승리하시어 천국에서 만유(萬有)의 주가 되셨습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상대가 포악하면 나는 사랑[仁]으로 대하리라’고 하였는데 ‘사랑(仁)에는 적(敵)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온 세계를 얻는 기술입니다. 어떤 이는 ‘저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저를 두려워하리오.’ 하면, 이는 실로 당당한 장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승리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고 하는 것이 처세(處世)의 기술이지마는 주님은 세상 사람에서 초월하여 앞서 말한 진리로 사람들에게 승리의 도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비록 악하고, 세상이 비록 강할지라도 이 진리를 행하게 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남을 속여야만 그 다음에 반드시 이익을 얻는다.’고 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르고 진실한 것이 바로 승리하는 도리입니다. 신자는 마땅히 이 진리를 실행하는데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吳元善氏, 李善敬氏, 두자매님.
오원선(吳元善) 씨, 이선경(李善敬) 씨, 두 자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