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어는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릿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국 예술가 존 에버렛 밀레이 경의 1851-1852년 그림이다.
이 작품은 강에서 익사하기 전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연극 희곡, 햄릿에 등장하는 한 인물,오필리어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로열 아카데미 (왕실 예술교육기관)에 첫 전시되었을 당시, 혼재된 반응을 낳았다.
하지만, 이후, 작품의 아름다움, 자연 풍경에 대한 정확한 묘사,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와 살바도르 달리에서부터
피터 블레이크, 에드 러샤, 프리드리히 하이저까지, 예술가들에게 준 영향 때문에
가장 중요한 19세기 중반 작품들 중 하나로서 칭송되다.
이 그림은 물에 빠져 죽기 바로 직전, 강에서 떠다니는 동안, 노래 부르고 있는 오필리어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햄릿의 4장 7막에서 거트루드 여왕의 말로 묘사된다..
보통, 이 에피소드(이야기)는 무대에서 보여지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는 오직 거트루드의 묘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익스피어의 글자 속에서만 있다.
슬픔에 잠긴 오필리어의 정신 상태에서,
오필리어는 야생화 화환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버드나무 가지에 몇개의 화환을 매달기 위해 강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녀 바로 밑의 가지 하나가 부러진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물 속에 눕는다.
자신의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자신의 고뇌에 불능 상태다"
공기를 가둔 그녀의 옷은 그녀를 일시적으로 물에 뜨도록 유지시켜 준다.
("그녀의 옷은 넓게 펼쳐져 있다 / 그리고 옷이 잠깐동안 인어와 같은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의상은 물을 마시고 무거워져..../
그 가련한 여인을 멜로디와 함께 눕혀짐에서 진흙으로 된 죽음으로 내몰았다"
오필리어의 죽음은 문학에서 가장 시적으로 씌여진 죽음 장면 중 하나로써 칭찬되어져 왔다.
또한, 오필리어의 포즈는 - 양 팔 벌린 두 팔과 위쪽을 바라보는 응시 - 성자 또는 순교자의 전통적인 묘사와 닮아 있다.
하지만 에로틱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자연 생태계에서 성장과 시듦의 패턴(반복 양상)을 강조하고 하면서
강둑과 강의 꽃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알려지고 있다..
명목적으로 덴마크가 작품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풍경은 전형적으로 영국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오필리어는 톨워스 인근, 써리에 있는 `호그스밀` 강의 둑을 따라서 그려지고 있다.
`올드 말든` 인근 주민인 바바라 웹은 상당한 시간을 이 그림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데 바쳤다.
그리고 바바라 웹의 연구에 따르면, 올드 말든의 처치 로드을 따라, 식스 에이커 메도우가 이 장면 위치이다.
밀레이 로드가 현재 인근에 있다.
밀레이의 가까운 동료, 윌리엄 홀먼 헌트가 그 당시에 근처에서 "고용된 양치기"란 작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강 위에 떠다니며 보여지는 꽃들은 오필리어의 화환에 대한 묘사와 일치되게 선택되었다.
또한 꽃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관심인, "꽃의 언어 (꽃그림)"를 반영하고 있다..
각 꽃마다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눈에 띄는 붉은 양귀비 - 세익스피어의 묘사에 이 장면에 대한 언급은 없다. -
`잠듦`과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 창작의 초기 단계에서,
밀레이는 오필리어 옆에서 헤엄치는 한 마리의 워터 볼(수상 설치동물)을 - 조수가 호그스밀 강에서 잡아온 - 그렸다.
1851년 12월, 밀레이는 미완성 그림을 홀먼 헌트의 친척들에게 보여주었다..
밀레이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헌트의 삼촌과 숙모가 왔다.
두분다, 가장 만족스럽게, 모든 대상들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물쥐만 빼고,
그것에 추측해 보라고 그들은 초대되었는데, 그 남자 친척은 물쥐를 한 마리 토끼라고 열렬히 발음하였다.
우리들의 미소로 인해, 삼촌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나는 개와 고양이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언급하면서,
그리고 나서 토끼는 위험에 처해졌다."
"밀레이는 그 워터볼(수상 설치동물)을 최종 그림에서 빼고 그렸다.
비록 워터볼에 대한 대략적인 스케치가
작품의 프레임(액자)에 의해 감춰진 캔버스 위쪽 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다.
밀레이가 한 회원으로 있는 라파엘 전파 사조( Pre-RaPhaelite Brotherhood /PBR)의 교리를 지키며,
밝은 색깔을 사용했던 밀레이는 세부사항에 높은 주의를 하였고 자연에 충실한 진실을 주었다.
오필리어에 대한 그리기는 PRB (라파엘 전파 사조) 스타일의 전형이다.
왜냐하면, 우선, 주제 문제 떄문인데,
행복을 기다리며 한 인생을 살았던 한 여자에 대한 묘사,
그녀의 운명은 죽음 직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취약한 여성은 라파엘 전파 사조 예술가들에게 인기있는 주제이다.
또한, 밀레이는 풍경 속에서 창백한 오필리어를 그녀 뒤의 자연과 대조시키기 위해
밝고 강렬한 색깔을 이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필리어 주변 나무와 덤불 에 대해 생생한 주의를 하고
또한, 여자의 드레스 위에 행했던 복잡한 작업으로 분명해진다.
밀레이는 개별적 2단계로 이 작품, 오필리어를 만들어 냈다.:
우선, 밀레이는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두번째로 오필리어란 인물을 그렸다.
.
이 그림을 위해 적합한 배경을 찾기 위해,
밀레이는 이웰에 있는 호그스밀 강의 둑 위에서 - 문자그대로 던지는 돌이 미치는 곳에서 라파엘 전파 사조, 동료, 윌리엄 홀먼 헌트는 "세상의 빛"이란 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1851년 5달의 기간 동안, 하루에 11시간까지, 일주일에 6일 동안 남아 있었다.
이것이 밀레이에게 자신의 앞에 있는 자연 장면을 정확하게 묘사하게 하였다.
밀레이는 그리는 과정동안, 다양한 어려움을 만났다.
밀레이는 한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써리의 파리들은 더 근육질적이며 인간의 살을 탐사하는데 더 대단한 경향을 가지고 있어..
내가 틀판을 횡단하고 건초를 파괴한 것 때문에 판사 앞에 나타나라는 통지로써 위협을 받지..
그리고 난 바람으로 물속으로 날아갈 위험에 있기도 해...
확실히 그런 환경하에 한 그림 그리기는 교수형보다 살인자에게 더 대단한 처벌일거야....."
1851년 11월, 바람불고 눈오는 날씨로 변했다.
밀레이는 "4개의 판넬로 만들어지고 보초 초소같은,
바깥은 짚"으로 덮힌 헛간 건물을 관찰하였다.
밀레이에 따르면, 그 헛간 안에 않아있는 것을 그를 로빈슨 크루소처럼 만들었다
윌리엄 홀먼 헌트는 그 헛간에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
홀먼 헌트는 자신을 위해 똑깥은 것을 만들게 하였다.
]
오필리어는 밀레이의 연인이자 예술가인, 엘리자베스 시드달이 모델을 하였다.
시드달은 그 당시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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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이는 시드달을 런던, 7 고워 스트리트의 자신의 스튜디오,
전신 크기의 욕조 속에서 완전히 옷 입은 채로 눕게 하였다.
그 당시 현재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밀레이는 물을 따뜻하기 위해 욕조 아래에 기름 램프들을 놓았다.
하지만 밀레이는 매우 자신의 작품에 매우 강렬하여 기름 램프가 꺼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시드달은 심한 감기에 걸렸다.
시드달의 아버지가 후에 밀레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의료비 50파운드(9만5천원)를 요구하는 편지였다.
밀레이의 아들에 따르면, 결국, 시드달의 아버지는 더 낮은 금액을 받았다.
세상의 빛
윌리엄 홀먼 헌트 (1827-1910)
1851-1852년
캔버스 위에 유화
121.9 cm (47.9 in) x 61 cm (24 in)
영국 옥스포드 시, 케블 대학 소장
고용된 양치기
윌리엄 홀먼 헌트
1851년
캔버스 위에 유화
76.4 cm × 109.5 cm (30+1⁄16 in × 43+1⁄8 in)
영국 맨체스터, 멘체스터 아트 갤러리 박물관 소장
오필리어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94년
캔버스 위에 유화
49 in (124.4 cm) x 29 in (73.6 cm)
?
오필리어
알렉상드르 카바넬
1883년
캔버스 위에 유화
77 cm (30.3 in) x 117.5 cm (46.2 in)
개인 소장
오필리어
프레드리히 하이저
1900년
캔버스 위에 유화
?
?
오필리어
존 에버렛 밀레이
1851-1852년
캔버스 위에 유화
76.2 cm × 111.8 cm (30.0 in × 44.0 in)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릿튼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