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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노를 사는 기도와 상급을 받는 기도>의 줄거리:
도대체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길래 하나님으로부터 응답과 상급을 받는 대신에 진노를 살 수도 있다는 것일까요? 기도를 하나님이 정하신 불 외에 내 임의대로 다른 엉뚱한 불로써 점화할 때 입니다. 이 경우 응답과 상급은 커녕 오늘 본문의 나답과 아비후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게 됩니다. 바른 기도를 모르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진노를 피하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참담한 이 죽음은 상급 받는 참 기도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진노를 사는 기도와 상급을 받는 기도
(레10:1~20)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4.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5.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6.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7.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진노를 사는 기도와 상급을 받는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진노를 사는 기도와 상급을 받는 기도’
좀 어색합니다. 도대체 기도를 드리는데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그 자리에서 즉사(卽死)하는 그런 기도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시는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인데 즉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만 하면 대부분 무조건 합당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고 여기는데, 실상을 보면 우리가 하는 기도의 대부분이 오늘 본문에서 읽은 대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기도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한국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기도들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이 기도하다가 죽은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성막의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와 휘장이 있고 휘장 바로 앞에 분향단이 있는데 이 분향단의 향을 피우는 일이 기도를 뜻하는데 분향단의 향을 피울 때 다른 불로 향을 피우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기도를 멋대로 했다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와 하나님이 준비하신 상급을 받아 누리는 기도를 할 것인가를 동시에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자, 이렇게 분향단의 향 피우기가 뜻하는 기도의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곧바로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 8절 이하에 보면 성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고 들어갔거나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과 같은 상징적인 상태로 들어가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서 등대를 관리하고 향을 피우고 진설병 떡 상위의 진설병을 놓거나 바꿀 때 항상 돌아봐야 할 것이 내 마음의 성막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막의 구조가 제사장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의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마음의 지성소 안에는 내 마음이 첫 번째로 사랑하는 대상이 들어오는 자리요, 첫 번째 관심사인 궁극적 관심사가 들어오는 자리로 지성소에 들어온 것에 의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적 활동을 하면서 인격체로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갈 때 지성소 바로 앞의 분향단에 향을 피우는데 사람은 무엇이든지 지성소 안에 들여놓은 그것을 현실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추구하기 시작하는데 이 활동전체가 사실은 다 기도예요. 인간의 모든 삶은 마음의 지성소 안에 들여놓은 것을 현실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기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고 잘못된 말이 아니지요.
여기서 ‘포도주와 독주’로 말씀하신 이유는 마음의 지성소 안에 무엇인가를 들여놓는 이유는 그것이 내게 기쁨을 줄 수 있고 그것이 내게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의 지성소 안에 돈을 들여놨다고 하면 돈이 주어지면 기쁠 것이라고 믿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돈, 돈 하면서 삽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만 기도가 아니라 사실은 삶 전체가 추구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뛰는 것도 기도입니다. 마음의 지성소 안에 돈을 들여놓으면 친구를 만나도 마음속에서 돈, 돈하고, 거래처를 만나도 돈, 돈 하고, 아내를 만나도, 자식을 만나도 돈, 돈 하고, 자식에게 돈을 잘 벌려면 이렇게 살라고 하는데 이게 취한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 안에 뭔가를 들여놓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돈, 돈 노래를 부르고 자식을 들여놓으면 자식, 자식 노래를 부르고 또 일정구간 승진에 마음에 꽂혀있으면 승진할 것을 생각하면서 동료를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누르고 승진할까 상사를 보면 어떻게 잘 보여서 승진을 할까 완전히 승진에 취해 있습니다. 마치 술이 들어오면 몸 전체와 생각전체가 다 술에 취하는 것처럼. 그래서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인격을 상징하는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는 법궤가 있는 지성소 휘장 바로 앞 분향단에 기도의 향을 피우는데 나답과 아비후의 마음이 뭔가 다른 것에 취해 있었다는 것인데 돈에 취해있거나 승진에 취해있거나 자식에 취해있거나 다른 것에 취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분향단의 향을 피울 때는 반드시 성막 바깥에 있는 번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서 향을 피웠어야 하는데 다른 불을 가져다가 피웠다고 합니다. 번제단의 불이 아니라 다른 불을 가져다가 향을 피운 것은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이 들어와 있어서 취한 상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교회나 기도원에서 주여 삼창하고 기도를 드릴 때 거의 모든 사람의 80% 이상은 그 자리에서 나답과 아비후처럼 즉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요. 밤새 철야기도를 하는데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고 밤새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 상태가 아니고 다른 것에 취해서 기도를 하는데 다른 것이 왜 마음의 지성소 안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것이 내게 기쁨을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그것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답과 아비후가 즉사했던 것과 같은 진노는 그 기도의 현장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돈에 취해서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하고,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나를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는 하나님의 진노는 내려오고 있는데 그 진노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받아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한 번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원한 의미가 있어서 무한반복 되는 죽음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속죄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끝까지 세상 것들을 마음의 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거기에 취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그 속죄제도 아무 의미가 없는 상태로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 떨어지고 즉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되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드리되 내 마음의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들어와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것이 들어와서 세상 것에 취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더 죄질이 악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는 비용을 치루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비용을 무효화시켰으므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한 것이고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밖으로 나온 다음에 죽이셔도 되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즉사시켜버렸는데 이 뜻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면서 대대로 선민들에게 전하시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우리가 캐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상급을 받는 기도와 진노를 불러들이는 기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펴봅니다. 말씀드린 대로 지성소 휘장 바로 앞에 있는 분향단의 의미가 첫 번째입니다. 등대의 의미보다 더 앞서고 진설병의 의미보다 앞섭니다. 진설병 떡 상의 의미인 하나님으로 배부름은 분향단의 기도가 잘 이루어질 때 배부른 것이고, 또 등대의 의미인 이 세상을 밝게 보고 살아가는 것도 분향단의 기도가 잘 드려질 때 가능한 얘기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분향단의 향을 피우는 것은 오직 번제단의 불로 피울 수 있습니다. 번제단의 불이 뜻하는 것은 번제단의 불은 마음의 지성소 안에 돈, 자식, 승진, 건강, 이 세상의 성공, 목사님들의 경우는 숫자적인 부흥, 예배당 건축 이런 것들이 들어와 있는 나의 인격이 각이 떠져서 불살라버리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불은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이 들어와 있는 나의 인격을 죽이는 불이고, 나의 죽음을 초래하는 불이고, 나를 죽이는 이 불을 가지고 향을 피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죽이는 불로 기도가 점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된다는 것인데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들여놓으면 안 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십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내가 자식을 사랑할 수 있고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자연을 사랑할 수 있는데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가만히 보면 5감각으로 잡히는 것들입니다. 추상적으로 평화를 사랑한다고 해도 추상적인 평화지만 평화가 뜻하는 바가 현실적으로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이 눈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5감각으로 잡히질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냄새도 없는 만져지지도 않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5감각으로 잡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음으로써 간접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보이는 사랑할만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음으로써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A라는 남자와 B라는 남자가 있는데 두 남자 중에 한 남자를 결정해서 결혼을 해야 하는 여자에게 있어서 A를 결정했다고 하면 B라는 남자에 대해서 죽어야 하고, 더 엄격히 말하면 A를 결정할 때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남자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A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남자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을 동시에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직접 하나님을 만지면서 사랑의 뜻을 표현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어떻게 표현을 하겠습니까? 보이는 사랑할 만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음으로서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마음의 지성소 안에 들여놓은 그것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들여놓은 박씨 아저씨가 돈을 추구하는 것이 기도인 것처럼,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셔 들였으면 이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기도가 돼야 하는데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 되는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 봉사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추구해서 하나님으로 배부른 자가 교회를 봉사할 수는 있지만 교회 봉사 충성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세상 복을 추구하느라 교회 봉사하는 것이지요. 교회 봉사 열심히 하면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사기예요.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셨을 경우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법은 자꾸 이 세상에서 추구할 만큼 좋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나를 죽이는 것이고 나를 죽이기 위해서 번제단에서 불이 붙고 있기 때문에 나를 죽이는 이 불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추구하는 것들에 대해서 내 인격과 내 마음을 태워 죽이는 이 불이 내 인격을 점화시키고 그래서 하나님만을 향해서 살도록 하는 이 준비가 되고 나서야 기도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시는데 무슨 말입니까?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다.’라는 말씀의 ‘거룩함’이라는 것은 ‘구별하다, 구분하다,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최종적으로 구분되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죄를 지은 죄수들을 인간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킨다면 이것이 거룩함입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악한 방향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 구분시키는 것은 거룩함이 아니고 좋은 방향으로 분리시키고 구분하십니다. 오늘이 좋아요. 내일은 더 좋기를 원합니다. 이게 바로 구분이고 분리이고 거룩함입니다. 더 좋은 내일을 원한다는 것은 내일은 더 거룩하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지금과는 다르기를 좋게 다르기를 원하는데 거룩함은 좋게 다른 것인데 더 이상은 좋을 수가 없을 만큼 최종적으로 좋은 상태를 말합니다.
‘내게 가까이 하는 자들 중에 내 거룩함을 나타내신다.’라는 것은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이 세상 것들 좋다고 여기는 것들 내게 기쁨을 줄 수 있고 내게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 가정, 자식, 돈, 승진, 일류, 명품, 건강, 아름다운 미모, 등 모든 것들에 대해서 번제단의 불로 나를 불태우고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게 될 때에 앞에 열거한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좋음, 기쁨, 만족을 주시겠다는 것이고 거룩함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 죽어서 하나님만을 향하는 그런 기도를 번제단의 불로 점화시켜 드리면 그 기쁨과 만족과 좋음을 맛보면 이 세상을 향해서는 싱겁기가 이를 데 없는 그런 마음 상태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백성들 가운데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씀은 제사장의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서 도대체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좋음이 마음에 임할 때 모든 백성들이 제사장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을 일등가치로 마음에 모시게 되어서 하나님을 추구하기 시작하고 기도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벌고 하나님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히는 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처럼 논리적인 책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여기 있는 부분을 저기 있는 부분과 맞춰도 맞아요. 어느 것 하나 모순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고 해석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나답과 아비후가 기도를 뜻하는 향불 피우기를 잘못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포도주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을 기도와 연관 지어서 어떤 뜻인지 알았어요. 마음의 지성소에 들여놓은 것들에 취해서 살고 추구하며 사는 것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갑자기 전혀 맥락이 이어지지 않게 보이는데 제사를 드리고 제물들 중에서 제사장에게 속하는 고기 부분들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왜 이런 식으로 갖다 붙이는 것일까요? 포도주 얘기도 사실은 뜬금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보니 그렇게 연결이 되었습니다. 취하는 거예요. 갑자기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 중에서 자기 몫으로 들어올 것들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인가 하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시고 번제단의 불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죽고 아무리 옆의 사람들은 돈 많이 벌어서 함포고복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나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배불러야 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이냐는 것인데 남들이 돈 벌 때 나는 하나님만 벌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일곱 가지 습관을 준행할 때 나는 오직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으로 충만할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는 뜻으로 지금 제사장 몫으로 돌아가는 부분을 말씀하시는데 제가 왜 논리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맥이 통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주님께서 마6:31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구하는 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앉아서 기도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이고 구하고 쥐기 위해서 뛰어 다니는 것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뭘 구해요?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게 뭡니까? 무슨 이 땅에 정의가 이루어지고 이런 것을 얘기하는데 맞아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만 우리가 정의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우리의 마음의 지성소에 최고의 가치 궁극적인 가치인 하나님을 모셔 들여서 하나님이 일등가치가 되시면 그 가치에 의해서 편성되고 조직되고 형성되는 하나의 새로운 나라를 사는 것인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분향단에서 향을 피우는 것으로 상징되는 기도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될 때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직장에 가고 시장에서 장볼 때 하나님 나라가 개국되는 상황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도 나답과 아비후의 향불 피우기의 오류를 죽음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참 기도를 드려서 오직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만을 추구해 나갈 때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드러내고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돈을 벌어도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니에요. 좋음이 식어버려요. 그래서 더 벌어야 해요. 더 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벌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정치에 손을 대고 다른 것에 손을 대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마약도 하고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와서 좋으면 기쁘면 거룩함입니다. 더 이상 좋음이 존재할 수도 더 이상 좋음을 추구할 필요도 없는 그런 좋음을 주시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가까이 나갈 때 우리 마음이 채워지고 나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겠다는 얘기를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는 제사물의 얘기를 하시면서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말씀과 맞아 들어갑니다.
진노를 사는 기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왜 걱정하십니까? 마음의 지성소 안에 들여놓은 그것에 의해서 걱정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생각을 잘 살펴보면 내 마음의 지성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백 번, 천 번도 더 즉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천 번의 즉사를 주님께서 다 받아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무지한 상태로 깨달음이 없이 이 즉사하는 죽음의 기도를 반복하실 것입니까? 번제단의 불로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으므로 세상에 대해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중단하는 것입니다.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외통수예요. 하늘을 향한 외통수 길만 남아 있는데 그 하늘을 향한 외통수 길을 위해서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길을 내셨어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번제단의 죽음을 이루시기 위함이고 세상에 대한 죽음으로 사도 바울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번제단의 불로 인한 나의죽음을 이루신 것이므로 기도는 어떻게 해서 점화될 수 있느냐? 항상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함으로 기도가 점화돼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이제까지의 우리의 기도의 방식과 습관을 생각하면 기도의 내용이 있겠습니까? 맨날 자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후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 발전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당건축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한 번도 하나님이 가치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구해본 적이 없어요. 십자가 복음을 듣고 난 뒤로는 5분을 기도하기가 힘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5분이라도 어쨌든 이제는 바른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주님의 죽으심으로 나의 죽음을 일으키는 불을 점화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만들어 놓으신 외통수 길을 따라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면서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충만해지시도록 기다립니다. 그리고 죽었던 세상에 나가서 살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장갑으로 하나님으로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돈 많이 벌어서 비로소 기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기뻐하면서 돈 버는 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게 되는 것이지요. 뭣 때문에 할 일이 없어서 좋은 밥 먹고 기껏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진노를 사는 기도를 아직까지 드리고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상급 받는 기도로 기도생활이 일관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번제단의 불로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을 먼저 맞이하고 외통수 길을 따라 하나님만을 향해 살아있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준비하신 최고로 좋음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상급으로 받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