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우린
오늘도 두껍고 하얀 구름이 낀 하늘을 보면서, 여름엔 어땠지, 하고 상상을 해봤다. 매년 맞는 여름이니 상상이 쉬울 것 같지만, 이렇게 손도 시리고 입김도 하얗게 나는 겨울에 막상 여름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계절의 변화는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사람들의 생활 습관도 다르게 만드니까. 여름에는 그렇게 행복했던 아이스크림 가게를 시큰둥하게 지나치고, 여름엔 입도 대기 싫었던 뜨거운 차를 매일 마시는 걸 보면, 감각의 입장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거의 천지개벽이다. 옛날 사람들이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거나,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인간보다 더 큰 존재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도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간다. 물론 나는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이제 보상 (?) 으로 과학적 설명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생명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진화론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굳이 말하기 민망할 만큼 진화론자로 살게 된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했으며, 돌연변이가 진화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지식은 이제 일반교양에 속한다. 유전자는 부모에서 자식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형질을 나타내는 단위이고, 분자 생물학이 발달하면서부터 분자의 변이 (특히 단백질을 코딩하는 DNA, coding sequence의 변이)를 이용해 생물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 계통수이다. 석사 과정에 이러한 계통수를 그리는 수업에서 (그림 수업이 아니다) DNA의 변이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을 배우는데, 그중에 충격적이었던 이론이 있었다. 바로, 진화의 원인은 분자 수준에서의 돌연변이인데, 이러한 돌연변이는 대개 ‘무작위’로, 중립적으로 선택된다는 것이다. 이런 진화는 특별한 이유가 없고 선택된 돌연변이가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진화가 무작위로 일어난다고?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났을까?
중립 진화 이론은 1968년 기무라 모토라는 학자가 제시한 이론이다. DNA 분자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쓰인 이론이라서 Neutral theory of molecular evolution (분자 진화에 대한 중립 이론)이라고도 불린다. 이해를 위해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a 산과 b 산은 비슷한 기후에 장소도 아주 가까이에 있어서 다람쥐들이 자유롭게 오고 가지만, a 산이 b 산보다 1,000m 더 높다. 그래서 a 산의 높은 곳에는 추위와 고도를 견딜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다람쥐들이 많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산불이 나서 b 산과 a 산의 낮은 고도에 자라는 나무들이 타버리고, 높은 고도에 사는 다람쥐들만 살아남았다. 나무는 다시 자라고 b 산과 a 산의 낮은 곳에도 다람쥐들이 살게 되겠지만, 이제 이 다람쥐들은 모두 고도나 추위에 적응하는 형질을 가진 다람쥐들이다. 이게 바로 유전자 부동, genetic drift라는 현상이다. 자연재해나 여러 이유에 의한 집단의 분리 (울타리)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부모 집단의 형질이 무작위로 선택되어서 자식 집단에 나타난다.
환경에 적합한 개체의 생존 (적자생존), 자연 선택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새의 노래가 생존에 유리하다면 왜 모든 새가 노래하지 않을까? 같은 환경에서 왜 어떤 식물은 광합성을 하며 다른 식물은 기생을 하거나, 곤충을 잡아먹을까? 필자에게는 중립 진화 이론이 이러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반가운 생각이었다. 집에서 키우는 몬스테라, 브로멜리아, 망고, 레몬, 산세베리아, 그리고 이름 모를 열대식물을 쭉 둘러보고 있으면 모두 광합성이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 에너지를 얻어 살아가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잎의 모양이며 색깔이며 꽃을 피우는 시기이며 자라는 속도가 다 다른지 기이함마저 느껴진다. 생물다양성이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흔하게 쓰이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산책하면서 얼마나 다양한 생명체들이 있는지 눈여겨보고, 이 생명체들은 대관절 어떤 역사를 겪으며 이렇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