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수다
최 호 림
어둠의 수심이 깊을수록
하늘과 땅이 마주보며
낮 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사 풀린 듯 쏟아놓는 것이다
하늘의 별빛과 땅의 불빛
서로 뒤질세라 발하는 빛이
눈부신 꽃밭으로 자라고
끝날 줄 모르게 이어가도
천 년의 수다는 시끄럽지 않아 좋다
그 사이에 살면서 인간은
남의 흉을 보거나 시샘하듯
마구 자랑을 늘어놓고
재미있어 깔깔거리지만
돌아서면 허기지는 아쉬움을 어쩌랴
빛나서 아름답고 향긋한
하늘과 땅의 수다는
자연을 가득 담은 노래처럼 정겹고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만큼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것이다
망초 꽃
국화가 아니면 어떤가,
자랑할 것 없으면 또 어떤가,
벌 나비가 찾아오고
바람도 쉬었다 간다.
한 번도 꽃병에 꽂힌 적 없고
꽃다발로 택함 받지 못했지만
사춘기 시절
밭둑에서 한 다발 꺾어
영희에게 안겨주고 즐거웠던
추억은 남아 마냥 그립다.
서로 돌아선 마음을 다독여
화해의 손을 잡게 한다는,
먼 이국에서 건너와
남 탓을 일삼는 사람들이 씌운 누명에
망국의 꽃이라 손가락질 받으면서
억울함과 울분을 속으로 삼키고
꿋꿋이 견디고 살아남아
이제는 이 땅이 고향 같다고
배시시 웃으며 다가서는
그림자가 왠지 외로워 보인다.
사랑의 거짓말
사랑한다고
누구보다 예쁜
당신을 위해서
저 하늘의 별을 따 주고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여왕처럼 모신다는데
누가 거절하겠는가,
그래서 부부 되어
아들 딸 낳고
동고동락하면서
눈에 씐 콩깍지를 떼며 산다.
저녁노을
법 없이도 잘 사는 정의가 강 같이 흐르고
너도나도 행복해서 춤추고 노래하며
세상의 끝까지 평화가 넘치도록
서로 거울이 되어 사랑과 감사의 샘이 솟고
배려가 미덕인 너를 높여 내가 대접 받는
아름다운 전통의 그림자도 빛나는,
이 나라에 들기까지 당신은 얼마나 많은 짐 지고
능선을 오르내리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습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물도 아닌 핏빛 땀방울을 흘리며
나룻배 같은 가난의 삶들을 아울러 싣고 나르다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도한 그리운 뒷모습입니다.
지상에서 보는 천국의 뜰
딸기
너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더 행복해진다.
흉내 내기
개 짖는 소리가
온 나라의 고막을 찢어놓는다.
옛날의 개들은 리듬을 탔는데
요즘 개들은 시끄럽기만 하다.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데
분명하게 드러난 색깔로 짖는다.
우파니 좌파니, 친일이니 빨갱이니
서로 삿대질하며 원수처럼
우 우 몰려다니며
죽어라, 죽여라, 분풀이 하듯이
칼을 들지 않아도 섬뜩하다.
서슬을 세운 것이
이리와, 이리와, 착한 개야!
도둑을 지키던 개가 아니다.
반갑다고 꼬리치던 개가 아니다.
담 벽에 달려 몽둥이에 죽어간
주인을 믿던 개도 아니다.
개의 격이 다 망가진 개
하나같이 맹수처럼 사납다.
인간의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다.
아픔의 무게
궤도를 이탈한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며 마모되어 가듯이
너무 심하게 아프면
어느 구석에서 잊고 지내던
앓는 소리가 뜨겁게 튀어나온다.
평소에는 무심하다가도
한 지체가 아프면 온 지체가
풀이 죽고 힘이 빠져 비틀거린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에도 아픔이 파고들면
뼈를 깎는 고통에 입맛을 잃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이웃의 아픔에는 거리가 있어
걱정된다고 빨리 나으라는
고작 한 마디의 위로가 전부다.
너의 아픔을 읽으며
새삼 나를 돌아본다.
밑줄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느릿느릿 걷는 걸음 같아
두꺼운 페이지를 펼치면
가야할 길이 너무 멀기에
태산 앞에 선 듯 망설이다가
입을 꾹 다물고 눈으로
걸음나비가 빨라진다.
바람이 끼어들어 함께 간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문득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떤 문장이 붙잡고 놓지 않으면
붉은 볼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짧게는 한줄 길게는 여러 줄
마치 글자를 떠받든 선이
지혜의 샘을 만난 것 같고
택함 받은 백성의 자랑 같다.
다시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이
기억의 울타리를 쳐 놓은 듯
빨간 줄에 붙잡힌 문장들이
빛을 숨기고 있는지 밝다
겨울 사랑
천상의 여인이 내린 눈이다.
때 묻지 않은 단심으로
가정을 꾸미고 식구가 늘어나
한번 오지게 살고 싶은데
탱탱한 가슴을 풀어
젖을 먹일 아기가 없다
눈사람이 없다
요염하게 몸을 드러내도
아무도 보는 눈이 없는데
어느 천 년에 발소리를 듣나,
지상의 삶이라는 게 서로
어울려 뒹굴며 사는 일인데
불은 젖을 안고 참아야 하는
조선 여인의 정절 같은 처녀림이 되어
떠난 사람은 있어도 돌아온 사람이 없는
깊은 산동네 길은 사라지고
밤 깊어 불빛 보고 찾아오는
전설의 나그네도 없는 세월
무정한 바람이 스쳐 지나며
홀로 살기 싫으면 대처로 떠나라
넌지시 일어주고 간다.
겨울 일기
1. 눈
눈 속에서 꺼낸 노래가 절창이다.
하늘이 보낸 메시지 하나
눈처럼 살아라.
밤 지나
시시비비가 사라지고
화들짝 놀란 세상
우리 모두
한 이름 한 마음으로
흉내 낼수록 아름답고 좋은데
치명적일 것 같은
이 거대한 꽃잎에 향기가 없다니.
2. 골목
눈이 쌓여도
아이들이 없다
강아지도 없다
눈사람을 만들던
그때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웃음소리 사라진
빈
골목
경험
나를 거치지 않고 너에게 다가설 수 없다
너의 아픔과 슬픔 너의 분노와 억울함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 마라
다리 하나 없는 너와 아무리 함께 간다하더라도 내가 걷지 못할 때 나를 지나는 너를 읽는다.
안다는 것과 한다는 것은 다르다
네 굶주림이 아무리 사무쳐도 네 짐이 나의 무게로 내가 너로 몸 바꿀 때 비로소 하나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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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들레
풀밭의 민들레는
쉼표 같고
길가의 민들레는
물음표 같고
돌 틈의 민들레는
아 !
느낌표 같다
2. 여름
대낮에
바람 한 점 없는 산천
더위를 피해
숲으로 찾아들면
발바닥이 뜨겁다
장사에 재미난 태양이
계속 불을 지펴
이글거리는 열기 속
자연 찜질방이 성업 중이다.
돈을 갈고리로 긁어 담는다.
습관화하기
성긴 눈썹을 그리듯이 잠 깨어 기지개 켜며 몸을 풀고 일어나서 화장실 가듯이 누구나 만나 자랑만 하다가 다시보자며 헤어지지 말고 귀 기울여 들어주기 말수 줄여 수다를 줄이기 남의 잘못이 내 허물임을 누워서 침 뱉지 않기 무시를 당해도 화내지 않고 참고 견디며 나를 키우기 항상 늦게 오는 버릇이 여유로움이라고 약속시간을 기다리게 말기 사소한 일이라 모른 척 않기 몸도 마음도 날개를 달고 정직해지기 쉴 새 없이 되풀이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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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구부러진 길을 걸었다.
한 굽이돌면 사무침과 애달픔
또 한 굽이돌면 한숨과 울분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 다니던
내 젊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어
허기진 발길에 부서지던 어둠
얼마나 막막하고 서러웠던가,
한 번도 성큼 디뎌 본 적 없는
내가 만나 인연 맺은 이웃들
다 구부러진 길에서 만났고
첫사랑도 구부러진 길이었다.
빨리 갈 수 있는 한길은
내 보폭의 길이 아니라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생각하며 다시 걸어본다.
굽이마다 그리움이 반겨 맞고
투박한 사투리가 귀를 적시고
거친 손을 뜨겁게 내미는
견고한 바닥의 좁은 길이다
다시 읽는 꽃
눈부시게 화려한 꽃도
나를 못났다고 외면하지 않고
다가서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서 반겨 맞는다.
싫다는 내색 보이지 않는다.
늙어 냄새나고
남루해서 보잘 것 없어도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그리워 찾아 온 손님이니
섭섭하게 돌려세울 수 없다는
한결같은 마음이다.
찡그린 꽃을 본 적 있는가?
그래서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지 모른다
풀
한 포기도 풀 여러 포기도 풀 한 무더기도 잡초 여러 무더기도 잡초다. 하나하나 부르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는 한 번에 부르는 이름 어디서나 뿌리 내리면 사는 생명력이 실로 놀랍다 하나로 통하는 풀 또는 잡초가 모여 풀밭 이루고 무성할수록 눈물 많은 세상 여기서는 나보다 우리가 살맛이 난다. 바람이 한 번도 꺾지 못한 부드러움이 자랑이라면, 짓밟혀도 서로 세워주고 지구를 초록별이게 끝까지 지켜간다.
무슨 재미로 사는가
영혼도 숨을 쉬는가. 나는 꿈속에서 숨을 쉬었는지 모른다. 먹고 마시며 배불렀는지 모른다. 때리고 맞으며 아팠는지 모른다. 숨을 쉬어야 사는 육신 속에서 영과 혼으로 머물러 살다가 어느 날 바람처럼 쓰윽 빠져 나가는 영혼도 잘나고 못난 얼굴이 있는가, 누가 바람의 얼굴을 보았는가, 영혼도 오래 헤매 다니면 피로하고 배고픈가, 영혼도 늙으면 주름지고 영혼도 나이 들어 죽는가, 육신이 먹는 재미로 사는데 영혼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의식의 실체라는 영혼은 신의 아바타인가, 생의 본질도 무게가 있는가.
빈집 2
너 아니면 누가 날 돌보나
너 있어 외롭지 않고 너와 함께 행복하고 너의 온기로 지탱해왔는데
너 떠나면 누가 밤마다 불 밝히나 어둠 속에서 울다 지쳐 허물어져 갈 텐데
산 밑 외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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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1
어디서 흘러 온 부부가
딸 하나 낳아 살다가
마침내 떠나기로 하자
주인 닮아 웅크린 산 밑 외딴집이
한사코 가지 말라 매달린다.
함께 희로애락 하며 깊어진 정을
무정하게 떨쳐 버리고
산비탈에 일군 밭에 감자 옥수수 심고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더덕 캐고
산나물 뜯고 고사리 꺾어 시장에 내다 팔고
산딸기를 따며 행복해 하고
철마다 어김없이 피고 지는 꽃들
계곡물소리가 마음을 맑게 씻고
해와 달, 별들이 든든하게 지켜주었는데
우리가 무엇을 서운하게 했기에
그냥 다 버리고 가려하는가,
딸 아이 예쁘게 자라도록
들꽃들 동무 되어 놀아도 주었다.
산 숲도 거들고 나서고
지나던 바람과 구름도 그리 말라한다.
떠나는 순간 버림받아
어둔 밤을 슬피 울다 쓰러져갈 건데.
밥그릇 싸움
밥그릇이 세월이다. 한 그릇 더 챙기려고 새벽부터 밤늦도록 쉬지 못 한다. 끼니를 다 찾아 먹으면 하루에 세 그릇 그릇에 무엇이 담기는가. 가치와 값이 다르다 고기를 담은 그릇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푸성귀를 담은 그릇은 먹고 먹어도 허기가 진다 양과 질의 차이인가 한 끼에 오천 원, 만원, 십만 원, 백만 원... 누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가 끼니를 챙기다보면 주어진 복록이 있는 것 같다 누구의 한 달 수입이 누구에겐 한 해 양식이 되고도 남는 세상에 하루 세끼가 힘든 사람들 너무 많다 인간역사는 밥그릇 싸움이다. |
말의 얼굴
입안에 굴리다가 삼키지 않고
속셈을 뱉어낸 순간
주어 담을 수 없어 난처해지는
말은, 어디서 오는가,
상대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듣기 좋은 아첨은 독
충고는 불편한 약이지만
간지러운 말을 더 좋아하는 세상에
수다의 잔가지를 치면
아름다운 말씨로 태어난다.
꽃을 피우거나 잡초로 자라거나
감정에 따라 출렁이는 파도
더러 숨긴 가시에 찔리기도 하면서
불만이 많으면 구시렁거리고
꾹 다문 입은 천금이지만
할 말 안 할 말 분간 못하는
앵무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잘 나고 못난 얼굴이 되는데.
가로등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을 위해 사는 생은
희생이 당연한 것인가,
힘이 든다는 생각보다
연민이 더 큰지 모른다.
너를 내 몸 같이 사랑해서
길을 가다가도
헐벗은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지폐 한 장이라도 쥐여 주어야
한결 가벼워지는 발걸음
네가 행복하면 내가 즐겁고
내가 배부르면 미안해지는
그런 넉넉한 마음으로
늘 눈물샘이 고여 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 세상에 왜 왔는가?
물음이 오히려 부끄러운
떠난 자리도 아름답게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