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과 당쟁(黨爭)의 1
인조(仁祖)의 혁명(革命)은 서인(西人)의 공(功)이 많은지라 그 뒤를 이어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이 들어와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후 50여년간(餘年間)은 서인(西人)의 천하(天下)가 됨에 남인(南人)이 크게 불평(不平)하여 예송(禮訟)을 일으켜 서인(西人)과 항쟁(抗爭)하여 조야(朝野)가 요란하더니 그 뒤 숙종(肅宗) 초년(初年)에 허견(許堅)의 옥사(獄事)가 일어남으로 남인(南人)의 세력(勢力)이 꺾어지고 그 후 숙종(肅宗) 8년에 김석주(金錫胄) 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南人)의 잔당(殘黨)을 전멸(全滅)키 위하여 허영(許英) 허새(許璽) 등을 모역죄(謀逆罪)로 몰아 죽이니 서인(西人) 중에 소장파(少壯派)인 한태동(韓泰東) 박태보(朴泰輔) 등은 양김(兩金)을 배척하고 노파(老派)인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은 양김(兩金)을 옹호하니 이로부터 서인(西人) 중에 노론(老論) 소론(少論)이 서로 나누이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文人) 윤극(尹極)이 소론(少論)에 반부(返附)함으로 소론(少論)의 기세(氣勢)가 자못 떨치고 서인(西人)의 세력(勢力)이 좀 약하여 졌더니 및 장빈(張嬪)이 아들을 낳음에 숙종(肅宗)께서 세자(世子)를 삼으려한대 서인(西人) 김수흥(金壽興) 등이 반대(反對)하다가 쫓겨나가고 그 대(代)에 남인(南人) 권대운(權大運) 등이 들어와 정권(政權)을 주장함에 서인(西人)의 영수인 김수항(金壽恒) 송시열(宋時烈) 등을 죽이고 민후(閔后)를 폐(廢)하고 장빈(張嬪)을 후(后)로 삼으니 이로 남인(南人)의 세력이 왕성하더라. 그 후에 숙종(肅宗)이 점점 전비(前非)를 깨닫고 권대운(權大運) 등을 쫓아내고 소론(少論)인 남구만(南九萬) 유상운(柳尙運) 등을 불러 국정(國政)을 맡기고 민후(閔后)를 다시 복위(復位)케 하고 장후(張后)를 폐출(廢黜)하니라.
- 한글
인조의 혁명 이후 서인들의 공이 많았기에, 송시열, 송준길 등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50여 년간 서인들의 천하가 되자, 남인들이 크게 불평하여 예송 논쟁을 일으켜 서인들과 대립했습니다.
숙종 초년에 허견의 옥사가 일어나면서 남인들의 세력이 꺾였고, 숙종 8년에는 김석주, 김익훈 등이 남인의 잔당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이에 서인 내부에서도 노론과 소론이 갈라졌고, 소론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장빈이 아들을 낳자, 서인 김수흥 등이 이를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남인 권대운 등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서인의 영수인 김수항, 송시열 등을 처형하고 민후를 폐위하며 장빈을 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숙종이 점차 과거의 잘못을 깨닫게 되어, 권대운 등을 쫓아내고 소론파인 남구만, 유상운 등에게 국정을 맡겼습니다. 또한 민후를 다시 복위시키고 장빈을 폐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