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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 승리 위한 마리오네트 신앙>의 줄거리:
마리오네트 [Marionette]란 인형의 마디마디를 실로 묶어 사람이 위에서 조정하여 연출하는 인형극이나 그 인형을 가리킵니다. 선민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때 특이한 점은 선민 한 사람이 마리오네트가 되면 그 사람이 속한 삶의 현장 전체가 인형극 상자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주변인들도 하나님이 조종하시는 인형들이 되어 버린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갑니다.
참 승리 위한 마리오네트 신앙
(사사기 7:9~14)
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참 승리 위한 마리오네트 신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참 승리 위한 마리오네트 신앙’
인형극을 다 아실 것입니다. 인형극도 일반 연극과 다름없이 연출, 각본, 대본 등이 다 있습니다. 인형극은 실제로 연출하는 방법이 다른데 인형의 옷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팔과 다리 등을 움직이는 손가락 인형극이 있고, 인형의 각 부분에 줄을 매서 조종하는 인형극이 있습니다. 또한 광선을 이용해서 인형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비추는 그림자 인형극도 있습니다. 이중에서 인형의 사지에 줄을 매서 조종하는 인형의 이름을 “마리오네트(Marionette)”라고 합니다. 이 ‘마리오네트’는 13세기 이탈리아의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과정 중에 생겼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 말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마리오네트’는 인형극을 말하기도 하고, 줄로 매달아서 조종하는 인형 자체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수태고지를 받자 눅1:38절에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결혼 전 1년 동안의 정혼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는 같이 살지 않을 뿐이지 결혼 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지 않는 이 기간에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둘 때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마리아의 고백은 참 대단합니다. 이 말은 ‘저는 주의 마리오네트가 되겠나이다.’라는 고백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조종하시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라는 뜻이고 ‘내가 주체적으로 내 의지를 가지고 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며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줄에 매여서 ‘하나님이 조종하시는 대로만 움직이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마리오네트’라는 인형의 이름이 붙여지게 된 배경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의지가 없는 인형처럼 움직이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잉태를 시키셔서 돌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을 각오하는데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시는 비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여기서 드러납니다. 인형극 상자 안에 있는 모든 인형은 줄로 조종사의 손에 연결되어 있는데, 동정녀 마리아가 스스로 마리오네트가 되기를 자처하여, 하나님의 인형이 되면 그 주변의 관계 맺은 사람들의 삶이 인형극 안의 삶이 되어버립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기드온과 미디안을 대표하는 마리오네트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서 이기는 전쟁터 자체가 인형극 상자와 같은 것입니다. 기드온과 미디안이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싸우는데 기드온 인형이 미디안 인형을 때립니다. 그러면 미디안 인형이 넘어지는데 기드온이 때렸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기드온이 때리는 것은 기드온을 조종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움직였기 때문이고, 미디안이 쓰러지는 것도 기드온에게 맞았기 때문에 아니라 기드온의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의 손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인데 이것이 신앙의 커다란 비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미디안을 이기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개념의 승리가 아닌 진정한 승리를 얻을 때에 진정한 은혜 충만의 삶이 주어질 수 있는데 어떻게 행복한 삶이 가능할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만 이천 명 가운데서 삼백 명을 추려내시고, 전쟁을 하는 상황이 오기까지 기드온은 무려 세 번에 걸쳐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이 표징을 구한 행위는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 갇혀계시던 하나님이 실제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그 삶을 교체한 것에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우리가 앞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하나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네 번째 표징입니다.
기드온이 부하 한 사람을 데리고 미디안 진영으로 밤에 몰래 정탐을 가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미디안 한 군인이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고 합니다. 그 ‘한 장막’은 미디안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들은 친구가 해몽을 하는데 그 꿈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올라간 기드온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또 한 번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표징으로서의 의미가 좀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먼저 던져야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삼만 이천 명이 삼백 명으로 추려지는 과정에서 두 단계를 거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3절에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기드온은 두려워해도 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표징을 보지 못했지만 기드온은 세 번이나 표징을 봤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 이만 이천 명을 다 돌려보냈는데, 표징을 세 번이나 본 기드온이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으니 기드온도 귀가조치 당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드온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드온은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과 상대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드온이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기드온처럼 세 번의 표징을 겪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재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본문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육체의 눈으로 보는 어떤 것보다도 먼저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 내게 공포와 두려움을 줄 대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그 아버지 하나님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먼저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두려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늘 기드온의 두려움을 미디안과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생기는 두려움이 딱 한 가지가 있는데, 내가 만나게 되는 상황과 대상들에게서 만에 하나 그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보는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들을 잃는 것보다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놓치는 것이 훨씬 두려운 일인데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 번째 표징은 특이합니다. 미디안 진영의 군인이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이 기드온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붙박이처럼 되어버린 잘못된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이 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펼쳐질 때에, 내가 만나는 모든 대상과 사건들은 다 하나님께서 나의 승리를 위해 극복해 갈 장애물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해서 나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타인은 굴복되어야 될 존재가 아니고, 그들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각각 임합니다. 한 마디로 인형극 상자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면 미디안도 마리오네트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조종하는 마리오네트가 되면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도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이 임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이스라엘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었다면, 가나안 족속은 그 우상숭배와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멸절당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선민이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멸절당해야 했던 가나안 족속의 역할이 바뀌어서 선민을 치는 막대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선민이 마리오네트가 되지 못하면 그 주변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다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민이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주어지면, 선민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디안의 승리에 대한 내용은 기드온이 쳤기 때문에 미디안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미디안 진영에 있는 자들이 자기들의 운명을 꿈꾸는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는데, 이것이 우리 삶에서 진정한 승리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승리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그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승리인 것입니다. 내가 회사에서 승진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와 승진을 경쟁하는 자들에 대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의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고 싶어 하는데 그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있고 그 매력에 빠져서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단 하나도 놓쳐지지 않기를 바라게 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내 승리가 됩니다.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경쟁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것이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정말 잘 되기를 바라시죠? 남편과 아내와 부모님과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내가 만나는 이웃들도 잘 되기를 바라시는데, 이 세상이 정한 규칙에 따라서 경쟁해서 일 등하는 것이 잘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자녀에게 본래 가지고 계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의 관계와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면 이스라엘이 만나는 가나안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미디안은 이미 멸절해서 이렇게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정확한 마리오네트가 되면, 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임합니다. 야단을 치실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야단을 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마리오네트가 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마리오네트가 됩니다. 기드온의 승리는 미디안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미디안을 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두려워한 것도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까 두려워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한 번 그렇게 살아보세요. 어떻게 해야 내가 마리오네트가 될 수 있을까요?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내 마음이 압도되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혹은 내가 느끼는 필요에 대한 열망으로 내 삶을 추구하면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게 되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내 마음의 반응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또한 내 육체에 뿌리를 두고 필요로 인해 생기는 열망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가지고 계시고 알고 계셔서 때와 시를 따라 주실 것을 믿으며 십자가에서 내 열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열망이 나를 움직이는 줄이 되어서 나를 움직이실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생활화가 나를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게 정말 고약한 성격의 사장님이 계실지라도 그 사장님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나의 필요에 의해 저항하거나 용기를 가지고 대들거나 하지도 말고 사장님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고, 사장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질 텐데,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리던지 나를 향해 화를 내다가 발을 삐끗한다든지… 다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내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고,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잘 되기를 바라고, 우리나라가 잘 되기를 바란다면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리오네트가 되면 됩니다. ‘잘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내가 만나는 모든 대상과 모든 사건들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면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임하고 움직이실 것인데 이것이 진정한 평강의 삶입니다.
내 열망에서 출발한 소원은 이루어지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을 거스르게 됩니다. 참 승리는 옆에 있는 경쟁자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고, 옆에 있는 경쟁자는 그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나의 참 승리입니다. 렘29:1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하나님의 섭리의 줄, 하나님의 뜻의 줄에 매여 움직이는 철두철미 마리오네트로 살아감으로써 내 삶의 주변을 모두 하나님의 인형극상자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어찌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가 살 때에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망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외부에서 나를 압도하는 대상에 대해 죽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진실 된 마리오네트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