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구
1994년『현대시학』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외
낙산을 바라보며
― 방산芳山 박제천朴堤千 아우구스티노 선생을 그리다
청룡이 우는가,
번개 치고 천둥 울더니 낙산 위 하늘이 캄캄하다
꼽아보니 32년
방산 선생이 있어 세상 한편이 환하고
가슴이 설레고 마음 든든했는데…
이제 선생이 떠난 낙산 자락은 정전된 거리
먹먹해진 사람들이 촛불을 밝힌다
― 신작시 보내야지
― 탐방기 좀 써봐
― 부채시를 연재하면 어떨까?
꼼짝 못하고 원고를 써 보내면
보내주시던 한 줄의 회신
― 수고했어요
― 잘 썼어요
그 말 한마디로 피로가 풀렸다
덕분에 시를 쓰고 시집을 엮고
아흔 분의 부채시를 봉헌하며 공부했다
쉬고 싶다는 말씀은 번번이 목구멍에 걸렸다
시집 내고는 시가 안 써집니다
― 마음의 고삐를 다잡아야지
발표할 시는 몇 편이나 가지고 계셔요?
― 여섯 편은 저장하고 있어야지
특집이라면 5편을 주고도
간장맛 지키는 씨앗 한 편은 남겨두어야 하니까
그날 밤 열어 보인 선생의 컴퓨터 장꽝에는
금붕어처럼 영롱한 시편들이 예닐곱 뛰놀았다
제 시를 어떻게 바꿔가야 할지 막막합니다
― 시 가는 대로 따라가라
부지런히 관찰하며 시를 따라가면 길이 보인다
늘 즉답이지만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이백 분이 넘는다는 사숙 출신 시인들의 발표를 위해
잡지를 만들었고 낭송회를 열고 문학상을 만들고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특강을 하셨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빠졌다
아니, 무엇보다 후회스러운 것은
가끔은 만사 제치고 형형한 얼굴과 마주하여
복분자술 얼큰한 김에 속가슴에서 꺼낸 질문으로
1:1 수업을 받았어야 했는데…
방산재 기둥에는 선생이 남긴 마지막 교훈인 양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一日不作
먹지 않는다一日不食’가 걸려 있다
결국 날마다 날을 갈고 땀 흘리는 수밖에
시의 길에 왕도는 없다는 뜻이겠다
모처럼 외출 나온 신학생들이
해맑은 웃음으로 넘어간 낙산 언덕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리던 날에도
싱그러운 시의 세상을 꿈꾸며 저어가던 사람들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먼 길 떠나는 일은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이었다
― 온 것은 돌아가게 마련이니 두려울 것 없다
막막해하지 마라
우리 모두 곧 만나게 되리니
아우구스티노, 마틸다, 김구용, 서정주, 성찬경과
노자, 장자, 한비자와 함께 이쪽을 내려보시는가?
호랑이 나오던 인왕산 쪽 하늘이 훤해졌다
구름 위에서 호쾌한 웃음소리들이 들려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