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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궁창의 창조
2017년 01월 04일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방영
오늘은 둘째 날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창세 1,6-8)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지금 우리가 읽은 것 중에 다른 날과는 조금 차별이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이 여기만 없습니다. 그러면 실수로 없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날에는 예수님이 빛이신데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의 어떤 정점이 ‘예수님의 십자가’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십자가의 삶이랑 우리의 삶이랑 비추어 보면서 아, 내 삶은 예수님의 빛의 삶과는 좀 다른데 예수님을 쫓아가고 싶다. 라고 하면, 예수님의 빛이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말씀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여 그 말씀으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할 것이고, 아, 나는 이 말씀이랑 상관없어 나는 막 살아 갈래, 성경을 하루라도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빛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싫어하느냐 하면 맨날 성경에 ‘원수까지 사랑하라, 십일조 내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 음탕한 눈으로 쳐다보면 간음하는 것이다. 눈을 빼버려라’는 말만 있으니까 불편하여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게 빛이 내 안에서 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빛을 계속 받는 것을 우리는 기도라고 하는데 성경을 읽는 것도 기도고 묵상을 하는 것도 기도이며 내가 내 삶을 기도 안에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는데 나는 지금 돈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을 이용해서 예수님, 우리 돈을 많이 벌게 해주세요. 예수님, 내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나 건강하지 않으면 성당에 안나옵니다. 이렇게 위협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빛에 의해서 내 삶을 바라보는 것을 묵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상기도 : 빛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
묵상은 빛을 통해서 내 삶을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미사에서도 신부님이 강론 시간에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강의를 듣는 것도 모두 기도입니다. 그런 것으로 내 삶을 비추어보면서 변화시켜나가는 것을 묵상기도라고 합니다.
방안에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어두우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면 여러분 방은 아주 깨끗합니까? 뭐가 막 떠다니지 않습니까? 떠다니는 게 평상시에는 안보입니다. 그렇게 빛이 내안에 들어왔을 때는 훨씬 내안의 잘못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빛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될수록 사람들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왜, 내안에 엄청난 쓰레기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빛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을 묵상기도라고 합니다.
『관상기도 : 빛과 하나가 되는 것』
관상기도는 이제 빛을 막 좋아하다가 해바라기처럼 빛을 보면 눈이 멀어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어두운 밤이 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 가까워져서 이제는 내가 빛을 직접보기 때문에, 여러분은 태양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보는데 썬그라스를 끼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이런 계시는 내가 벗겨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볼 수 있도록 내 앞에 누군가가 가려지는 것입니다. 썬그라스처럼, 아무튼 이렇게 자꾸 보다가 보면 해바라기처럼 나도 빛이 됩니다. 스며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은 몸이 빛나는 사람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얘기하다가 내려왔더니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이 빛나서 사람들이 무섭다고 하는데 본인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답답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예수님이 없으면 보지를 못하는데, 자꾸 이미 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봅니다. 너 이런 것 잘못했잖아 나는 이런 것을 잘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 안에도 엄청나게 많은 죄가 있어 라고 빛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자신들은 잘산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것은 안보고 남만 판단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의 빛으로 우리들을 비추어 보기 전에 나는 정말 그동안 살아온 것이 장님이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자신은 당연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청하고 또 그것을 내 자유대로 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장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눈이 떠져서 아, 나는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었구나.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당당하게 나는 이만큼 살았는데 하느님 나를 인정해주세요. 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정말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바리사이가 무슨 뜻입니까?
『바리사이 : 분리된 자, 분리하다의 뜻』
나와 너는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너랑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보다 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이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눈이 장님인 사람이다. 장님은 영원한 한증막에 가야된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못나옵니다. 불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불안에 들어가서 있는 것입니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이스라엘의 하루는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저녁 오후 3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은 저녁 6시부터 시작인데 제물로 바칠 양과 염소를 잡으려면 어두워지니까 오후 3시부터 잡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특전미사 이런 말은 필요 없습니다.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주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서는 하루를 마감하는 그 하루가 저녁부터 아침까지인데 어둡다. 어둠이 지나면 하루가 지난 것이고 창조가 지난 것입니다. 지금 한절 한절이 모두 창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어둠은 생명일까요? 죽음일까요?
『어둠 : 창조를 위한 희생과 죽음을 상징』
죽음이며 매번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가 빛을 내는 것은 초가 타서 죽으며 빛을 내는 것이고, 이 세상의 악취 죄를 없애려면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야 합니까? 향으로 타서 이 세상에 있는 악취를 중화시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바로 우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매번 돌아가셨다는 것을 매번 봐야 되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말 안에는 그분께서 죽으셔야 하루의 창조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이외에는 우리들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야합니다.
[“보시니 좋았다”(창세 1,4)]
보시니 좋았다고 하시는 것은 아드님이 죽는데 뭐가 보시니 좋습니까? 그렇지만 새로이 창조되는 이런 것들이 좋은 것입니다. 인간들도 남녀가 사랑을 해서 새로운 생명이 창조되는데, 창조되면 좋습니다. 좋으면 자꾸 낳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창조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안낳으려고 고생을 가장 안하려고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좋은 나라, 아, 그만큼 나는 아프니까 창조를 이제 그만 할래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과 그만큼 동떨어져서 이제는 자기만 아는 좀 이기주의적인 그런 삶을 조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좀 반성을 해야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창조하시고 아드님이 죽지만 보시니 좋았다 라고 하고 계십니다.
『창조 → 물과 물을 나눔』
둘째 날은 물과 물을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물과 물 어떤 분들은 북극에 가면 맘모스나 어떤 큰 짐승들이 얼음 안에 갇혀서 썪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석보다 살아 있는 상태로 있는 그들의 배를 갈라보면 그들의 배 안에서 푸른 풀이 나왔습니다. 북극인데 그래서 옛날에는 푸른 초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물을 나눴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물과 하늘에 둥그렇게 있는 물이 홍수 때 쏟아진 것인데, 노아 홍수 때 물이 쏟아지고 나서 사람은 120년밖에 못살았다. 더 살은 사람도 있었지만, 물이 지구주위에 있어서 자외선이나 인간에게 안 좋은 것들을 그 물이 차단해주어 전 세계가 따뜻하여 사람들도 거인들도 있었고 살기도 900년 등 엄청 많이 살았죠. 저는 너무 오래 살면 힘들 것 같아요? 몸집이 큰 공룡들도 살았고 홍수 이후에 풀도 잘 자라지 못해 멸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랑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일단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도 물과 물이 합쳐져 있을 수 있고, 물과 물이 갈라져있을 수 있습니다. 물과 물이 갈라진 곳을 궁창이라고 했는데 그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여러분은 빛을 잘 봐야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살아야겠습니까?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는데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가서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섬기고 있고 하느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 듣습니다. 11조 내라 그러면 안 듣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라 그러면 안 듣습니다. 기도 좀 많이 해라, 성경 좀 읽어라 하면 안 듣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섬기고 있는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신다는 것은 당신이 사실 수 있는 공간을 끊임없이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과 물이 합쳐져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열어놓고 있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물과 물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공간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어디를 창조하셨습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어디어디에 사십니까?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땅에는 왜 안사십니까? 땅은 아담이 죄를 지어 저주를 받았으니까 사실 수가 없습니다. 땅은 죄를 의미합니다. 하늘이라는 것은
『하늘(궁창)에 계신 우리 아버지 : 하느님께서 당신 성전에 계시듯이, 의인들의 마음에 계신다는 의미로(가톨릭 교회 교리서 2794)』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사시는데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당신이 사실 공간을 우리들의 마음 안에 마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과 물이 합쳐졌을 때는 노아의 홍수 때입니다. 그때 어느 공간만 사람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노아의 방주를 만들 듯이 하느님이 들어와서 사실 수 있는 어떤 공간을 우리 안에 만드시는 것입니다. 물과 물이 떨어져 있으면 괜찮은데 성경에 보면 물과 물을 나누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물과 물을 가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홍해를 가르는 것 물과 물이 갈라지면 살 수 있고 합치면 죽음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탈출 14,21)]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이야기만 하고 있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뭐로 물과 물을 가르는 것인지? 마른 땅이 드러나게 물과 물을 나누었는데 어떤 힘으로? 샛바람인데 그 바람은 어떤 바람일까요?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루아흐(ruakh히브리어) → 성령, 이곳의 샛바람에도 ‘루아흐’를 썼습니다. 왜 성령으로 물과 물을 가른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며 『물을 가르는 힘은 성령님』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셔야 물과 물이 갈라진다. 성령을 주시지 않으면 물과 물이 갈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 성령의 힘은 어떤 힘일까요? 힘으로 가르기 위해서 내가 힘을 막 뺐어요? 그러면 나는 약해집니다. 『성령은 곧 피다』 내가 고생하는 것,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르단강을 가를 때도 ‘계약의 괘’가 요르단강의 중간에 서있었습니다. 그 계약의 괘 안에는 십계명판, 만나, 아론의 지팡이 이 세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고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내가 죽어서 흘려주는 피가 곧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이 없으면 강둑이 생기지 않는다. 가나안 땅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당신 성령으로 여시는 것입니다. 물과 물이 갈라지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로부터 받은 겉옷으로 겉옷은 성경에서 무엇과 같은 단어냐 하면 사람의 ‘전부’, 겉옷을 준다는 것은 전부를 준다는 것이고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는 어두워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밤에 덮거나 깔고 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겉옷은 마지막 생명의 수단이며, 맡기고 쌀 한톨이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 겉옷이라는 의미는 생명이며 전부라는 의미입니다. 겉옷을 줬다는 것은 전부를 줬다는 것입니다. 하늘로 가는 엘리야가 엘리사한테 자기의 겉옷을 떨어뜨려 주었으며 겉옷은 전부이며 전부는 생명입니다. 생명이고 선물이고 피가 곧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9)]
『스승님 영 루아흐(ruakh히브리어)』 성령을 피를 달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1요한 5,8)]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성령입니다.
박보영 목사님이라고 혹시 아시나요? 박보영 목사님은 39살까지 의사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얼마 안되는 돈 30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는 거지가 되어 목사님이 됐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가난하게 되고 단명하며 독신으로 살고 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우리가 바라고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려고 하는 것은 이세상의 영화가 아니라 허물어져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을 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가난하게 되었고 말도 엄청 못하시는 분으로 언변이 없으니 사람들이 안와서 1년 넘게 아무도 안 왔습니다. 그래서 거리에 있는 깡패들 문신하고 본드하는 애들 7-8명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있는데 누가 오겠습니까? 7년 동안을 그렇게 살았답니다. 얘들이 라면 하나로 7-8명이 나누어 먹으니까 너무 힘들고 배가 고프니까 도둑질을 하러 간 것입니다.
목사님이 또 도둑질을 하고 왔다고 그곳에 가서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고 애들을 어떻게 교육을 시켰냐고 혼나고 매도 맞고, 말을 하면 그때뿐이지 바뀌지를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들이 또 도둑질을 하고 왔을 때, 한 놈을 쇠파이프로 엉덩이를 세게 때리고 쇠파이프를 주면서 각자가 열대씩 나를 때리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도둑질을 할 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 지를 너희들에게 알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애들이 처음에는 천천히 약하게 때리다가 세게 때리라고 하니까 때리다가 잘못 맞아 허리를 다쳐 40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40일 동안 도둑질을 하러 가지 않고 뺑 둘러앉아 물만 먹으면서 이 목사님을 지킨 것입니다. 왜 너희들 도둑질하러 안가니 하고 물었더니, 아니 지금까지는 이 세상에 사랑이 없는 줄 알았는데 목사님 때문에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줘야 그 사람의 사랑이 너무 고마우니까 그 사람의 기대대로 살아갈 것 아닙니까! 내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줄 알아야 예수님의 기대대로 살아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왜, 나만 이렇게 못생기게 나아주셨어요?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나아주셨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대대로 살아가겠습니까? 감사해야 기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그 감사하는 마음을 주어야 하는데 그 감사하는 마음을 주는 것이 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지갑을 감추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했는데 이 목사님이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피라는 것이고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믿게 되었으니까 이제 그 목사님의 뜻이 아이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지마라는 목사님의 그 말이 이제 드디어 그 아이들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공간을 만들려면 내가 너희들을 이만큼 사랑한다고 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땅을 말려주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성체를 영하면서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 감사해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이제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구나! 그것을 느끼게 하시려고 그 감사, 성체를 감사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 우러나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아들까지 죽였는데 고맙지 않아! 고맙다고 ‘아멘’ 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살 공간 좀 마련해줄래!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목사님은 아이들 안에 살게 되는 것인데, 하느님께서 우리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을 하실 수 있으실까요? 못하십니다. 이 구절만 그렇게 못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죽이시면서 ‘보시니 좋았다.’ 라고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들까지 죽이면서까지 당신 뜻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너무나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 이제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창조는 쌍방 간의 피 흘림 : 하느님을 받아들일 공간을 내어놓아야 함』
당신께 공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사실 수 있는 하늘, 이제 나를 죽이고 깨끗한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둘째 날의 창조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또 한주간도 사실 수 있도록 마음을 내어드리기 위해서 더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알아야 감사를 할 것 아닙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감사하는 그런 한 주를 또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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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하는 하느님
당신이 저에게 오실 수 있게 방을 깨끗이 치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흠숭합니다, 아멘
하느님 아버지, 제마음의 제뜻은 당신께 다 드리며, 제 마음에 궁창(하늘)을 만드시어, 하느님의 뜻이 차지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