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초대를 받은 적이 있는가?
바람은 풍류이고 가락이다. 자유로운 감성의 율동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바람을 즐기고, 바람 위에 몸 싣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바람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부드럽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고 보면 시인의 상상력은 바람의 속성을 지녔다.
바람이 시인을 초대하는 곳, 혹은 바람이 사람을 초청하여 풍류객으로 만드는 곳이 부산에 있다. 서면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풍락재(風樂齋)'이다. 당호(堂號)의 의미 그대로 풍류를 즐기는 집이니, 여기가 곧 시인 묵객들의 사랑방이다. 권경업 시인이 가까운 지인들을 위해 작년에 마련한 공간이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라.
풍락재의 규칙은 이뿐이다. 풍류객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겐 암묵적으로 공인된 법도(?)가 있다.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와인으로 마셔야 하고 그에 걸멎는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주인이 처음부터 그래 주기를 은근히 원했다.
그렇다고 이 점 때문에 위축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풍류이고 술은 그 방편일 뿐이다. 그리고 시인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도 기분 나쁠 리 없다. 기실 주인장 권경업 시인도 품성이 산처럼 넉넉한 사람이다.
풍락재의 단골손님은 시인을 비롯한 소설가, 동화작가, 작곡가, 의사 등 다양하다. 이곳에서는 나이와 성별과 전공이 중요하지 않으므로 문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가객'으로 통한다. 시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전용문, 성수자, 권영주, 박명호, 문성수, 구영도, 권오철, 한정기, 이영옥 등은 알아주는 가객이다. 문학적인 신명과 재담을 겸비한 꾼들이다.
이들은, 멤버 중에 한 사람이 작품집을 내면 이곳에서 조촐한 와인 파티를 연다. 저녁 무렵에 와인 한 병씩 사 들고 모여 그간의 노작을 위로해 준다. 시집이라면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낭송하며 그 가락과 이미지에 취한다. 소설이나 동화라면 인상 깊은 장면과 그 끝없는 뒷얘기에 빠진다. 분위기가 오르면 노래도 부른다. 술이 부족하면 주인이 무한정 공급해 주므로 걱정할 필요 없다. 모든 것은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다.
풍락재 가객들은 계절의 미각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 봄에는 두릅과 화전,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 그리고 가을엔 버섯과 햇과일로 몸의 감각을 쇄신한다. 뜻없이 한 계절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다. 이에 맛들인 가객 중에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인 사람도 있다. 옻의 새순을 두릅으로 착각하여 몽땅 꺾었다가 얼굴에 옻이 오른 사건이다. 박명호 소설가가 그 장본인이다.
최근에는 '번개모임'도 신설했다. 비가 오든지 특별히 술 생각이 나는 날 가객 가운데 누군가가 모임을 요청하면 손쉽게 술자리가 이루어진다. 지난 주말에는 야간 산행 번개모임이 있었다. 금정산에 올라 초여름 숲속에서 와인과 문학 이야기로 밤늦도록 놀다가 내려왔다. 이런 경우는 풍락재의 공간을 금정산으로까지 확장했다고 봐야 한다. 그야말로 풍류객다운 발상이다.
그러난 풍락재가 노는 공간만은 아니다. 가객의 멤버가 아니라도 주목받는 시인이 있으면 바람의 초대장을 띄워 토론의 장을 만든다. 김석규, 유병근, 진경옥 등의 대가에서부터 조말선, 송진, 정진경 등의 신예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초대된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대구의 서지월 시인과 연변의 석화 시인 등이 다녀가기도 했다.
방 한 칸이 서규정 시인의 창작실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시끄러운 도시 공간 속에서 쫓기다시피 시를 쓰는 그에게, 풍락재의 고요한 오전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최근에 왕성해진 그의 창작열은 풍락재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여러 모로 풍락재는 훌륭한 사랑방이다. 부산의 문화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국제신문:조성래의 시인마을 소묘 1](2006)에서